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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7일)도 여전히 울산은 뜨거웠습니다. 낮 기온이 36도를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오후 1시께 어머니께서 시내에서 좀 보자고 하시더군요. 시원한 냉면 한 그릇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자식인 제가 사드려야 하는데... 어머니가 무슨 돈이 생겼는지, 별로 잘난 것도 없는 큰아들에게 냉면 한 그릇 사주고 싶었나 봅니다. 그렇게 가벼운 기분으로 어머니를 만나러 시내로 갔습니다.

"내가 큰아들을 위해 보험 하나 들었다. 이거 잘 보관하고 있다가 내 죽거들랑 장례비용에 쓰거라. 돈이 남으면 생활비에 보태 쓰고..."

어머니는 맛있다는 냉면집으로 들어가 앉으시더니 저에게 비닐 봉투를 내밀면서 말했습니다. 비닐 봉투 안에는 보험증서가 들어 있었습니다. OO화재보험사 보험이었습니다. 계약정보를 보니 무슨 일로 사고가 나서 사망시 얼마, 다쳤을 때 얼마, 가족생활지원금 얼마 등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담담하게 받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보험설계사가 온다고 했습니다. 냉면 시키는 걸 잠시 보류해두고 기다렸습니다. 가까운 곳에 사무실이 있는지 보험설계사가 왔습니다.

"어머님이 상해 사망 했을 시에 상속권자를 아드님으로 지명하셨습니다. 본 보험금은 이제 계약자가 지명한 아드님 외엔 그 누구에게도 지급되지 않게 됩니다."

보험설계사는 어머니에게 부탁한 제 주민증 사본을 가져 가며 말했습니다. 주 계약자가 어머니고 저는 법정상속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전에 새로 만난 할아버지의 며느리 앞으로 액수가 적은 보험 하나를 들었습니다. 그 보험의 상속인은 그 집 며느리로 등록돼 있어 중도 해지하고 법적으론 아무 상관 없지만 생물학적 모자지간인 저를 상속권자로 하여 다시 보험에 든 것이었습니다. 액수도 저번에 든 보험료보다 2배 더 비싼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는 청소 일 다니면서 부지런히 돈을 벌어 끝까지 보험료를 낼 것이니 염려말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냉면을 좋아 하시나 봅니다.
 어머니는 냉면을 좋아 하시나 봅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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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납입해야 하는 보험료는 5만3900원이었습니다. 10년 납 100세 만기로 되어 있었고 청약일은 2013년 8월 7일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보험료 납부기간은 2024년 8월 7일까지로, 찾을 수 있는 날은 그보다 20년 더 후인 2044년 8월 7일자로 되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올해 연세가 69세니 79세까지 보험료를 매월 납부해야 합니다. 그것을 어머니는 여기 저기 아파트 청소를 해 돈을 벌어 납부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새로 재혼한 며느리 앞으로 된 보험이 영 마뜩잖았나 봅니다. 어머니는 큰아들 앞으로 보험을 들어주고 싶으셨나 봅니다. 보험설계사는 다른 약속이 있다면서 간단하게 요약 설명해주고는 자리를 떴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이 언제 죽게 될지도 모른다며 돈벌이가 신통치 않은 큰아들이 계속 눈에 밟혔던 모양입니다. 그렇게라도 해 두어야 마음 편히 살다가 죽을 수 있을 거라 했습니다. 거기서 제가 무슨 말을 했어야 할까요.

"궁진이 엄마 여기 어디에 있는 냉면집인데 그리로 와. 내가 냉면 한 그릇 사줄께."

어머니가 보험설계사를 보낸 후 누구에겐가 전화를 거는데 들려오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는 궁금해서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궁진이네는 우리보다 잘 사는데 왜 엄마가 사주세요?"

어머니는 대답했습니다.

"물론 우리보다 잘 살지. 궁진이는 서울로 시집갔는데 부자인가봐. 사위가 궁진이 엄마한데 용돈도 많이 주고 그래. 너희들이 어렸을때 궁진이네 도움을 많이 받았잖아. 경비실 몰래 전기도 주고 호스를 사다 물도 주고 했어."

저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참으로 오래간만에 듣는 이름입니다. 궁진이란 여자는 저보다 두어살 어립니다. 당시 국민학교 4학년이었고 부모님은 현대중공업 단층 사택단지 중간쯤 야산에 포장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궁진이네는 앞 주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궁진이 아버지는 현대중공업 생산직에 직급이 있던 분이었고 아버지는 그 사원사택 청소부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저는 어려서 어떻게 궁진이네와 가까운 이웃이 되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궁진이 집에는 흑백TV가 있었습니다. 저와 동생은 여름날 문이 열린 창문 너머에 서 흑백방송을 보곤 했는데, 하루는 궁진이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보라 했습니다.

