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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는 룩셈부르크역에 도착할 때부터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룩셈부르크역에 오후 1시 조금 넘어 도착했는데 이는 기차가 도착 예정시간보다 10분이나 일찍 도착한 시간이었다. 살짝 당황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차에서 내리길래 그동안 여행하던 본능대로 그들을 따라 내렸다.

나는 역에 내린 후에도 혹시 다른 역에 도착했는지 걱정이 돼 밖으로 나가 내가 도착한 곳이 룩셈부르크역이 맞는지 다시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내가 내린 역은 여행 자료에서 보았던 룩셈부르크역과 똑같이 생긴 깔끔한 모습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기차가 연착하는 경우는 수없이 경험했지만 기차가 이렇게 빨리 도착하는 것은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었다.

전몰자 위령탑 주변으로 오픈 마켓이 열려있다.
▲ 헌법광장. 전몰자 위령탑 주변으로 오픈 마켓이 열려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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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의 도로는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훨씬 깨끗하게 정돈되어 보인다. 전봇대와 각종 배관을 땅 밑에 묻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길을 걷는 내내 기분이 아주 상쾌해진다. 나는 우선 룩셈부르크 전몰자 위령탑을 찾아가기로 했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이 위령탑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내가 그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이 위령탑이 대한민국의 역사와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신시가지를 지나 다리를 건너 위령탑을 찾아갔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절벽을 잇는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다리 아래에 일대 장관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구시가지의 요새를 이루던 절벽 아래에는 초록빛 숲이 우거져 있고 절벽 위의 옛 건물들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요새의 절벽은 마치 저지대 숲을 둘러싼 거대한 병풍처럼 우뚝 서 있었다. 요새 절벽은 올라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다. 이렇게 시각을 압도하는 성곽을 가진 수도를 나는 그전의 여행에서 만난 적이 없었다.

룩셈부르크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코끼리들

코끼리를 사냥하지 말고 잘 보존하자는 룩셈부르크 정부의 노력이다.
▲ 코끼리 상. 코끼리를 사냥하지 말고 잘 보존하자는 룩셈부르크 정부의 노력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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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에서 전몰자 위령탑을 찾아가는 길에 코끼리상을 또 만났다. 룩셈부르크 시내를 걷다보니 시의 중요한 건물들 앞에는 화려한 문양과 색상으로 채색되어 있는 코끼리상들이 자주 보인다. 수많은 코끼리상들의 덩치는 아기 코끼리 정도의 크기로 모두 비슷한데 몸에 채색된 색채와 디자인은 같은 게 없을 정도로 아주 다양하고 독특하다.

룩셈부르크가 유독 코끼리라는 동물을 좋아해서 시내 곳곳에 코끼리들을 풀어놓은 것은 아니다. 룩셈부르크는 코끼리 보존에 범국가적인 지원을 하고 기업들도 후원을 하고 있다. 코끼리 상들을 통해 코끼리 불법사냥을 반대하고 코끼리를 보존하자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다. 부유한 나라, 룩셈부르크는 멸종 위기의 야생동물을 보존하기 위해 국가와 국민들이 활발한 사회활동을 전개할 정도로 선진적인 문화국가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룩셈부르크 겨울 축제의 현장에는 다양한 놀거리와 먹을거리들이 있다.
▲ 오픈 시장. 룩셈부르크 겨울 축제의 현장에는 다양한 놀거리와 먹을거리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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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주머니가 스노우볼을 보며 동심의 세계에 빠져 있다.
▲ 스노우볼 가게. 한 아주머니가 스노우볼을 보며 동심의 세계에 빠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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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전몰자 위령탑이 서 있는 헌법 광장(Place de la Constitution)을 찾아가는데 웬일인지 위령탑이 있어야 할 장소에 오픈 마켓의 가게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시장 안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어 이국에서 온 여행자의 눈길을 빼앗는다.

두꺼운 겨울옷을 잔뜩 껴입은 금발의 미녀들은 간이식당 앞에 서서 삶은 감자와 치즈를 얹은 라클렛(raclette)과 커피를 마시고 있다. 추운 겨울에 따뜻한 라클렛과 커피는 몸을 녹이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아저씨들도 좌판에 둘러서서 냅킨에 싼 소시지와 크레페(crepe)를 먹으며 오픈 마켓의 번잡함을 즐기고 있다.

