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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백>속 김승효씨의 출연 모습.
 영화 <자백>속 김승효씨의 출연 모습.
ⓒ 뉴스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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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그렇게 한 것이 박정희야. 그것이 박정희의 정치야. 어떤 정치냐면 청와대 정치고, 중앙정보부의 정치야. 어떤 것이라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아."

최승호 신임 MBC 사장이 지난 2016년 만든 <자백>에 출연한 김승효씨의 회고다. 그가 말한 '중앙정보부의 정치'를 '김기춘의 정치'로 치환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김승효씨는 박정희의 시대가 낳은 중앙정보부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 중 한 명이다. 

재일교포 출신으로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1974년 서울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그는 모진 고문 끝에 배후에서 학생운동을 조종했다는 죄로 7년 동안 감옥에 갇혔다. 풀려 난 뒤에는 고문 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났고, 결국 일본에 다시 넘어간 후에도 수십 년 동안 정신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남산에 끌려갔던 1974년 5월 4일, 그 날짜를 절대 잊지 못하는 그는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잊어버리고 싶단 말이야. 그 암흑의 세월을, 지옥 같은 세월을 잊어버리고 싶단 말이야. 왜냐하면 가슴이 아파서 죽을 지경이야. 왜냐하면 무죄로 못됐으니까 죽을 지경이야. 죽고 싶단 말이야. (그 시절을) 다시 생각하지 않는단 말이야."

김승효씨는 단호했다. <자백>의 최승호 감독이 한국에 올 생각이 없자고 묻자 김승효씨는 "한국에 다시 오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그러면서 "한국은 나쁜 나라다", "얼마나 한국이 나쁜 나라인지 말하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다. 20대 꽃다운 나이에 중앙정보부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고, 결국 '무죄'는커녕 이후 평생을 육체와 정신의 고통을 호소하며 산 그의 세월을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까.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부터 현 국정원까지. <자백>은 한국의 정보기관이 조작했으며 차후 무죄 판결을 받은 간첩 사건이 무려 100여 건에 육박한다고 밝혔다. '간첩 조작의 달인'으로 유명한 김기춘은 김승효씨와 같은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 앞에서 무어라 말 할 수 있을까.

젊은 공안검사였던 김기춘이 '간첩 조작'의 '능력'을 인정받아 박정희 유신 정권에서 승승장구하며 정치적 성공의 초석을 다졌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역사'다. 검사로서 유신헌법 초안을 만드는 데 공을 세운 김기춘은 유신의 한복판인 70년대 중·후반 중앙정보부에서 대공수사국장으로 5년간 근무하면서 숱한 간첩 조작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정치인으로, 법무부장관으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70대까지 권력의 정점으로 다가갔던 그 김기춘이 간첩 조작 사건의 피해자들과 가족들에게는 물론 여타 본인이 연루된 사건과 관련해 그 어떤 공식 '사과'를 했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기 전까지 말이다.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던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7월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 중앙지방법원에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지난 7월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 중앙지방법원에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호송차에 내려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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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19일 항소심 재판 법정에 선 피고인 김기춘이 최수 진술을 통해 병석의 아들을 들먹이고 선처를 호소하며 울먹였다고 한다. '화무십일홍'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기나긴 세월 동안 권력의 단맛을 누렸던 김기춘이 이제 와서 병석의 아들을 거론하며 선처를 호소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남은 소망은 늙은 아내와 식물인간으로 4년간 병석에 누워 있는 아들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아주는 것입니다."

이번 뿐만은 아니다. 김기춘의 아들은 지난 2013년 12월 교통사고 이후 뇌출혈 판정을 받고 의식 불명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6년 국정농단 청문회 당시에도 김기춘은 아들을 언급했다.

그는 당시 세월호 참사 이후 인양을 최대한 늦춰야 한다는 지시를 했다는 의혹에 대해 "저는 그런 생각을 가진 일도 없고 그렇게 지시한 일도 없다"며 "저도 아들이 죽어 있는 상태인데 왜 시신을 인양하지 말라고 하겠냐"고 말하기도 했다. 이 같은 김기춘의 호소에 대한 자연스런 반응은 아마도 세월호 유가족인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소셜미디어 글일 것이다.

