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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봤던 십자가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마음을 동하게 했던 십자가는 뭇생명을 위해 아스팔트 길에 몸을 낮추어 기도를 하던 목사가 들고 있던 나무 십자가였다.
 지금껏 봤던 십자가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마음을 동하게 했던 십자가는 뭇생명을 위해 아스팔트 길에 몸을 낮추어 기도를 하던 목사가 들고 있던 나무 십자가였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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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교회 가본 게 두 번 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중학교 때 가본 부흥회가 처음이었다. 학교를 오가던 길옆 공터에서 며칠째 계속되던 부흥회, 담장에 걸린 플래카드와 스피커를 통해서 들려오던 시끌벅적한 소리에 담장 안 풍경이 궁금해 들어가 봤던 부흥회가 처음으로 본 교회행사였다.

유랑극단을 기웃거리는 마음으로 들어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지만 막상 눈에 보이는 광경은 그게 아니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무대에서는 어떤 목사가 웅변이라도 하듯 열변을 토한다. 흙바닥에 자리를 펴고 앉은 사람들은 '아멘' 거리며 열광을 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지 않자 사람들이 이상해졌다.

처음 가본 부흥회,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할 정도로 황당해

앉은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펄쩍펄쩍 뛴다. 무릎을 꿇고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두 손을 치켜 올리더니 '주여!' 거리며 함성을 지르더니 엉엉 울기조차 한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왜 흥분하며 우는지를 알 수 없으니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낯선 광경이다. 너무나 낯선 풍경에 끝까지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수업도중에 선생님의 눈을 피해 도망을 치듯 부흥회장을 빠져나왔다. 이게 필자가 처음으로 경험한 교회 분위기였다.

두 번째로 교회를 가본 건 고등학교를 막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 이야길 하면 너무 흔한 이야기라서 '그럴 줄 알았어'하며 웃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때 하숙을 하던 집에는 교회를 다니는 3학년 형이 있었다. 학기 초 일요일, 그 형이 교회엘 가자고 했다. 고등학생이 된 학생들이 처음으로 만나는 모임인데 여학생들도 많이 올 거라며 가자고한다.

따로 준비할 것 없이 지금 그대로 그냥 가자고 한다. 별다른 생각 없이, 어쩌면 예쁜 여학생이라도 만날까 하는 기대감으로 입고 있던 체육복 바람으로 그 형을 따라 교회에 갔다. 교회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기는 이때가 처음이다.

여럿이 나란히 앉을 수 있게 만든 나무 의자에 앉아 있으니 바로 기도가 시작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니 어색할 뿐이다. 다른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면 입만 벙긋거리고, 다른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하면 고개를 따라 숙였다. 항상 반 박자쯤 늦게.

처음 가본 교회, 불쑥 들어온 헌금 자루에 당황

곁눈질로 남들이 하는 행동을 그렇게 흉내 내고 있던 중, 옆에서 허연 자루가 달린 잠자리채 같은 게 불쑥 들어와 내 앞에서 멈췄다. 들어보지도 못했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자루였다. '이게 뭐지?'하며 자루 속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잠자리채가 휙 하고 옆 사람에게로 건너간다. 곁눈질로 보니 옆 사람은 잠자리채 같은 자루에 지폐를 넣었다. 정체불명의 잠자리채에 신경을 쓰고 들어보니 동전을 넣는 소리도 들렸다. 기도가 끝나고 하숙집 형에게 자루의 실체를 물어보니 '헌금 자루'라고 했다. 넣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신경 쓰지 말라하지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기도가 끝나고, 자리를 옮겨서 치러지는 환영회를 겸한 다과회에 참석했지만 남들은 다하는 걸 하지 못한 것 같은 생각에 찝찝한 기분이 떨어지지 않았다. 헌금 자루에 얼마의 돈이라도 넣지 않은 걸 다른 사람들, 특히 처음으로 보는 여학생들이 알고 쩨쩨한 놈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나하는 마음에 내내 불편하기만 했다. 

사전 지식 없이 불쑥 찾아간 부흥회, 아무런 준비 없이 참석했던 예배에서 받은 건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하고 황당하기만 한 기분,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찜찜한 경험이 되었고 교회에 대한 기억이나 경험은 더 이상 없다.

그래도 성경은 한 번 읽어 봤다. 대학을 다닐 때,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이 성경이라는 말을 듣고 도대체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인지가 궁금해 훑어보듯이 읽어 봤다. 이게 필자가 경험한 교회, 필자가 읽은 성경의 전부라서 그런지 교회는 아직도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하기만 하다. 게다가 이따금 맞닥뜨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글귀는 더더욱 날 불편하게 했다.

