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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전경. 안동은 한때 인구 30만을 넘는 전통문화 도시였지만 이제 16만에 못 미치는 중소도시로 전락했다.
 안동시 전경. 안동은 한때 인구 30만을 넘는 전통문화 도시였지만 이제 16만에 못 미치는 중소도시로 전락했다.
ⓒ 강병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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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는 그 지역의 삶과 문화를 기록할 수단이 거의 없다. 일간지는 고사하고 주간 신문조차도 유지되지 못하는 데가 부지기수다. 지역의 고유한 특성에 기대기엔 나라가 너무 좁고 작은 것일까. 그런데 신문이 아니라, 잡지의 형태로 꾸준하게 지역 문화를 담은 정기간행물을 펴내고 있는 지역이 있다.

경상북도 안동과 전라북도 부안이 그곳이다. 안동에서 격월간으로 펴내는 <안동>지는 지난 1988년 창간된 이래 27년 동안, 2009년 12월에 창간호를 내고 반년간으로 발행하고 있는 부안의 <부안이야기>는 7년간 애오라지 지역 문화를 꾸미고 여며 왔다.

이 두 지역의 정기간행물 <안동>과 <부안이야기>를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이는 단순히 매체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지역 문화를 찾아내 그것을 새롭게 되살리고자 하는 지역 사람들의 집단 정체성 모색에 대한 이야기로 읽혔으면 좋겠다. - 기자말

소설가 김승옥이 단편 <서울, 1964년 겨울>에서 '서울은 모든 욕망의 집결지'라고 갈파한 지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서울은 모든 욕망이 꾀고 모이는 동네다. 서울을 포함한 이른바 '수도권' 인구가 전체 인구의 50%에 육박하는 현실은 그 강력한 방증이다. 이런 비대칭 상황에서 '지방'을 이야기하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우리 사회에서 '지방'은 독자적인 권역으로 존재하는 대신 늘 중앙(서울)의 하위개념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고유의 지방색이나 특성을 지니긴 하지만, 궁극적으론 서울, 또는 서울식의 체제를 지향한다. 그래서 충청, 영남, 호남 등의 지방은 나름대로 '작은 서울'의 형식을 갖추기 위해 진력하는 것이다.

1988년 4월에 펴낸 <안동> 창간호의 표지 인물은 당시 안동 지역의 최고령자였던 김봉이 할아버지(104)였다.
 1988년 4월에 펴낸 <안동> 창간호의 표지 인물은 당시 안동 지역의 최고령자였던 김봉이 할아버지(104)였다.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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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들이 서울을 따르고 흉내내기 바쁘다. 단순히 '좁고 작다'는 이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서울바라기'는 이른바 지방색마저 무화해 버리곤 한다. 그러나 지방(지역)이 갖는 특색 가운데서 무작정 서울을 따라갈 수 없는 것들도 적지 않다.

그 지방의 언어와 역사, 고유한 생활환경 따위가 그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발행되는 신문이 지방지와 지역지다. 그런데 시도에서 발행하는 지방지는 중앙지에 비기진 못하지만 그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반면 시군에서 펴내는 지역지는 성공한 데가 손꼽을 정도다.

이처럼 열악한 상황에서 격월간지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아래 <안동>)이 무려 27년 동안이나 꾸준하게 지역 문화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경이로운 일이다. 물론 <안동>이 스물일곱 성년에 이른 길이 순탄했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열정은 넘쳤지만 그걸 뒷받침해 줄 여러 조건은  늘 모자라고 아쉬웠단 얘기다.

<안동>이 태어난 것은 1988년이다. 이 잡지가 태어나는 데 산파역을 한 이가 안동문화회관의 이진구 관장, 안동대의 임세권, 임재해 교수, 안동문화연구회 총무 김복영이다. 이들은 향토문화라는 공통 관심사로 이따금 만나다가 그해 신년 벽두에 안동문화회관에서 4·6배판 40쪽 분량의 무가 계간지 발행을 결의하기에 이른 것이다. 거기 성심인쇄소 김준 사장도 자리를 같이 했다.

1988년 창간된 계간 <안동>, 3년 만에 격월간으로

나흘 뒤에 다시 모인 이들은 책 이름을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책을 내는 곳은 '문화모임 사랑방'으로 정했다. 이어진 창간 과정에 안동문화연구회 회원 몇이 힘을 보탰고 "안동사람들이 안동과 안동사람 이야기를 스스로 취재해 쓰고 경비도 부담하며, 열성 독자가 되는 잡지"를 만들기로 했다.

그리하여 1988년 4월 26일에 <안동> 창간호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동>은 당시 안동지역 최고령자였던 104세의 김봉이 옹을 표지인물로 올렸는데 이는 <안동>이 그처럼 장수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창간호 3천권은 시내 몇 군데에서 무료로 배포되었다.

