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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고객님~!"

30도 목례에 환한 미소는 필수, 모든 말은 고객님으로 시작했다가 고객님으로 끝나는 이곳, 백화점이다. 설 명절을 맞아 백화점 한 층의 넓은 행사장은 식품코너 설 선물 세트장으로 변신했다. 굴비, 고기, 과일, 멸치, 한과, 홍삼 등 얼핏 봐도 몇 십 가지 품목은 넘게 입점했다. 같은 품목이라도 브랜드마다 단기 판매사원이 따로 있으니 그들의 수도 어마어마하다.

나는 설을 앞두고 11일 동안 거기서 단기 판매사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내가 맡은 품목은 주류, 세부적으로는 전통주다. 전통주도 서로 다른 3개 업체가 들어와 있으니, 그 좁은 매대에 판매사원 셋이 옹기종기 모여 서 있는 모습은 답답하기 짝이 없다. 바로 뒤 양주 매대는 더 가관이다. 조니워○, 글렌피○, 시바스리○, 로얄 살루○, 발렌타○ 등 그 종류도 참 다양해, 양주 진열품은 판매사원들에 가려 안 보일 지경이다.

내가 일하는 곳의 바로 맞은편에는 버섯 선물세트 매대가 있다. 아무리 세트여도 그렇지, 버섯세트 하나에 30만 원씩이나 하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출근할 땐 아가씨, 퇴근할 땐 할머니

단기 판매사원의 업무는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일단 판매를 위해 고객을 응대하고, 상품이 팔리면 고객과 동행해 결제를 도와준 후, 지하 창고로 내려와 백화점 포장지로 상품을 포장하고, 다시 부리나케 올라와서 고객에게 최종적으로 상품을 전달한다. 틈틈이 재고 체크도 해야 하고, 특히 배송으로 나가는 상품이면 포장도 까다롭다. 주류는 병이 깨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각 병과 잔을 에어캡(일명 뽁뽁이)으로 꼼꼼하게 감싸주어야 한다.

하루 열 시간의 근무 중 점심시간 한 시간, 저녁 간식시간 30분을 제외한 8시간 30분은 거의 내내 서 있는다. 손님이 있으면 그나마 말이라도 하지, 한가한 날에는 고역이다. 하루 종일 서 있으면 정말 엄청난 피로가 쌓인다. 하루 근무시간의 딱 중간인 오후 3~4시쯤이 특히 고비. '시곗바늘아 달려봐, 조금만 더 빨리 날아봐'(아이유의 노래 <너랑 나> 노랫말)라고 정신 나간 주문까지 중얼거릴 정도다.

설을 앞두고 백화점에서 단기판매사원 아르바이트를 했다. 글쓴이가 일한 전통주 선물세트 매대 사진.
 설을 앞두고 백화점에서 단기판매사원 아르바이트를 했다. 글쓴이가 일한 전통주 선물세트 매대 사진.
ⓒ 남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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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고객이 올 때를 대비해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깨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다. 퇴근 무렵엔 종아리 알통이 터질 듯하며, 발바닥은 불이 난 것 같고 삭신이 다 쑤신다. 하루 동안 무거운 술병들을 들고 왔다갔다 하다보면, 헬스클럽에 다니는 남자들도 만들기 어렵다는 '승모근'까지 생긴다. 어깨에 돌덩이를 얹고 다니는 느낌이다. "어이구 어이구 나 죽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출근할 땐 20대 아가씨였지만, 퇴근할 땐 할머니가 되어버린 기분이랄까.

또 하나 힘든 점이 있다면, 백화점 판매의 현장은 치열한 경쟁의 장이라는 점이다. 전통주 3개 업체가 각각 경쟁하며, 또 전통주는 양주와 경쟁하며, 또 주류 품목은 홍삼이나 꿀 등 다른 품목과 경쟁한다. 식품 선물세트 매대에는 드센 판매사원 아줌마들이 많아서 더 살벌하다. 손님을 가로채서 싸움이라도 났다 싶으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이번에 내가 일하는 동안에도 '버섯 아줌마'들이 서로 큰 소리 내며 싸우는 걸 두 번이나 목격했지만, 다행히 주먹은 오가지 않았다. 작년 추석 시즌의 경우, 고추장 파는 아줌마 판매사원들끼리 정말 치고 받고 싸우다가 결국 한 아줌마의 이가 깨지면서 싸움이 끝났다고 한다.

