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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Forster)의 산책길, 태평양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명소다.
 포스터(Forster)의 산책길, 태평양을 바라보며 걸을 수 있는 명소다.
ⓒ 이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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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곳이 어디냐고 종종 묻는다. 규모가 큰 캐러밴 파크가 3개나 있고 유명한 라마다 리조트(Ramada Resort)가 있는 휴양지이지만 할러데이즈 포인트(Halliday's Point)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우리 동네에서 20분 떨어진 Forster(포스터)라는 동네의 이름을 말하면 아는 사람이 많다.

포스터는 시드니에 사는 사람에게 잘 알려진 휴양지다. 인구는 2만여 명 정도지만 유난히 맑은 비취색 바다와 하얀 백사장이 관광객을 유혹한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해변(main beach)과 규모가 큰 수영장(rock pool)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포스터는 대어를 꿈꾸는 강태공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쇼핑이나 외식을 할 때 이곳을 찾는다.

비가 갠 그러나 아직도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는 아침이다. 맑은 날 호주의 강한 햇볕 아래서 산책하는 것은 고역이다. 따라서 오늘같이 구름 많이 낀 날이 산책하기에는 제격이다. 항상 자동차로만 둘러보던 포스터 해변을 산책할 생각으로 집을 떠난다.

자동차를 바닷가에 주차하고 왼쪽으로 태평양을 보며 산책길을 걷는다. 조금 걸으니 해변에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가 있다. 큰 파도가 와도 해변의 백사장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늑한 안식처를 자연이 만들어 놓은 곳이다. 어린아이와 함께 온 부모는 백사장에서 모래 장난을 하며 얕은 바다에서 뛰논다. 젊은이들은 제법 높은 바위 위에 올라가 바다로 뛰어내린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마음껏 지내다 보니 호주 사람은 겁이 없나 보다.

조금 가파른 길을 계속 오른다. 한 여성이 혼자 가벼운 배낭을 짊어지고 우리를 추월한다. 전문 사진사가 가지고 다닐 만한 큰 카메라와 삼각대를 가지고 걷는 사람도 있다. 풀밭에선 주말을 맞은 가족이 포도주를 마시며 한가한 오후를 즐기고 있다. 언덕 정상에 도착했다. 구름이 많이 없어진 탓에 햇빛을 받으며 언덕길을 오래 걸었었지만, 시원한 바닷바람 덕분에 땀에 옷이 젖을 정도는 아니다.

언덕 꼭대기에는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오르니 태평양이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다. 겨울에는 고래가 북상하는 것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트인 전망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땀을 식히며 심호흡을 한다. 경치 좋은 곳에 있는 전망대라 그런지 쇠창살에는 사랑을 기약하는 자물쇠가 잠겨있다. 물론 한국의 남산에서 본만큼 자물쇠가 많지는 않지만, 호주에서는 흔히 보기 어려울 정도로 제법 많은 자물쇠가 있어시선을 끈다.

전망대를 떠나 산책길을 계속 걷는다. 지인들에게 이 동네를 소개할 때 자주 걷던 길이다. 왼쪽은 절벽이다. 절벽 밑에서는 높은 파도가 바위를 치며 부서진다. 절벽 아래에 있는 큰 바위에는 물고기를 잡아먹는 물새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적이 있는 물새다. 중국의 자그마한 어촌에서 어부가 작은 대나무 배를 타고 이 새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5분쯤 걸으면 모래 언덕이 나온다. 급경사가 진 모래 언덕이다. 아이들이 모래 언덕에서 썰매 타듯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는 곳이다. 급경사 진 모래 언덕에서 해변을 바라본다. 드넓은 백사장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사람들이 바다를 즐기고 있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골프장에서 한가하게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이 보인다. 여유로운 호주 생활의 단면을 본다.

한국 전쟁에 해군과 육군으로 참전했던 퇴역 군인이 자랑스럽게 훈장을 달고 포즈를 취한다. 가운데 있는 할머니는 돌아가신 남편을 대신해서 훈장을 달았다.
 한국 전쟁에 해군과 육군으로 참전했던 퇴역 군인이 자랑스럽게 훈장을 달고 포즈를 취한다. 가운데 있는 할머니는 돌아가신 남편을 대신해서 훈장을 달았다.
ⓒ 이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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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던 길을 되돌아간다. 가파른 절벽 위에 세워진 전망대에 한 번 더 들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이 전망대에서 바다를 보고 있다. 할아버지 둘은 정장을 입었고, 할머니 둘도 옷을 곱게 차려입었다. 우리를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묻기에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반갑게 손을 잡는다.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안작데이(ANZAC Day, 4월 25일)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포스터에 왔다고 한다. 안작데이는 호주와 뉴질랜드가 1차 대전 당시 터키의 갈리폴리(Gallipoli)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을 추모하는 날이다. 한국의 현충일과 같은 국경일이다.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자동차에 가서 훈장을 가지고 와서 가슴에 단다. 남편이 돌아가신 할머니는 남편이 받은 훈장을 달고 포즈를 취한다. 사진을 찍고 나서도 작년 11월에 한국에 다녀왔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끝없이 나온다. 호주의 한국 참전에 대한 책자와 비디오도 주면서 우리를 반갑게 대한다.

집에 돌아와 받아온 책자를 펴본다. 흔히 보던 한국 전쟁 당시의 사진이 실려 있다. 보따리를 달구지에 싣고 피난 가는 사진도 있다. 나의 엄마도 저 중에 한 사람으로 전쟁을 맞았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전쟁,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내 것과 네 것을 가르고,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전쟁, 인간은 가장 똑똑하면서도 가장 어리석은 동물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태그:#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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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서 300km 정도 북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에서 은퇴 생활하고 있습니다. 호주 여행과 시골 삶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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