<안동>을 받아본 시민들과 고향을 떠나 타관에 살고 있는 안동사람들의 반향은 뜨거웠다. 고향은 본디 거길 떠난 사람들에게 더 아름답고 정겨운 공간인 법인 것이다. 편집실로 날아온 독자엽서는 고향과 추억을 환기해준 이 얄따란 잡지에 대한 찬사로 차고 넘쳤던 것이다.

창간호의 반응에 고무된 편집진들은 계간을 격월간을 거쳐 월간으로 발전시키고 싶어 했으나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3년 뒤인 1991년 봄에 한 후원자의 후의로 반듯한 사무실을 얻어 보금자리를 옮겼다. 그해 봄부터 석 달에 한 권 내는 것도 버거운 상황인데도 발행주기를 격월간으로 전환하는 강수를 두었다.

<안동> 100호의 표지 인물은 임인년(1902)에 태어나 백세를 넘긴 서후면 교리의 이명홍 할머니다. 창간호 때는 ‘안동할배’를 모셨으므로 100호에선 ‘안동할매’를 모셨다.
 <안동> 100호의 표지 인물은 임인년(1902)에 태어나 백세를 넘긴 서후면 교리의 이명홍 할머니다. 창간호 때는 ‘안동할배’를 모셨으므로 100호에선 ‘안동할매’를 모셨다.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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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거짓말처럼 40쪽 남짓의 계간 <안동>은 80쪽 안팎으로 두툼해진 격월간으로 통권 155호(2014년 11·12월호)까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나왔다. 원고료 없이 운영되고 100쪽이 채 되지 않는 격월간지이긴 하지만 26년을 한결같이 꾸려온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1990년 어름에 <안동>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적이 당황스러워했던 것 같다. 이런! 내로라하는 선비의 고장이라 자랑하는 보수적인 도시에서 만들어진 잡지였는데도 제호에서조차 한자를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안동>의 주요 필진과 편집위원들 가운데에 안동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소장학자들이 많아서였을까. <안동>에는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본문에 한자도 병기하지 않았다.

<안동>의 운영위원이나 편집위원 가운데에는 지역 토박이보다 '들어와 사는 타관사람'이 더 많았던 것도 특징이었다. 지역의 자연환경, 사람들의 삶과 의식을 들여다보는 기획물이 성공적으로 연재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 '외부인의 시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안동>의 주요 연재기사 가운데 지역의 자연환경을 둘러본 '동네 나들이', '산촌기행', '구담습지', '풍수지리로 본 안동' 등과 안동댐 주변 지역의 변화를 살펴본 '안동호 물길 따라 120리', 옛 안동도호부 때의 경계지를 찾아본 '다시 돌아보는 안동의 월경지(越境地)', '소 안동 영해를 가다'와 임하댐 수몰로 구미로 집단 이주한 '무실 류씨들의 해평살이' 등이 독자들의 호응을 받았다.

지역 현안과 문제점을 점검한 기사로 '지역개발과 문화재 보존', '안동의 대학문화', '안동예술과 안동예술제', '쌀과 쌀농사' 등이 있었고, 또 '이덕 옹기굴', '옹천 한지공장' 등 사라져가고 지역 문화의 현장들을 기록하여 현대사 자료로 남기기도 하였다. '안동의 종가', '안동의 인물', '안동의 선비문화', '고문서와 안동', '사람 따라 옛집 따라' '안동의 터줏대감' 등의 기사는 안동과 안동문화의 정체성을 찾아보는 노력의 일부였다.

<안동>이 기록한 이웃들의 삶과 문화

그리고 26년, 한 호도 빼먹지 않고 <안동>은 이웃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기록해 왔다. 구(舊)시장의 국수집 안주인과 상이용사, 퇴역 기관사, 다방 종업원, 50년차 이발사와 40년차 생선 행상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시설에서 장애인들을 돌보며 사는 부부와 필리핀과 일본에서 이국땅 안동으로 시집온 결혼이주민, 소녀가장, 장꾼들의 신산한 삶의 내력도 빼놓지 않았다.   