그 후 궁진이와도 가깝게 지냈습니다. 눈이 작았던 저는 눈이 큰 여자만 보면 좋았습니다. 궁진이는 눈이 참 크고 예뻤습니다. 저는 2년이 지난 어느날 용기를 내어 궁진이에게 편지를 써서 주었었습니다. 아마 좋아한다는 내용이었던 거 같습니다. 궁진이는 부모에게 제 편지를 넘겨 주었고 궁진이 아버지는 저를 불러 뺨을 때리면서 혼냈습니다. 그 후 궁진이 아버지가 겁나서 궁진이에게 접근하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 후 그곳은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우린 그때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허름한 판잣집을 짓고 살았고 궁진이네는 방어진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후론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나이가 차고 결혼도 하고 직업을 따라 부산으로 용인으로 서울로 흘러 다니다 몇 년이 흐른 후 다시 울산으로 왔을 때 많은 게 변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가신 지 3년이 되었다 하고 저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사내하청업체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서울 살다가 정리하고 울산 내려와 살던 해(2000년) 추석 일주일이 지난 후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젊어서부터 술에 쩔어 사시던 아버지는 술에 만취한 채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폭염의 나날이 이어지고 있는 울산 날씨
 폭염의 나날이 이어지고 있는 울산 날씨
ⓒ 인터넷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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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어찌나 많이 우시던지요.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을 피해 울산 동구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월세를 얻어 사시던 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례를 치러주셨습니다. 어머니... 제 어머니는 부모가 중국에 이민을 가 사시다 해방 직전 벌교라는 동네에 가서 터를 잡고 살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셨다고 합니다. 서울서 어렵사리 살림을 꾸려가던 어머니 가족.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완강함에 배움의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열아홉 어린 나이에 스물아홉 아버지를 만나 하기 싫은 결혼을 하고 강원도 횡성 산골에 화전밭 일구며 살다가 먹고 사는 게 힘겨워졌다고 합니다. 이후 다시 강원도 평창 산골에 화전민으로 들어가 어렵게 살면서 저를 낳았다고 합니다.

강원도 평창에서 다시 춘천으로 단양으로 울산으로 생존을 위해 옮겨 다니며 살다가 울산에서 칠십이 다 되셨습니다. 두 분 다 문맹이고 두 분 다 성격이 불같아서 자주 다투셨습니다. 놀음과 술을 좋아 하시던 아버지였지만 돈 버는데는 둔했습니다. 저 또한 그런 아비를 닮았는지 돈 잘 버는 머리가 없습니다. 자식들이 모두 분가하고도 아버지의 술주정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어머니는 "더이상 얻어 맞으며 못살겠다"며 집을 나가셨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으며 신세한탄으로 세월 보내시다 어머니가 집 나가신 지 3년만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느 할머니의 소개로 지금의 할아버지를 만나 법적으로 재혼한 상태입니다. 어머니가 재혼한 것도 피붙이인 자식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싫어서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살면서 많이 다치고 아픈 곳도 많았습니다. 이젠 나이가 들어가니 눈이 점점 더 침침해진다 하시고 머리도 아프다 하시고 가슴이 두근 거린다 하시고 무릎도 아프시다 하십니다. 평발이라 잘 넘어지셔서 팔다리가 부러지기도 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해서 다치고 일하다 다치고 아프고 해서 지금은 온 몸이 골병든 상태일 것 입니다.

어머닌 자신의 상태가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자식에 대한 염려를 놓지 않으십니다. 제가 아무리 "무엇을 해도 먹고 살테니 걱정 마시라"고 그렇게 이야기 해 드려도 어머니가 아들을 보는 마음은 그게 아닌가 봅니다. 저에겐 남동생 하나와 여동생 하나가 있습니다. 두 동생이 그 사실을 알게되면 섭섭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궁진이 엄마는 멀리서 오고 있다고 해서 우리 먼저 냉면 두 그릇 시켜 먹었습니다. 어머니의 지나온 세월 그리고 지금 처한 현실 그 속에서도 그저 큰아들만 걱정하는 거 같아 얼음이 둥둥 뜬 냉면을 먹는데 왜그리 눈시울이 뜨거워 지던지요. 우리가 냉면을 다 먹고 난 후 궁진이 엄마가 와서 냉면을 드셨습니다. 우린 식당에서 나와 어머니와 궁진이 엄마는 저쪽으로 가시고 저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 탔습니다. 집으로 오는 버스 안에서 한참이나 뜨거워진 눈시울을 진정 시키느라 애먹었습니다. 어머니가 비닐 봉투에 넣어준 보험증서를 보니 다시 눈시울이 뜨거워 졌습니다. 폭염보다 더 뜨거운.

덧붙이는 글 | '폭염이야기' 응모글



태그:#어머니, #여름, #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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