나이가 지긋한 한 아주머니는 큰 크리스털 구슬 안에서 눈이 내리는 스노우볼을 보며 즐거운 동심의 세계에 빠져 있다. 소녀적 감성을 가진 이 아주머니는 스노우볼 안에서 환상적으로 내리는 눈을 보며 호기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어릴 적 스노우볼을 위 아래로 흔들며 눈이 내리던 모습을 지켜보던 모습이 나의 기억 저편에서 되살아났다. 

다양한 인물상들이 마치 퍼레이드를 하듯이 배치되어 있다.
▲ 룩셈부르크 피라미드. 다양한 인물상들이 마치 퍼레이드를 하듯이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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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나라답게 회전목마도 내가 지금까지 본 회전목마 중 가장 화려했다.
▲ 회전목마. 부자나라답게 회전목마도 내가 지금까지 본 회전목마 중 가장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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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마켓의 중앙을 장식하는 룩셈부르크 피라미드(Luxembourg pyramid)는 피라미드형으로 쌓은 겨울축제 기념탑이다. 피라미드 각 층 난간에는 겨울의 축제를 환영하는 붉은 양초들이 앙증맞게 걸려 있다. 각층 내부에서는 나무로 만든 병정인형, 터키인형, 검은 정장의 신사인형, 정갈하게 차려입은 숙녀인형 등 다양한 목각인형과 룩셈부르크 대공가문의 문장(紋章)들이 거리 퍼레이드를 하듯이 돌아가고 있다.

피라미드 가장 위에는 이 인형들을 데리고 하늘로 날아가려는 듯 프로펠러가 달려 있고, 이 프로펠러에는 동심을 자극하는 달과 별이 그려져 있다. 피라미드 아래, 유럽 축제 현장의 명물인 회전목마도 부자나라의 회전목마임을 과시하려는 듯 화려하기 그지없다. 헌법광장의 오픈 마켓에는 겨울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들뜬 마음이 잘 드러나 있었다.
 
나는 오픈시장의 흥겨움을 둘러보다가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잠시 잊어버렸었다. 그러다 기념품 가게에서 '황금의 여신'이 새겨진 마그네틱 기념품을 보고 문득 전몰자 위령탑을 찾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밀집한 오픈마켓의 가게들 사이에 서 있다가 길 가던 한 아저씨에게 길을 물었다.

"룩셈부르크 전몰자 위령탑이 어디 있나요? 황금의 여신은 어디에 있나요? 지도에는 이 헌법광장에 있다고 되어 있는데요."

그는 피식 웃으며 나를 보고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저기, 바로 위의 하늘을 보세요. 황금의 여신이 우리를 보호해주기 위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에까지 왔던 룩셈부르크 황금의 여신

높은 하늘 위에서 룩셈부르크를 내려다보며 룩셈부르크를 지키고 있다.
▲ 황금의 여신상. 높은 하늘 위에서 룩셈부르크를 내려다보며 룩셈부르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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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가 가리키는 룩셈부르크 피라미드 뒤편의 하늘을 올려보았다. 피라미드 뒤편으로 무언가 황금빛을 발견했다. 황금빛, 황금빛 중에서도 방금 칠을 한 듯한 황금빛이 번쩍거렸다. 룩셈부르크 상징물, 황금 여신상이 거기에 높고 높게 서 있었다. 수많은 가게들에 가려서 이 황금 여신상과 전몰자 위령탑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위령탑 꼭대기의 황금 여신상은 하늘을 등지고 룩셈부르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황금의 여신(Gёlle Fra, golden lady)은 세계 1차 대전에 참전했던 룩셈부르크인들에게 헌정하기 위해 1923년에 만들어진 여신이다. 하늘에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는 이 여신은 월계관을 든 두 손을 높이 들고 서 있다. 이 여신은 룩셈부르크를 위해 목숨을 바친 전몰자들에게 조국의 승리를 축하하는 월계관을 씌워주려고 하고 있다. 약간 육감적으로 보이는 황금의 여신은 근엄한 듯 하면서도 인자한 표정으로 전몰자 기념탑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위령탑 바로 아래의 페트뤼스 계곡(Pétrusse valley)이 깊고 깊듯이 이 황금의 여신도 백척간두 같은 높고 높은 위령탑 위에 서서 룩셈부르크의 하늘을 밝히고 있다.