통권 155호로 마감한 종간호의 표지는 창간호부터 154호까지의 표지로 엮었다. 이 책은 <안동>에 관한 추억과 소회를 담은 회원들의 원고를 모은 문집 형식이다.
 통권 155호로 마감한 종간호의 표지는 창간호부터 154호까지의 표지로 엮었다. 이 책은 <안동>에 관한 추억과 소회를 담은 회원들의 원고를 모은 문집 형식이다.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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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 스물여섯 해 동안 멈추지 않고 달려온 것은 안동시의 지원 외에도 도합 8백에 가까운 후원회원, 사랑방회원, 구독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제작비를 보탠 덕분이었다. 그러나 26년째 겨울을 넘기면서 <안동>은 가쁘게 달려오던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2014년의 마지막 호(11·12월), 통권 155호가 <안동>의 종간호로 나왔던 것이다. 대개 매호 100쪽 미만의 얄팍했던 <안동>의 마지막 호가 두툼한 두께(208쪽)로 나오게 된 것은 그게 이 매체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왔던 사람들의 애틋한 추억과 소회를 담은 문집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종간의 아쉬움을 달래는 '임동창 풍류 안동아리랑' 공연과 '안동사람들' 주제의 사진전을 뒤로 하고 <안동>은 한 세대를 마감했다. 154호에 실은 '발행인 편지'에서 김복영이 밝힌 대로 이 잡지도 '생멸(生滅)의 순환'을 피하지 못한 것이었다.

종간 소식을 듣고도 한참 뒤에야 종간호를 받아볼 수 있었지만 나는 26년 역사의 <안동>이 마지막 호를 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굳이 묻지 않았다. 한때 후원회원으로 힘을 보태고 있었던 지역의 후배를 통해서 힘겹게 달려온 <안동>의 속내를 알 만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간, 그리고 복간

일간지는커녕 주간신문조차도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안동에서 그나마 <안동>은 거의 유일한 대중매체였다. 그러나 <안동>은 창간 당시의 의도대로 꾸준히 '살아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휴먼스토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시의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이해한다고 해도 아쉬움을 떨치지 못해 쓴 소리를 하면 후배는 농으로 이를 눙치곤 했다.

"아니, 어떻게 맨날 두루뭉술하게 '좋은 게 좋다'는 얘기밖에 없는가. 속보를 내진 못해도 예민한 지역 현안에 대해서도 제대로 목소리도 내고 일당 지배의 지역 행정에 대해서도 견제를 해야 하지 않나?"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길로 가는 순간, <안동>은 망하겠지요. 그렇잖아도 힘겨운데 그렇게 해서 빚어지는 갈등까지 감수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테니까요."

안동 문화방송(MBC)이 <안동>의 종간을 보도하고 있다. 김복영 발행인의 인터뷰 화면
 안동 문화방송(MBC)이 <안동>의 종간을 보도하고 있다. 김복영 발행인의 인터뷰 화면
ⓒ 안동 문화방송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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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종간을 앞두고 <안동> 편집실에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독자들의 전화가 쇄도했다고 한다. 마땅히 자기 의견을 드러낼 방도를 찾지 못했던 무명의 독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26살 청년이 된 <안동>과 작별해야 했다. 더 이상 <안동>지를 만날 수 없었던 2015년의 봄을 독자들은 어떻게 보냈을까.

<안동>이 복간되었다는 소식을 나는 2006년부터 종간호를 낼 때까지 <안동>을 편집해 온 백소애 기자를 통해서 들었다. 오랫동안 <안동>을 지켜보고 있었던 지역의 뜻있는 출판인(정익수)이 복간을 맡기로 하면서 <안동>은 넉 달을 쉬고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2015년 6월 말일에 통권 156호(2015년 5·6월)가 간행된 것이다.

백 기자를 통해 나는 복간호에 이어 157호(7·8월), 158호(9·10)와 지난 연말에는 159호(11·12)호도 받았다. 새로 편집위원회와 후원회를 꾸리고 <안동>은 새로운 세대로 다시 출발한 것이다. 종간호와 함께 일자리를 잃었던 백 기자도 '컴백'했다. 나는 얼마 전에 그이에게 미루어 두었던 질문을 던졌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때 <안동>이 종간에 이르게 된 이유가 뭐라 생각하우?"
"제일 큰 이유는...... 1988년 창간해 쉬지 않고 26년간 꾸려온 운영위원과 편집위원들의 피로가 누적된 점이 가장 크지 않나 싶어요. 창간 때 40대였던 분들이 이제 은퇴할 나이가 되다 보니 일선에서 물러나길 원한 부분도 있고요."

나는 재정의 문제가 가장 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녀는 '세대교체의 실패'가 오히려 더 큰 원인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가 말한 세대교체의 의미를 단박에 이해했다. 어떤 조직이든 신진대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아닌가 말이다.

격월간 <안동>이 겪어온 부침은 시골 소도시에서 지역 문화를 가꾸어 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확인해 준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해를 넘겨 27살 성년이 된 <안동>이 쌓아온 159권의 목록은 그간의 어려움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오롯한 성취물이다.

