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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치인들이 모두 머슴을 자처하고 나섰다. 국민으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상황이다.(사진은 영화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중 한 장면)
 최근 정치인들이 모두 머슴을 자처하고 나섰다. 국민으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상황이다.(사진은 영화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중 한 장면)
ⓒ 연필로 명상하기, EBS,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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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 이야기로 시작해 보자.

최근 머슴론의 은혜를 가장 크게 입은 이는 단연코 이재명 성남 시장이다. 그냥 머슴도 모자라 '국민 머슴'이 되었다. 그는 "정치인은 국민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국민에게 고용돼 월급 받고 국민을 위해 일할 의무가 주어진 공복(公僕), 머슴"이라는 말로 자신의 결기를 나타냈다.

12․12 내란죄의 주인공인 전두환은 이달 초 회고록을 냈다. 전씨는 시민들이 '역사 쿠데타'라고 이름을 붙인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이 된 뒤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부으며 머슴처럼 일했다". 이를 보도한 한 언론은 "머슴 대통령"이라고 기사 제목을 뽑았다.

문희상 의원도 가세했다. 지난 3월에 출간한 자신의 책과 관련한 언론 인터뷰에서 "머슴을 잘 뽑으라는 것이다. (대통령은) 머슴 중에서도 왕머슴 아니냐"라며 '머슴 대통령'을 넘어서는 '왕머슴 대통령'을 주장했다.

국민의당 박주선 국회부의장 역시 방송사가 마련한 대선주자 합동 토론회에서 "대통령이 되면 청와대를 '큰 머슴'이 사는 '머슴의 집'으로 바꾸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가장 최근에는 조원진 의원이 자유한국당을 탈당해 새누리당에 입당하면서 대선 후보 출마를 거론하며 "새누리당의 머슴이 되겠다"고도 했다.

이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왕 머슴-큰 머슴 자리를 놓고 머슴들끼리 이전투구하는 모양새다. '머슴 정국' 상황에서 뜻하지 않게 머슴을 부리는 주인의 처지가 된 국민으로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다.

이쯤에서 잠깐 머슴들의 이야기는 멈추고 '회초리' 이야기로 가 보자.

전주시 덕진구 선관위는 최근 블로그에 '유권자여 회초리를 들자'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사진은 영화 '아홉살 인생' 중 한 장면)
 전주시 덕진구 선관위는 최근 블로그에 '유권자여 회초리를 들자'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사진은 영화 '아홉살 인생' 중 한 장면)
ⓒ 황기성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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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회초리' 이야기를 꺼낸 정치인은 심상정 정의당 대표다. 심 대표는 지난 3월 28일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한 기자회견에서 "지난 총선에서 광주는 더불어민주당에 국민의당이라는 회초리를 빼들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회초리를 빼주셔야 한다"고 말했다. 같은 당의 윤소하 의원도 지난 4월 5일 전남선거대책위원회 출범 기자회견에서 심 대표와 똑같은 말로 회초리론을 거듭 거론했다.

전주시 덕진구 선관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난 4일 블로그에 "유권자여 회초리를 들자!"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국민은 정치인을 키워준 부모이므로 아이가 말을 안 들을 때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하는 것처럼 정치인들에게 사랑의 매를 들어 회초리를 때리자"는 것이다.

"국민 여러분 회초리를 들어 주세요. 말 안 듣는 정치인들에게 사랑의 회초리를 때리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정치인들 종아리에 회초리를 쳐서 오만불손한 버르장머리를 타이르고 가르쳐서 이 나라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주셔야 합니다"라고.

지난 1월 새누리당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과 당 지도부는 <회초리를 '들어라! 청년 편'> 행사를 마련했고, 민주통합당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등은 2013년 대선 패배를 속죄하는 '회초리 민생 투어'에 나서 '회초리 민심간담회'를 마련하기도 했다.

2014년 새정치민주연합 공동대표 시절 안철수 의원은 국회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기자회견을 하고, "그동안 야당은 뭐했느냐면서 국민들께서 회초리를 드신다면 달게 받겠다"고 했으며, 이듬해(2015년)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도 4․29 재·보궐 선거 패배 이후 처음으로 광주를 방문해 기자들과 만나 자리에서 "광주시민들이 아주 쓴 약, 아주 아픈 회초리를 주셨다"며 회초리 이야기를 꺼낸 바 있다.

현직 정치인은 아니지만 박종훈 경남교육감도 '회초리' 한 대를 보태는 발언을 남겼다. 지난 해(2016년) 박 교육감의 친인척과 측근들의 비리가 드러나자 "회초리 맞는 심정으로 사과드린다"는 말로 머리를 숙였다.

이 밖에도 여러 정치인들이 자주 '머슴과 회초리론'을 사용해 왔고 지금도 쓰고 있다. 자신을 낮추어 선택을 바라거나 국민 앞에 용서를 구하는 일 등이 생겼을 때 머슴과 회초리는 관용구처럼 딸려 나왔다. '석고대죄(席藁待罪)'라는 사극 대사도 종종 자리를 펴고 합석했다.