이 황금의 여신은 룩셈부르크의 저항의 정신의 상징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들은 룩셈부르크인들의 저항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이 전몰자 위령탑을 파괴하여 버렸다. 그러나 당시 황금의 여신은 사라졌다가 다시 발견되어 1985년에 지금의 위령탑 형태로 여신상이 다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독일군에 의한 황금의 여신 파괴로 룩셈부르크인들은 저항 정신이 더 강화되었고, 독일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이 아름다운 여신은 룩셈부르크 저항과 자유의 상징물이 되었다.

죽은 병사와 살아 있는 병사의 대비를 통해 전몰자의 혼을 위로하고 있다.
▲ 위령탑 청동상. 죽은 병사와 살아 있는 병사의 대비를 통해 전몰자의 혼을 위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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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몰자 위령탑의 아래 부분에는 룩셈부르크의 전쟁에 참전한 사상자들을 상징하는 청동상이 있다. 이 병사는 그리스 투구를 벗어 내려두고 오른손에는 방패를 잡고 있다. 방패를 잡은 손은 외적의 침입을 아직도 경계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왼손은 전쟁으로 사망한 동료가 누운 침상 위에 올려두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경험한 이 군인은 젊은 전우의 삶을 애도하며 긴 사색에 잠겨 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누가 문자로 남기지 않아도 이 청동상이 누구의 혼을 위로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이 전몰자 위령탑에 한국전쟁의 기억도 담겨 있다고 하여 그 기록을 탑신에서 찾아보았다. 자세히 보니 위령탑 청동인물상 아래 석재에 세계 1, 2차 대전 참전기록과 함께 한국전 참전기록이 양각되어 있다. '1951~1954 COREE'.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참전 기록에 대비해서는 아주 간략한 기록으로 남겼지만 한국에서 온 나의 눈에는 훨씬 임팩트 있게 잘 보인다.

이 위령탑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룩셈부르크 군인들도 기리고 있다.
▲ 위령탑 비문. 이 위령탑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룩셈부르크 군인들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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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룩셈부르크 장병 89명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벨기에 대대에 1개 소대병력으로 편입되어 참전했고, 2명의 전사자와 15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들은 영국 수송선을 타고 1951년에 한국에 도착하였으며, 임진강 전투에서 격전을 치러 중공군을 물리쳤다. 위령탑에 1954년이라고 기록된 것은 룩셈부르크 장병들이 정전협정 이후까지 한국에 남아 남방한계선 진지 구축 공사 등에 참여했기 때문인 것 같다.

아! 이 먼 유럽의 작은 나라에서 극동의 우리나라 전쟁에까지 파병을 하였구나! 이들은 징병에 의해 끌려온 병사들이 아니라 10:1이 넘는 경쟁률을 뚫고 선정된 자원병들이었다. 나는 룩셈부르크 어딘가에 살고 있을 생존자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이념과 사상을 떠나, 우리나라에서 부상당하거나 전사한 룩셈부르크 군인들을 위해 잠시 묵념을 했다. 그리고 황금의 여신상을 보면서 생각했다. 나는 '저 황금의 여신이 한국전쟁 때 룩셈부르크 병사와 한국을 지키기 위해 한국까지 왔었구나'라고 생각했다.  

오픈 마켓의 먹거리들과 놀이기구에 한눈이 팔렸던 나는 황금여신상과 전몰자 위령비를 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위령탑 앞에 서서 보니, 위령탑 바로 앞에 시장이 섰지만 지나가던 룩셈부르크 시민들이 탑 앞에 와서 전몰자들을 추모하고 있었다. 축제의 현장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전몰자들을 기리는 모습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오히려 충혼탑 앞의 경건한 분위기보다는 이렇게 삶의 현장 속에서 전몰장병들을 가깝게 추모하는 모습도 바람직해 보인다.

룩셈부르크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장소들이 계속 나타나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헌법광장을 떠나면서 다시 한 번 황금의 여신상을 올려다보았다. 한국전쟁에까지 왔던 황금의 여신은 묵묵히 룩셈부르크 시내를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 승리의 여신이 룩셈부르크를 잘 지켜주기를 바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500여 편이 있습니다.



태그:#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 여행, #헌법광장, #황금의 여신, #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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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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