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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재키 찬이죠? 맞죠?"
"아니야!"
"맞아!"

스무 살이 좀 넘어 보이는 흑인 남녀가 내 앞에서 서로 자기 말이 맞는다고 우겨댔다.

"…"

나는 한 동안 빙그레 웃기만 했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의 록키 마운트(Rocky Mount)라는 소도시에서였다. 도서관 문을 나서는데, 인상 좋은, 젊은 흑인 남녀가 뒤를 쫓아 왔다. 그들은 내 앞을 가로 막고 "재키 찬이 아니냐"고 대뜸 묻더니, 자기들끼리 "맞다", "아니다"며 옥신각신 하는 거였다.

수개월에 걸쳐 북미대륙 유랑여행을 하면서, 황당한 일들을 좀 겪었는데 이런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어린 아이라면 몰라도, 어른들이 이 같은 일로 나그네 발길을 붙잡아 세우는 건 상상하기 힘들다. 최소한 '우리'들 상식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흑인'들이라면 가능하다.

흑인들에 대한 편견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발상이나 행동거지가 순수했기 때문에 당시 일을 지금도 기분 좋게 기억하고 있다. 미국 흑인들 가운데는 경험상 놀라울 정도로 순진무구하거나 소박했던 사람들이 드물지 않다.

미국의 남동부는 흑인들의 비율이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은 곳이다. 조지아, 앨라배마, 미시시피, 사우스 캐롤라이나 등지를 떠올리면, 흑인들에 대한 이런저런 기억도 새록새록 살아난다.

흑인과 연관된, 평생 잊지 못할 일이 생긴 건 앨라배마에서였다. 클레이튼(Clayton)이라는 시골 마을의 흑인 교회에서 체험이 그 것이다.

한국 개신교 교회에 대한 내 인상 아주 좋은 편은 못 된다. 교회를 찾지 않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헌데, 나는 클레이튼의 흑인 교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겪었다. 재미 삼아 들른 교회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거의 30분 가까이 서럽게 울었다. 

당시 일요 예배에 참석한 이들은 스무 명 안팎으로 온통 흑인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이고 젊은 여자는 서넛이나 될까 말까 했다. 하도 오랫동안 울고 있으니까 눈에 띌 수 밖에 없었고, 결국 나는 연단으로 불려 나갔다. 목사는 내게 자기 소개를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그때처럼 영어가 술술 나왔던 때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당시 왜 그렇게 서럽게 장시간 울었는지는 지금도 잘 알 수 없다. 흑인들에 대한 선입견 혹은 고정관념 때문이었을 수도, 아니면 나 자신도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을 수도 있겠다. 다만 확실히 기억 나는 게 있다면, 일찍이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상여 나갈 때 광경이 당시 울면서 계속해서 떠올랐다.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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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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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캐롤라이나 해변에 차를 세워두고 퀴퀴한 냄새가 나던 침낭을 말렸다(왼쪽). 장기간 유랑여행을 하면서 머리를 깎기도 감기도 귀찮아 파마를 하고 길렀다. 이 때 모습을 보고 젊은 흑인 남녀가 재키 찬이 맞다, 아니다며 말씨름을 했다.

흑인 교회
 흑인 교회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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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라배마 클레이튼의 흑인 교회에서 정식 예배가 시작되기 전,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있다. 이들의 모습이 어찌나 진지했는지, 하느님의 존재를 그 순간만큼은 믿지 않을 수 없다. 갑자기 서럽게 울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었다.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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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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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교회의 벽에 걸린 성화와 열변을 토하는 흑인 여자 목사. 뒤쪽은 남편으로 역시 목사다. 여 목사는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며, 내게 친근감을 표시하고 예배가 끝난 뒤 서브웨이 라는 가게에서 샌드위치를 점심으로 사줬다.

흑백 교회
 흑백 교회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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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튼의 흑인 교회(위 왼쪽). 교인이 너무 적어 2주일에 한 번씩 예배를 보고 있었다. 흑인교회의 지척에 있는 백인 교회(위 오른쪽). 1837년에 세워진 유서 깊은 교회이다. 백인 교회에는 예배에 참가한 신도들이 넘쳐 났다.

걸라 빌리지
 걸라 빌리지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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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스 캐롤라이나 주의 전형적인 해변(왼쪽). 미국 흑인들의 선조인 아프리카 흑인 노예의 대부분은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통해 북미대륙에 첫발을 디뎠다.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세인트 헬레나라는 곳에 자리한 걸라 빌리지(Gullah village).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흑인 마을로 흑인들에게는 일종의 성지 같은 곳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sejongsee.net(세종시 닷넷)에도 실렸습니다. 세종시 닷넷의 또 다른 연재물인 '조여사의 촌철살인' 등도 일독을 권합니다.



태그:#흑인, #아메리카, #여행,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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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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