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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군 모덕사 안에 자리하고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살던 '중화당'
▲ 중화당 충남 청양군 모덕사 안에 자리하고 있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살던 '중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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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 선생. 조선 말기의 대학자이며, 의병장이기도 하다. 나라를 구하고자 살신성인한 선생은 한때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 171에 소재한 모덕사 안에 자리한 고택에서 기거를 했다. '중화당'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 고택은, 1990년 4월 선생이 경기도 포천에서 '호서 정산'으로 이주하여 거주하였던 집이다.

이제 113년이 된 이 한옥은 당시 선생이 일제에 의해 가택연금 중에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선생은 이 집에서 많은 사람들 모아놓고 강의를 하고, 독립운동을 논의하였다. 이 집에서 선생이 사신 것은 고작 6년여. 1906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왜헌병의 감시를 피하여 야간을 틈 타 떠나신 곳이다.

중화당의 사랑채 마루 위에 걸려있는 충효가전 현판
▲ 충효가전 중화당의 사랑채 마루 위에 걸려있는 충효가전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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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당 사랑채의 한 편에 정자로 사용한 높임마루. 난간을 둘렀다
▲ 정자마루 중화당 사랑채의 한 편에 정자로 사용한 높임마루. 난간을 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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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남아있는 선생의 사우

면암 최익현 선생만큼 많은 사우와 유적 등에서 모시고 있는 분도 그리 흔치는 않다. 선생은 현재 청양 모덕사를 비롯하여, 경기도 포천의 채산사, 경기도 가평의 삼충단, 전북 군산의 현충단, 전북 진안의 이산묘, 진안 마령면의 영곡사, 전북 순창의 지산사, 전북 정읍의 시산사, 정읍시 칠보면에 있는 호남의병 창의지인 무성서원 등에 선생의 영정과 비 등이 모셔져 있다.

이 외에도 전북 고창의 도동사, 광주 광산의 대산사, 전남 함평의 월악사, 전남 곡성의 오강사, 전남 구례의 봉산사, 전남 보성의 모충사, 전남 무안의 평산사, 전남 화순의 춘산사 등에도 선생의 영정과 위폐 등이 모셔져 있다. 전남 신안군에는 여기저기 선생의 흔적이 보인다.

경상도와 제주도, 일본, 강원도 등에도 선생의 유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경북 울진의 아산영당에 영정, 경남 하동의 운암영당에 영정이, 제주도에는 선생의 유적비 등이 있으며, 금강산에는 선생의 글씨가, 대마도에는 순국비가 있다.

영모재 쪽에서 바라본 안채. 안체는 ㄱ자 형이다
▲ 안채 영모재 쪽에서 바라본 안채. 안체는 ㄱ자 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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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채의 건넌방도 높임마루를 놓았다
▲ 안채 안채의 건넌방도 높임마루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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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쌀 한 톨, 물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아

면암 최익현 선생은 이곳 중화당에서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왜경에 나포가 되어 대마도에 구금이 되었는데, 일본 땅을 밟지 않겠다고 버선 발 속에 조국의 흙 한 줌을 넣었다고 한다. 또한 물 한 동이를 갖고 배에 올랐는데, 일본 땅으로 끌려가서는 단 한 톨의 쌀도 입에 대지 않고 있다가, 1907년 단식 끝에 순국하셨다.

면암 선생은 일본 대마도에서 1906년 11월 마지막으로 임금께 글을 올렸다. '유소'라는 이 글에 보면 선생의 애국충정이 그대로 배어 있다.

안채의 뒤편. 한 끝에 낮은 굴뚝이 인상적이다
▲ 후원 안채의 뒤편. 한 끝에 낮은 굴뚝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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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른 신 최익현은 일본 대마도에 왜놈 경비대 안에서 서향 재배하고, 황제폐하께 말씀을 올립니다. 신이 이곳에 온 이래 한술의 쌀도 한모금의 물도 모두 적의 손에서 나온지라, 차마 입과 배(먹는 것)로써 의를 더럽힐 수 없어 그대로 물리쳐 버리고 단식으로 지금 선왕의 의리에 따르고 있습니다.(중략)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일이 할 수 없이 이리 되었다고 속단마시고, 큰 뜻을 더욱 굳게  하여 과감하게 용진하여 원수 왜놈들에게 당한 치욕을 되새겨, 실속 없는 형식을 믿지 마시고, 놈들의 무도한 위협을 겁내지 마십시오. 또한 간사한 무리들의 아첨을 듣지 마시고, 힘써 자주체제를 마련하여, 길이 의뢰하는 마음을 버리고, 더욱 와신상담의 뜻을 굳게 하여 실력 양성에 힘써서 영재를 등용하고, 군민을 무양하여 사방의 정세를 보살펴서 일을 꾸미면, 백성들은 진실로 임금을 높이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우러나올 것입니다.(하략)' - 자료출처 모덕사

면암 선생이 대마도에서 마지막으로 왕께 올린 유서
▲ 유소 면암 선생이 대마도에서 마지막으로 왕께 올린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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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등박문과 원세개도 만사를 보내와

면암 최익현 선생은 1907년 1월 1일에 순국하시니, 제일 먼저 이등박문이 만사로 조문을 했다고 한다.
   
'대한 왕께 절 올리며 임을 위해 곡 하올제
흐르는 눈물 바람에 날려 온 하늘에 비가 오네.
고국명산 그 어느 곳에 임의 유택 정하올가?
그 좌향 묻지 마라 백이의 서산에서 노중연의 동해여라'  

7월 14일 장맛비 속에 찾아간 청양군. 선생이 살다 가신 중화당은 사랑채와 안채, 그리고 조상의 위폐를 모신 영모재로 구성되어 있다. 중화당의 사랑채 앞에서 잠시 집을 바라다본다. 이 집을 한바퀴 돌면서 집 곳곳을 소개한다는 것이 새삼 무슨 의미가 있으리오. 그저 이곳에서 살다가 간 선생의 뜻에 만분지일이라도 알고 간다면, 그도 큰 의미가 있는 것을.

중화당의 장독대. 후손들이 살고 있어 정리가 반듯하다
▲ 장독대 중화당의 장독대. 후손들이 살고 있어 정리가 반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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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툇마루 앞에 걸린 글씨가 눈에 들어온다. '충효전가(忠孝傳家)', 충과 효를 대대로 물리는 집이라는 소리이다. 아마도 선생의 그 충정을 이 한 마디로 표현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세차게 퍼붓던 장맛비가 잠시 멈추었다. 중화당 앞 연못가에 조성한 선생의 동상을 향해 고개를 숙인다. 선생이 사시던 집조차 돌아보기가 죄스럽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중화당, #면암 최익현, #청양, #모덕사,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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