<복음에 안기다>, 불편하게만 느껴지던 기독교에 대한 편견 걷어줘

<복음에 안기다> 표지
 <복음에 안기다> 표지
ⓒ 새물결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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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처럼 잔재하던 감정, 낯설고 불편하게만 생각되던 교회가 더 이상 낯설지 않고 성큼 가깝게 느껴지게 하는 책을 이번에 읽었다. 웬만한 것쯤 주워 담을 수 있는 50을 넘긴 나이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이 책, 최병성 지음, 새물결플러스 출판의 <복음에 안기다>가 선입견이고 편견일 수도 있는 교회에 대한 필자의 마음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했다.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에서 기쁨과 생기를 잃어버린 것은 우리의 헌신과 열심히 부족하기 때문도, 기도를 게을리하고 말씀을 제대로 보지 않고 교회생활에 열심을 내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 까닭은 아직 하나님의 비밀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안기다> 41쪽-

율법은 우리에게 한없이 요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한없이 주고 또 줍니다. 율법과 복음을 구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값없이 주며 그 선물들을 받아 누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우리에게 지치도록 요구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끝없이 요구하며 그 요구에 다 부응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죄책감을 주고 좌절케 합니다. 복음은 주는데 부요하며 다함없이 주며, 율법은 우리가 절망에 이르도록 끝없이 요구합니다. -<복음에 안기다> 71쪽-

<복음에 안기다>는 엉덩이 들썩거리게 하는 현란한 말솜씨, 두 귀 솔깃하게 하는 속삭임 같은 표현 한 구절 읽을 수 없었지만 진정한 복음이 무엇인가를 깨우쳐준다. 진정한 복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한국교회가 나갈 바이며, 신앙생활의 초석이 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비난하거나 탓하는 말 한마디 보이지 않지만 사회의 지탄이 되고 있는 일부교회의 치부를 부드럽지만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목회자와 기독교인들이 올곧게 나갈 바를 제시하고 있다. 동토의 땅을 헤집고 돋는 새싹처럼 부드럽지만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절실한 표현이다. 새벽기도를 강요하고, 십일조를 꼭 지켜야 한다는 걸 강조하지 않지만 은혜와 복음을 챙길 수 있는 믿음을 툭툭 던지고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노는 만큼 알게 되는 건 여행만이 아니다. 복음도 그렇다.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니 복음의 실체를 알게 되고, 복음의 실체를 알게 되니 삶의 주변이 온통 복음임을 알게 해주니 하루의 생활이 저절로 은혜롭고, 살아가는 나날이 기쁨으로 가득한 행복이다.

조건 없이 주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그저 느끼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게 복음이다. -당진 쇨뫼성지내 모자상-
 조건 없이 주는 어머니의 사랑처럼 그저 느끼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게 복음이다. -당진 쇨뫼성지내 모자상-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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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 중에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엇을 베풀었다는 자만심 없이 베푸는 온전한 자비심을 이르는 말이다. 하나님이 베푸는 은혜야말로 무량, 무주상보시라고 한다.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에 헌신해야만 받는 게 아니고 자격 없는 자에게도 선물처럼 주어지는 게 은혜이며 복음이라고 한다. 그저 느끼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게 복음이니 어찌 낯설고 불편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저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정도의 구호를 외치는 것이나, 기도 말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를 말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 중에 사도 신경을 고백하는 것도 예수님을 믿는 것의 전부는 아닐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왜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셔야만 했고, 하나님이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이뤄주신 일들이 무엇인지 헤아려 아는 것을 포함하며, 이것이 곧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복음에 안기다> 116쪽-

기독교, 또 한명의 예수가 되는 것

불교에서는 깨달으면 모두가 부처라고 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유일신이고 예수 또한 유일하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기독교에서 '내가 예수가 된다'는 얘기를 하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내가 예수가 된다'고 말하는 건 어쩜 예수를 능멸하는 경거망동으로 취급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복음에 안기다>의 저자인 최병성 목사가 말하는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최병성 목사가 말하는 기독교는 '그저 예수를 숭배하며 복과 성공을 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치유해가는 역동성 넘치는 또 한명의 예수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 십자가와 교회건물에 안주하지 않고 4대강 사업의 병폐를 낱낱이 파헤치고 있는 최병성 목사의 나날이야말로 또 한명의 예수가 되어 파헤쳐지고 병들어 가는 4대강을 치유해 가는 역동성 넘치는 생활, 복음에 안기어 복음을 전하는 진정한 전도가 되리라 믿고 믿는다.

덧붙이는 글 | <복음에 안기다>┃지은이 최병성┃펴낸곳 새물결플러스┃2012.12.21┃값 1만 2,500원



복음에 안기다

최병성 지음, 새물결플러스(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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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복음에 안기다, #최병성, #새물결플러스, #복음,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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