머슴이니 회초리니 하는 말에는 겸양의 미덕이 아니라 전근대, 봉건, 폭력을 옹호하는 생각이 스며들어 있다.
 머슴이니 회초리니 하는 말에는 겸양의 미덕이 아니라 전근대, 봉건, 폭력을 옹호하는 생각이 스며들어 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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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러한 정치인들의 머슴과 회초리론이 불편하고 씁쓸하다. 그들이 민주주의 아래 대의정치를 실현하려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1997년 이른바 한보청문회 당시 한보그룹의 정태수 전 회장이 청문회에 나와 "자금에 대해서는 사장인 내가 알지, 머슴이 알겠느냐"며 대한민국 직장인 모두를 한 순간에 머슴으로 전락시킨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러나, "주로 농가에 고용되어 그 집의 농사일과 잡일을 해 주고 대가를 받는 사내(표준국어대사전)"를 뜻하는 '머슴'은 1970년대를 전후해 사라진 이름이며 직업이다. 신분제 봉건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전근대의 용어이며, 인간이 인간을 종(노예)으로 부리는 것을 당연시하는 반인권의 용어이다.

국민을 잘 섬기겠다는 마음을 담아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것이 오늘 날 '머슴'이라는 표현의 속뜻인데 이는 "국가나 사회의 심부름꾼이라는 뜻으로, '공무원'을 달리 이르는 말"인 한자어 '공복(公僕)'의 우리말 식 표현으로 보인다. 공복(公僕)의 복(僕)은 '남자 종-노비'를 뜻한다.

'공복(公僕)'이라는 말에는 공무원에 대한 비하와 폄하, 성 차별과 같은 맥락이 담겨 있다. 공무원을 공복이라고 부르는 것은 민주주의 용어가 아니다. 이 말에는 국민을 위해 국가의 일을 돌보는 공적인 일을 하는 주체로서의 공무원은 없다. 잘잘못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묻되 공무원도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권리는 보장해야 하는 민주주의적 사고는 작동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복'인 공무원은 정치적 의사 표현의 자유도 노동조합 결성 자유 등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머리와 허리를 숙이고 오로지 주인만을 섬겨야 하는 머슴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그토록 즐겨 사용하는 머슴이라는 말에는 겸양의 미덕이 아닌 이와 같은 전근대, 봉건과 차별의 악취만이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에서 말하는 '주인'은 머슴이나 종을 거느리는 주체가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주권자를 말한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치인들이 자신을 '머슴'도 모자라 '왕 머슴', '큰 머슴'이라고 주장하며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아직 먼 길이다.

'회초리'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때리고 맞는 폭력을 전제로 한 '회초리론'을 정치인들이 그토록 즐겨 외치는 까닭은 그들의 의식 바탕에 때려도 되고 맞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뜻을 담은 여러 법률과 조례가 이미 시행되고 있는 데도 이들은 회초리로 때리고 맞기를 간청한다. 폭력을 옹호한다.

자신과 국민의 관계를 회초리로 때리고 맞는 가학-피학의 관계로 설정한 사드-마조히즘적 발상이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그들은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똑같다. 법을 만들고 법에 따라 권리와 의무를 실천해야 할 이들이 법보다 주먹(회초리)을 먼저 옹호하는 불쾌한 역설이 아직도 가능하다니.

머슴이 되겠다는 정치인과 회초리를 맞겠다는 정치인이 여전히 있는 한 우리에게 온전한 민주주의는 어려워 보인다. 머슴이 있다면 공주도 황제도 당연히 있어야 할 테고, 회초리를 맞겠다는 정서에는 스스로가 회초리를 때리는 자가 될 수도 있다는 심리가 깃들어 있을 테니 말이다.

우리가 광장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풍찬노숙으로 촛불을 들었던 것은 누구더러 머슴이 되라거나 누구를 회초리로 때리겠다는 게 아니었다. '공주' 하나를 끌어내려 '평민'으로 만들려는 게 아니었다. 머슴이니 회초리니 하는 구시대의 낡은 수사를 들먹이는 정치인들을 무대 중앙으로 불러들이려는 뜻은 더더욱 없었다. 시대의 흐름을 바르게 읽고 시민의 소리를 듣고 소통하는 제대로 된 민주주의, 정의로운 민주주의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오는 5월에 맞이하게 될 세상에서는 더 이상 낡아빠진 머슴과 회초리론이 득세하지 않았으면 싶다. 주권자로서 시민들의 나라에서 주권자로서 시민들의 권리를 위임받은 이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정당하고 정의롭게 행동하고 실천하는 민주주의 세상이면 충분하다.


태그:#문재인, #안철수, #이재명,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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