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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청 직원은 진술이 끝나자 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금방 해결될 거라며 출석일에 작성하라던 합의서는 끝내 체불업자의 사인을 받지 못했다.
 노동청 직원은 진술이 끝나자 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금방 해결될 거라며 출석일에 작성하라던 합의서는 끝내 체불업자의 사인을 받지 못했다.
ⓒ 이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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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남 여수 작은 학원에서 과학을 가르쳤다. 힘들었지만 내 힘으로 벌어 부모님께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월급날 내 통장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원장님은 학원 사정이 안 좋으니 월급날을 바꾸자고 했다. 그 말을 믿고 기다린 바뀐 월급날에도 통장 잔고는 그대로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학원을 그만두고 노동청에 신고했다.

절차에 따라 25일만 참으면 월급이 들어올 줄 알았다. 나는 원장님에게 "초과근무수당까진 원하지 않는다, 일한만큼만 달라"고 부탁했다. 노동청에서는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위로하면서 혹시 모르니 합의서를 작성하라고 했다. 왔다갔다 귀찮으니 미리 쓰라는 말이었다.

집에 돌아와 초조한 마음으로 25일을 기다렸다. 월급은 들어오지 않았다. 노동청에서는 피 신청인의 청산 약속에 따라 민원처리기간이 연장됐다고 통보했다. 올해 1월 16일에 접수된 내 진정은 지난 4월 16일 학원 원장이 검찰청에 송치되면서 마무리됐다. 결과적으로 나는 한푼도 받지 못했다. 내가 바랐던 것은 하나였다. 바로 '일한 만큼의 대가'였다.

늘어나는 체불임금, 해결이 벌금형?

연도별 체불 임금(고용노동부 자료 근거)
 연도별 체불 임금(고용노동부 자료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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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고 했던가. 일한 자(者)에게 대가가 돌아가는 것은 세상의 이치고 순리다. 그러나 일한 자들은 먹지도 못한 채 빈손으로 다시 일을 한다. 마냥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이 불쌍하고 굶주린 일한 자들을 누가 구해낼 수 있을까.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2008년 9560억 원이었던 체불임금은 2009년 1조3438억 원까지 급격하게 상승세를 보이다가 2010년 1조1630억 원, 2011년 1조874억 원으로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러나 점차 해결될 것 같아 보였던 체불임금은 경제침체 여파로 또다시 상승했다. 2012년 체불임금은 1조1772억 원, 2011년(1조874억 원) 대비 8.2% 증가했다. 고용노동부에서는 체불임금 신고기간, 청산 집중 지도기간을 마련해 이를 해결하고자 했지만, 해결책이 되진 못했다. 경제상황과 맞물려 요동치는 임금체불문제가 노동부의 집중 단속이니 캠페인 등으로 해결될 수는 없었던 게다.

나는 해결 방법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그 잘못의 근본은 바로 근로기준법에 있다. 체불 사업주는 노동부에서 통보한 기일 내에 임금을 주지 않으면 형사 처벌로 넘어가게 된다. 형사처벌이라고 해서 대단한 벌을 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체불된 임금 어느 정도에 해당하는 벌금을 낼 뿐이다.

물론 '체불업자'라는 수식어가 붙기는 한다. 임금 등을 체불해 2회 이상 유죄가 확정된 자는 명단 공개 기준일 1년 이내 임금 등의 체불총액이 3000만 원 이상인 경우 그 인적사항 등을 공개할 수 있다. 과연 체불업자들은 인적사항 공개가 두려워 임금을 지급할까. 공개를 한다고 하더라도 구직자들이 그 인적사항을 보면서 일자리를 구하는 경우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구직자들은 그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거기다 기간 연장을 통해 소명의 기회를 보장하는 근로기준법은 체불업자에게 관대해도 너무 관대하다. 근로기준법을 만든 이들은 임금을 받지 못해 하루하루 연명하는 노동자보다 그들에게 독촉 받는 사업주가 더 가여워 보이는 것일까.

피해자는 임금을 원할 뿐... 근본적 해결책 필요

근로기준법은 세상의 이치와 순리를 지켜줘야 한다. 피해자가 노동한 대가를 받지 못한 법적 해결은 의미가 없다. 피해자는 고용노동부의 손을 떠난 임금체불사건을 다시 민사소송으로 제기해야만 임금을 받을 수 있다. 피해자들은 이미 근로기준법을 통해 좌절을 맛본 상태에서 몇 개월 동안 생계가 걸린 싸움을 해야 한다. 지치기 마련이다. 또한 대부분의 임금체불이 소액이기 때문에 소를 제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소액의 임금을 받기위해 노무사를 찾는 것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다.

근로기준법의 개혁을 통해 피해자들이 임금을 받으려는 의지가 꺾이지 않도록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에 체불임금이 피해자의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축소하고 체불업자가 임금체불에 대해 경각심을 갖도록 단호한 조처를 취해야 한다.

그래서 내 체불임금은 어떻게 됐나
나는 내가 받아야 할 체불임금이 소액이어서 아직 민사소송을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다. 혹시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이가 있다면 대한법률구조공단(www.klac.or.kr)을 통해 관련 법조항 등에 대한 상담을 받을 수 있다.
피해자들은 체불업자들이 벌금형을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받아야 할 대가를 원한다. 근로기준법은 왜 근로자들이 임금체불로 민원을 제기해야 했는지 원인을 바라봐야 한다. 근로 기준이 누구를 위한 기준인지 생각해야 한다.


태그:#체불임금, #합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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