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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재직하고 있는 학교는 기독교 계통의 사립학교, 이른바 '미션 스쿨'이다. 대한민국의 기독교 학교가 대개 그렇듯이 우리 학교의 시원도 일제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도 이 동네 군산에서는 우리 학교를, 요상한 선교사 이름이 들어간 그 시절의 이름으로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이 많다.

학교법인 이사장이나 신앙심 지극한 교사들은 우리 학교가 지역 내 유일한 기독 사학이라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 이것만으로도 우리 학교가 얼마나 기독교의 복음을 중시하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학교법인이 속해 있는 기독 교단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다. 알만한 사람들은 대강 알겠지만,이 교단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4~5년 전 쯤, 권정생(1937~2007) 선생님의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2008·녹색평론)을 신입생들에게 읽힌 적이 있다.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한 책읽기 과제용으로 정한 책이었다. 신입생들은 입학 후에 이 책에 대한 독후 평가(?)에도 응시해야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그 해 국어 수행 평가에 반영하게끔 되어 있었다.

새 학년이 시작된 후, 그 모든 일들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즈음 선생님 한 분이 내게 다가왔다. 상기한 '유일 기독 사학'을 강조하는 교사들 중의 한 분이셨다.

"이번에 신입생들에게 읽으라고 한 책을 누가, 어떻게 정하셨어요?"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말속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네? 제가 정했는데요. 진정으로 예수님처럼 산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이들이 알았으면 해서요."

전체적으로 이런 취지로 대답했다. 지금 여기서는 내 말을 간단하게 인용하고 말았지만, 그때에는 책 내용까지 소개해가면서 제법 길게 말했다.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물론 <우리들의 하느님>에는 기성 교회나 기독교인들을 향한 권 선생님의 날선 비판이 많이 담겨 있다. 보수적인 기독교인에게는 결코 유쾌한 것들이 아니다. 하지만 그 비판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크고 화려한 것을 좇고, 가난하고 힘든 이들은 외면하는 한국 교회의 모습을 감쌀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그런 당연한 사실을 적어내린 글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의 선생님에게서 거대한 벽을 느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빌뱅이 언덕> 표지.
 <빌뱅이 언덕> 표지.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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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은, 개정 증보판 <우리들의 하느님>(2008)이 나온 후 4년 만에 나온, 권정생 선생님의 또다른 산문집이다. 권 선생님께서는 손수 산문집을 한 권도 내지 않으셨다. <우리들의 하느님> 이전에 나온 <권정생 이야기>(애초의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가 제목이 바뀐 것임. 절판됨)가 그렇고, 이 책이 또한 그렇다. 이들은 모두 다른 사람의 뜻에 따라 다른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졌다.

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돼 있다. 제1부는 권 선생님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다. 일본 도쿄의 시부야 셋집에서 사는 이야기로 시작하는 '나의 동화 이야기', 유년기와 청년기의 고달팠던 기억을 되살리고 있는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와 '열여섯 살의 겨울', 그리고 권 선생님의 둘째 형님에 대한 애틋함을 기록한 '목생 형님' 등이 그것이다.

제2·3부는 1970~2000년대에 쓰인 글들로, 우리의 현실과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을 주로 다룬 것들이다. 이 부분에 실린 글의 절반 정도는 이전에 절판된 책(<권정생 이야기>)에 실렸던 것들이다. 그 나머지가 권정생 어린이문화재단과 창비에서 새로 발굴해낸 글들이다.

권 선생님을 <강아지 똥>이나 <몽실 언니>와 같은 동화로만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 진한 애틋함과 서러움 속에서도 한 가닥 가느다란 희망의 빛줄기를 보여주는 그 멋진 작품들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권 선생님의 보통(?) 산문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산문들이, 평범하고 담담한 이야기를 통해 범상치 않은 깊은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권 선생님이 기독교의 진정한 정신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아래 대목을 보자.

성서의 가르침과 기독교 정신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아직까지도 혼란스럽다. 성서에는 "땅을 정복하라"라든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라는 파격적인 말도 분명히 있다. 기적으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기적으로 사람을 몰살해 버리는 대목도 있다. 선악의 객관성은 완전 무시되고 오직 유대인과 유대교 외에는 어떤 것이든 적이 되고 악이 되고 멸망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는 이런 유대교의 율법과 성전(聖殿) 중심의 권위와 독선을 깨뜨리러 세상에 왔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는 생명 존중의 종교로 바꿔 놓은 것이다. (중략)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렇게 눈물겹도록 힘겹게 살았다. 눈먼 거지의 빛이 되고 절름발이와 앉은뱅이와 난쟁이의 친구가 되었다. 세리(稅吏)와 창녀와 간질병 환자와 귀신 들린 자와 남편에게 버림받고 이웃에게 따돌림받은 이들의 따뜻한 친구가 된 예수, 그가 우리의 구세주인 것이다. - 본문 167쪽

나는 교회를 왜 나가는가. 기독교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는가. 천당? 전도? 가당치도 않은 말들이다. 우리 학교에는 아직도 여전히 '천당'과 '전도'를 운위하는 분들이 많이 계신다. 하지만 나는 권 선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을 읽으면서, 내 부끄러운 신앙의 한구석에 흔적처럼 남아 있던 그 말들을 시원하게 날려 버렸다. 그리고 <빌뱅이 언덕>의 곳곳에서 그 시원함을 다시 한번 만끽하였다.

그렇다고 이 책이 어떤 종교적인 각성만을 가져다준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에는 권 선생님이 살아오면서 만난 평범한 이웃들의 애틋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혼탁한 세상을 향해 내리치는 죽비와 같은 글들도 수두룩하다. 가난이 어느덧 죄악이 돼버린 세상에서, 권 선생님처럼 가난과 절제의 참뜻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책에는 그런 가난한 삶의, 부족하면서도 풍요로운 풍경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다.

행복은 크고 화려한 것에 있지 않다. 행복은 풍요롭고 넘치는 생활 속에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크고 화려하며 풍요롭고 넘치는 삶을 꾸려가고 싶어한다. 작고 초라한 것 그리고 가난하고 부족하여 늘 무언가가 아쉬운 현실은 부끄러워 감추어야 하는 것들이 돼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헉헉거리며 힘들게 살아간다. 무엇을 향하여 간다는 목적이나 방향도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이다. 행복이 영원히 잡히지 않는 파랑새가 되는 까닭이다.

설이다. 가족들과 함께 떡국을 먹으면서, 한번쯤 제자리에 서서 사는 삶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 세상에서 나보다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눈길을 돌려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살아가는 일의 귀함을 느껴본다면 더욱 좋겠다. 그 과정에서 권정생 선생님의 <빌뱅이 언덕>이 여러분의 조용한 동반자가 돼 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빌뱅이 언덕> (권정생 씀 | 2012.05. | 창비 |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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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창비(2012)


태그:#권정생, #<빌뱅이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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