"기춘 대원군 식물인간 아들 손잡아주고 싶다고요... 눈물 겹네요. 저도 유민이 손 잡고 싶습니다. 그런데 유민이가 내 곁에 없네요.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던데..."

김기춘의 최후 진술이 알려지면서, 다시금 주목을 받았던 '아들'과 '부모'도 있었다.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그의 어머니다. 국정농단 사태가 한창이던 작년 연말, 김영한 수석의 어머니는 복수의 언론을 통해 "아들이 죽은 건 김기춘, 우병우, 박근혜 때문"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한 바 있다.

2014년 6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박근혜 정부 청와대에서 근무한 김영한 전 수석이 김기춘, 우병우 등과 갈등을 겪었고, 결국 퇴직 후 급성 간암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이었다. 김기춘은 이들을 포함해 숱한 직간접적인 피해자들과 그의 가족들에게 원망과 원한을 샀다. 그가 최후 진술에서 아들을 언급하자 "내 자식이 귀하면 남의 자식도 귀하다던데..."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유다. 헌데, 김기춘의 예의 그 '확신'은 다른 발언에서 더 확실히 드러났다. 

여전한 '확신범' 김기춘

올 1월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비선의 그림자 김기춘 ? 조작과 진실'편의 한 장면.
 올 1월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비선의 그림자 김기춘 ? 조작과 진실'편의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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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월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비선의 그림자 김기춘 ? 조작과 진실'편의 한 장면.
 올 1월 방영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비선의 그림자 김기춘 ? 조작과 진실'편의 한 장면.
ⓒ sbs,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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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 종북 세력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 공직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왔다."
"제가 가진 생각이 결코 틀린 생각은 아니라고 믿지만, 북한 문제나 종북 세력문제로 인한 위험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다."
"본인을 비롯해 모든 피고인이 결코 사리사욕이나 이권을 도모한 것은 아니고 자유민주주의 수호란 헌법적 가치를 위해 애국심을 갖고 성실히 직무수행을 하다가 벌어진 일이라는데 한 치의 의심도 없다."

이날 김기춘의 최후 진술을 갈무리하자면 이러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다를 바 없는 '확신범'의 언어다 다를 바 없다. 종합하자면, 본인의 블랙리스트 지시와 세월호 참사 진실 규명 은폐, 블랙리스트 지시 등이 헌법적 가치에서 비롯된 '애국심'의 발로였고, 과거 간첩 조작 사건을 포함해 '공안' 이력이 '북한'과 '종북' 세력으로부터 조국을 지키기 위한 '공직자의 사명'과 '직무수행'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6월 법정에서 "특검이 재판을 할 것도 없이 사약을 받으라고 독배를 들이밀면 제가 깨끗이 마시고 이걸 끝내고 싶다"라고 한 것이 다소 감정적인 발언이었다면, 이번 최후 진술은 꽤나 자기 확신을 드러낸 '진심'에 가까운 것으로 풀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배경 위에서 "경위를 불문하고 지휘관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며 "고통받으신 분들에게 거듭 사죄의 말씀을 드리고 용서를 구한다"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국민이, 피해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백번 죽어도 마땅하다"며 결백을 호소하던 그 피고인 김기춘이 "아들의 손을 다시 잡고 싶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그런 그에게, 인간적인 '호의'와 '연민'을 보내기에게는 '중앙정보부의 정치'를 실현하고, 피해자들에게 지옥의 세월을 맛보게 했던 지난 과오와 치러야 할 죗값이 너무나 크지 않은가. 검찰이 구형한 7년형이 "부족하다"고, "종신형도 부족하다"는 여론이 빗발치는 것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저는 정말 내가 그런 것이 권력을 남용해서 인권을 유린하고 고문하고 이랬으면 오늘날 김기춘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요. 그 점을 제가 자부합니다. 그 점이 다른 사람보다 어떻게 보면 훌륭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원이던 지난 2005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기춘은 위와 같이 말했다. 김기춘이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본인이 살아온 세월에 대한 '자부'가 남다른 인물이라 할 것이다. 그 자부심을 안고서, '법조인' 출신 김기춘이 특검이 구형한 딱 그만큼만 감옥에서 제2의 인생을 보내기를 바란다. 우연찮게도, 김승효씨가 억울한 옥살이를 한 세월 역시 7년이다. 


태그:#김기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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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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