복간호(156호)와 이후 발간된 <안동>. 복간호(맨 왼쪽)는 안동 태사묘에서 전통 성년의식을 치르는 갓 스무 살 친구들을 표지에 실었다.
 복간호(156호)와 이후 발간된 <안동>. 복간호(맨 왼쪽)는 안동 태사묘에서 전통 성년의식을 치르는 갓 스무 살 친구들을 표지에 실었다.
ⓒ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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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적으로 종간했다가 복간함으로써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안동>은 새로운 세대로 들어섰다. 사무실을 옮기고 발행인과 편집인, 운영위원 등이 바뀌는 외형적 변화만큼 그 내용의 변화도 엿보일 만하다. 그러나 복간호에 실린 서수용 편집위원장(한국고문헌연구소장)의 복간사는 그런 변화를 거의 상정하고 있지 않다.

자신에게 <안동>은 청장년기의 '고색창연하고 굳건한 성채'였다고 회고하는 서 편집위원장은 "선배들의 빛난 그간의 업적을 계승하고 분명하게 지켜왔던 가치와 담론을 확실하게 따르고자" 한다면서 '안동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올곧게 담아내는 문화예술 정보지'가 <안동>의 노정이며 좌표라고 확인한다.

그러면서 그는 "새롭게 꾸려진 우리 편집인들은 '편집(編輯)에 있어서의 편집(偏執)'을 배격할 것"이며 "박아군자(博雅君子)와 같은 자세를 견지할 것"이라고 천명한다. "각박한 현 사회에서 지면을 통해 직설적으로 오로지 두들기거나 대안 없는 비판만 일삼는다면 일시적인 통쾌함은 취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 사회와 지역을 분열시킬 뿐 아니라 자기만족이나 독선에 사로잡혀 소득이 없이 시간만 낭비하게 될 것"이라며 퇴계의 '온유돈후(溫柔敦厚)'를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안동>, '담대한 혁신'의 유산을 기억하라

고문헌연구자로서 개인적 소회가 아니라 편집위원장의 발언이니 <안동> 제2기도 별다른 변화를 보일 성싶지는 않다. 더구나 경상북도의 새 도청이 안동으로 옮겨오는 경사를 지적하면서도 그는 <안동>이 "그러한 흥분과 희망을 잠시 내려놓고 아쉬움을 삭히며 중흥을 기다리자"고 제의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안동>은 시내 몇 군데 배부처에서 무료로 나누어준다. 시내 중심가의 한 가게에 비치된 <안동>158호.
 <안동>은 시내 몇 군데 배부처에서 무료로 나누어준다. 시내 중심가의 한 가게에 비치된 <안동>158호.
ⓒ 백소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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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진이 어떻게 정의하든 간에 <안동>은 지역 사람들에게 쉬 읽히고 익숙하게 다가가는 대중지다. 개중에 다소 학술적인 내용이 없지는 않으나 일반 대중의 눈높이를 감안해 대체로 평이한 서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간호 이후의 <안동>에는 한자 병기가 꽤 자주 눈에 띈다. <안동>의 장점이었던 한글 전용에 가까운 표기가 다소 흔들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사라져가는 것들', '안동의 효열(孝烈)', '누정(樓亭) 이야기', '선현들의 애장품' 등의 기사에서도 회고·복고적인 취향이 두드러져 보인다.

이러한 경향성은 <안동>이 창간 이래 유지하고 있는 모토, '향토문화와 지역발전의 방향을 모색하는 제언자', '건전한 문화 활동과 수준 높은 창작을 위한 비판자'로서의 역할과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복간 이후의 <안동>의 행로에 다시금 눈길이 쏠리는 까닭이 여기 있다.

새 편집진의 방침과 무관하게 독자들의 변화에 대한 욕구는 그것대로 온당한 법이다. 그러나 무명 독자들의 지향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지역과 지역 사람들이 보여주는 사소한 변화의 기미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태도가 <안동>에 요구되는 이유다. 스물일곱 <안동>은 더 이상 편집진만의 전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동은 영남 유림의 본 고장 가운데 하나다. 구한말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안동 유림은 혁신을 통해 그 질곡을 뛰어넘으려 한 바 있었다. 이른바 '혁신 유림'이다. <안동>이 시대를 면밀하게 성찰하면서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지역 문화를 가꾸고 되살리는 집단 정체성 모색의 길에 일로 매진하기를 바라는 것은 저 담대한 혁신의 기억이 안동의 자랑스러운 유산일 것이기 때문이다.


태그:#격월간 안동, #지역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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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이 넘어 입문한 <오마이뉴스> 뉴스 게릴라로 16년, 그 자취로 이미 절판된 단행본 <부역자들, 친일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이 남았다. 몸과 마음의 부조화로 이어지는 노화의 길목에서 젖어 오는 투명한 슬픔으로 자신의 남루한 생애, 그 심연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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