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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지역의 동제와 당제

화암리 당제
 화암리 당제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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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정월 대보름이 되기 전 마을마다 동제 또는 당제를 지내곤 했다. 그런데 1970년대 미신이라는 이유로 이들 당제가 많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주시 지역에서는 24개 마을에서 당제 또는 동제를 지내고 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41개 마을에서 동제와 당제가 지내졌다고 하니 절반 가까이 사라진 셈이다. 이들 당제는 산신당제, 용왕제, 서낭제 등 다양한 형식으로 치러진다. 이들 당제 중 충주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것이 엄정면 목계리의 목계별신제다.

목계리 동제는 당고사와 별신제 두 가지 행사로 치러진다. 당고사는 정월 초아흐레에, 별신제는 사월 초파일에 치러졌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별신제는 우륵문화제 행사의 일환으로 10월 초로 옮겨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사월 초파일경 토요일과 일요일에 날짜를 정해 행하고 있다. 별신제에 더해 대동제 형식의 줄다리기, 선유놀이까지 더해져 큰 축제로 승화되어 있다.

화암리 서낭당제의 변천

서낭바위와 소나무 고사목
 서낭바위와 소나무 고사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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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당제를 부활시킨 화암리(花巖里)는 충주시 동량면 남한강변에 있던 법정리 이름이다. 순 우리말로는 꽃바우다. 이곳에서 음력 정월 열이틀에 서낭당제가 치러졌다. 마을 사람들 10여명이 모여 제를 올리고, 경을 읽어 서낭신을 모셨다. 일반적으로 제관과 축관이 있어 제를 올리는 것이 순서인데, 이곳에서는 무속인인 장은수씨가 제사를 주관하고 경을 읽었다. 당제가 치러진 곳은 화암리 1497번지 낭골 큰 바위다.

원래 화암리 당제는 원화암의 말채나무 아래서 이루어졌다. 이 나무는 수령이 150년쯤 되었는데, 수세가 좋아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화암이 충주호에 수몰되면서 당제가 사라졌다가 1999년 마그실로 들어온 손수영 화백에 의해 다시 재현되었다. 낭골 큰 바위 위에 서낭당을 짓고 서낭제를 다시 지내게 된 것이다. 바위 위에는 수령이 200년쯤 되는 소나무가 있어 신성한 기운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8년 소나무가 고사한다. 그리고 바위에는 무속을 반대하는 스프레이가 뿌려졌다. 그것은 이곳 바위에서 무속행위가 이루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은 무속을 원치 않던 사람에 의한 인위적인 처사로 보고 있다. 그 후 한동안 마을 사람들이 함께 하는 당제는 없어졌고, 이장과 노인회장이 삼색실과와 포를 놓고 간단하게 제사를 올리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다 금년에 마을 행사로 당제가 다시 부활된 것이다.  

서낭제는 어떻게 진행되었나?

제물 진설
 제물 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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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제는 아침 일찍 노인회장이 금줄을 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금줄은 새끼 사이사이에 오방색 띠를 끼웠다. 제물은 오전까지 마을 사람들이 마련했다. 제물은 돼지머리, 수수팥떡, 국수, 탕, 주과포, 북어, 약과와 옥춘, 나물 등이다. 술은 소주와 막걸리를 준비했다. 오후 2시 20분 마을 사람들이 경운기에 이들 제물을 싣고 서낭바위로 향한다. 낭골에서 10분 정도 가면 길 왼쪽으로 서낭 바위가 보인다.

이곳에서 무속인 장은수씨가 진설을 하고 3시부터 제를 주관한다. 과거에는 유교식으로 제의가 치러졌는데, 그 맥이 끊겨 장은수씨의 도움을 받는 것 같다. 처음에는 장은수씨가 축 형태의 글을 읽는다. 그리고는 성황경을 읽는다. 일종의 굿형식이다. 성황신을 영접하고 즐겁게 하고 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먼저 세상의 모든 성황대신을 불러들인다. 산신(山神), 지신(地神), 사신(四神)은 물론이고, 팔도의 명산과 강의 산신과 용신도 다 불러들인다.

제의를 진행하는 장은수씨
 제의를 진행하는 장은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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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이들 성황대신을 즐겁게 하는 풀이를 한다. 마지막으로는 이들에게 소원을 비는 축원문을 읽는다. 그런데 그 사설이 꽤나 길다. 그 중 일부를 옮겨 본다.

"성황님전 봉천하며 지극정성 발원하니
소소한 이 정성을 태산같이 받으시고
대대손손 내려가며 부귀공명 누리시고
박복자는 풍족하며 단명자는 명을 잇고
병든 자는 쾌차하며 죽은 자는 극락 가고
자식 얻기 소원인 자 득남 소원 이루시고
무인연자 인연 짓고 학업자는 지혜총명
농업자는 오곡풍년 사업자는 사업 성취
공업자는 안전조업 상업자는 운수대통
운전자는 안전운행 승선자는 안전운항
무직자는 취직 성취 취직자는 진급 성취
[…]"     

소원을 비는 문은희 화백
 소원을 비는 문은희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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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원이 끝나자 장은수씨가 참석자의 소원지(所願紙)를 받아 서낭신께 고하고는 소지(燒紙)하면서 하늘로 올려 보낸다. 그리고는 서낭신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참석자에게 전해준다. 미신적인 요소도 있지만, 참석자들은 그 내용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제의가 끝나고 음복을 한다. 그리고 철상을 해 제단 앞쪽 공터에 상을 차리고 간단하게 음식을 나눈다. 그리고는 남은 음식과 술을 당시 경운기에 싣고 마을로 돌아온다. 제의참석자들은 모두 노인회장댁에 모여 술과 음식으로 뒷풀이를 한다.  

충주댐 조성으로 인한 화암리 마을의 변화

화암리 마을 사람들
 화암리 마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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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리는 원화암, 낭골, 포탄, 마그실, 양목의 다섯 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화암나루터를 중심으로 강쪽에 포탄이 위치하고 있었다. 산쪽으로 양목, 마그실, 낭골이 있었다. 낭골(浪谷)은 물결이 보이는 골짜기다. 포탄(浦灘)의 순 우리말은 개여울이다. 마그실은 막다른 마을이다. 양목은 말 그대로 햇볕이 잘 드는 마을이다. 1980년대 초 충주댐이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이들 마을에 57가구 154명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충주댐으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절반 이상의 주민이 마을을 떠났고, 27가구 정도가 주변 높은 곳으로 이주했다. 그들도 시간이 흐르며 마을을 떠나거나 세상을 떠나 현재 화암리에는 10여 가구 정도만 살고 있다. 이들 중 절반은 충주호가 좋아 이주해 온 사람들이다. 현재 화암리의 중심마을은 낭골이다. 화암리 토박이가 노인회장 김남택씨, 새마을지도자 이기열씨 등이고, 이주민이 낭골에 사는 화가 문은희씨와 마그실에 사는 화가 손수영씨다.

충주댐
 충주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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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리는 충주댐의 바로 윗마을로 충주호 선착장, 기업은행 연수원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은 이들 위 2㎞ 지점에 낭골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낭골에는 민들레라는 음식점 겸 카페가 성업중이다. 대표인 안일배씨는 음식점 일에도 열심이지만 마을 일에도 적극적이다. 그는 노인회장, 새마을지도자가 주도하는 이번 서낭제 행사에 함께 했다. 또 수안보면 주민자치부위원장이자 무속인인 장은수씨가 제를 주관해 화암리 서낭제가 부활될 수 있었다.


태그:#화암리, #서낭제, #낭골, #충주댐, #바위와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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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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