영업이 끝난 뒤에도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하루 일이 끝나면, 백화점 각 지점에 흩어져 있는 판매사원들의 스마트폰 단체채팅방에서 업체 담당자에게 매출보고를 한다. 이게 은근 경쟁이며 굴욕이다. 나의 근무지는 서울 삼성역 근처의 백화점으로, 강남권이라 사람도 많고 매출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그런데 어쩌다 수원이나 영등포 같은 곳에서 '대박'이 터지는 날이면 기분이 상한다. "어쭈? 저긴 오늘 좀 했는데?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기보단 잘해야지" 하는 오기가 생긴다.

대충대충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한철 장사

"어차피 진짜 직원도 아니고 단기 아르바이트일 뿐인데 뭘 그리 열심히 하냐"고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다. 돈을 안 줄 것도 아닌데 적당히 시간 때우다 가면 될 것을, 항상 매출에 스트레스 받고 밥 먹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일하는 내 모습에 좀 의아해하기도 한다. 나라고 왜 그러고 싶지 않겠나. 농땡이 치고 대충 하다 집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바로 '한철 장사의 책임감'이 발목을 잡는다. 내가 파는 주류 브랜드는 설날과 추석, 딱 이렇게 두 시즌의 매출이 그 해 1년을 좌우한다고 한다. 명절 시즌 장사를 망치면 1년 장사를 쫄딱 망하게 될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다보니 책임감이 막중하다. '아 내가 이번에 많이 못 팔면, 우리 과장님은 손가락 빨겠지? 두 살배기 아기를 굶길지도 몰라. 게다가 회사에는 얼마나 큰 손해겠어' 뭐 이런 생각이 들다보니 농땡이를 치고 싶단 마음은 저 멀리 사라져간다.

사실 작년 설에도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발목을 크게 다친 적이 있다. 기다리는 고객을 위해 술이 든 상자를 들고 냅다 뛰다가 삐끗해서 발목 인대가 끊어져버렸다. 발이 풍선처럼 부풀어 시퍼레진 그 순간에도 나는 술병을 깨지 않고 무사히 지킨 것을 다행스러워 했다. 물론 그 뒤에 그 술값의 몇 십 배나 되는 치료비가 들었다. 깁스를 해서도 결근하지 않고 끝까지 출근해 일을 마쳤다. 내가 없으면 나를 대체할 인력도 없을 뿐더러, 그 한철 장사가 전체 회사 매출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술 아홉 병을 들고 뛰는 신공(?)을 선보이다 손목을 삐었다. 작년에는 발목 인대가 끊어지기도 했다.
 술 아홉 병을 들고 뛰는 신공(?)을 선보이다 손목을 삐었다. 작년에는 발목 인대가 끊어지기도 했다.
ⓒ 남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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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있기에 빛도 있는 법

일이 고된 것에 비해 수당이 높지 않아도, 각종 우여곡절이 있어도, 배우는 건 있다. 고객으로 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백화점의 화려함과 눈부신 조명, 비싸고 좋은 상품, 품위와 격식 등을 떠올리지만 판매사원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자동차 매연과 먼지가 가득한 추운 창고에서 고생하며, 구내식당에서 허겁지겁 2500원짜리 밥을 '흡입'하고, 힘들어도 티 한번 못낸 채 고객에게 웃어야 한다.

고객의 항의는 곧 재앙이요, 고객이 죽으라면 정말 죽는 시늉까지 해야 하는 것이 바로 백화점 서비스 직원의 숙명이랄까. 내가 고객으로 왔을 땐 정말 몰랐다. 그들은 고객에게 눈부신 빛을 누리게 해주기 위해 정작 자신들은 어둠 속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지나친 비약일지 모르지만, 나는 빛과 어둠은 항상 공존한다는 소중한 사실을 이 짧은 아르바이트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요즘은 입버릇처럼 "에휴, 진짜 쉬운 일이 없어"라고 말하곤 한다. 부끄럽지만, 나는 사실 약간 과다소비와 '된장녀' 기질이 있어서 평소에 딱히 살 게 없어도 백화점을 내 집처럼 누비고 다녔다. 처음 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것도 내가 항상 다니던 백화점이면 뭔가 좀 더 직원 대우도 좋을 것 같고, 근무환경도 좋을 것 같아서였다. 음, 역시 한 방 먹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 혹시 예전의 나처럼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꿀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려나? 그런 사람에겐 꼭 한마디 해주고 싶다.

(<개그콘서트>의 신보라에 빙의해서)"내가 지금 뼈 빠지게 일하고도 고객님한테 욕 잔뜩 먹고 배불러 죽어봐~야 정신 차리쥐?!"

덧붙이는 글 | 남기인 기자는 오마이뉴스 1기 대학통신원입니다.



태그:#백화점 , #알바, #꿀알바, #명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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