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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5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가을을 증언하는 은행잎과 단풍나무들 사이로 거리 곳곳에 걸린 현수막에는 수많은 공약들이 유권자들을 유혹하고 있지만 곧 떨어져 버릴 낙엽처럼 사라질 허망한 선거용 구호가 되진 않을지 유권자들은 곱씹어 봐야 할 시간이다.  누구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는 봄날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보건의료 시민단체 건강세상네트워크에서는 4회에 걸쳐 우리 사회의 품격을 높일 건강과 관련된 이슈들을 점검해 보는 기사를 마련했다.....................  <기자주>

 <사랑의 리퀘스트>
ⓒ kbs

다른 나라에서는 나오기 힘든 TV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 몇 개 있다. 병역이 의무인 나라에서나 가능했던 <우정의 무대>나, 노래를 전 국민적으로 좋아라하는 감성국가에서나 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전국 노래자랑>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사랑의 리퀘스트>류의 프로그램이다. 어려운 이들의 사연에 눈물지으면서 전화기를 들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모으는 모습. 우리와 경제 규모가 비슷하지만 사회 복지 시스템이 잘 발달된 다른 사회에서는 찾기 힘든 풍경이다. 그러나 방송으로 알려지지 않은, 너무나 거대하고 깊은 우리 사회 곳곳의 눈물샘을 닦는 것은 'ARS전화걸기'로는 역부족이다.

국가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소방차가 달려와 화재를 진압했다 해서 돈을 받아 가진 않는다. 도둑이 들어 경찰이 출동했다고 돈을 받아가지도 않는다. 이처럼 사회에 반드시 필요한 서비스는 국민의 세금을 받는 국가가 공익을 위해 돈에 구애받지 않고 행할 의무가 있다.

만약, '영리 소방서'가 도입되었다고 치자. '00소방 주식회사'는 투자한 투자자들의 이윤을 보장해주기 위해 '화재 진압 서비스' 제공시 적잖은 이용료를 받을 수 있는 부유층 밀집 지역에 집중적으로 '지점(소방서)'을 개설할 것이다. 그리고 '화재진압 서비스 선진화' '내 꿈이 이루어지는 서비스' 등 이런저런 포장으로 야금야금 이용료를 올릴 것이다. 안 그래도 가계 빚에 허덕이는 시민들을 향해 그야말로 '불난 집에 부채(負債)질'을 할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의 의료시스템에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영리병원, 의료시스템에 발생한 대형 화재

 지난 10월30일, 보건복지부가 전날 제정·공포한 영리병원에 대한 시행규칙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 건강세상네트워크

지난달 29일, 보건복지부는 경제자유구역 내 영리병원에 대한 시행규칙을 제정·공포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외국의료기관'을 허용한 것이라고 변명하지만 사실상 국내영리병원이다. 이 병원은 국내자본이 50%를 투자하고 운영도 내국인이 할 수 있다. 또한 내국인 환자 진료가 100% 보장된다.

게다가 외국 의료면허소지자는 의료진의 10%일 뿐이다. 90%가 국내의료진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인 중 외국면허를 취득한 사람도 외국면허소지자에 포함된다. 결국 이번 영리병원 허용조치는 국내자본이 외국자본을 들러리 삼아 영리병원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용해주는 조치일 뿐이다.

영리병원은 비영리병원과 비교하여 1인당 의료비가 20%이상 높고, 서비스 질은 떨어진다. 비정규직과 미숙련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 고용효과도 비영리병원에 비해 현저히 적다는 사실이 외국의 비교연구에 의해 잘 알려져 있다. 국책연구기관인 보건사회연구원의 2010년 연구에 의하면 영리병원이 허용되면 의료비 상승효과가 최소 "연 1.5조원(2.5% 인상)"이라고 예측했다. 이에 더해 보건사회연구원은 영리병원이 허용되면 전국의 지방병원 100개가 문을 닫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가뜩이나 심각한 보건의료의 지역불균형이 더욱 심화되는 것이다.

정부는 경제자유구역 내에서만 설립 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당장 병원협회는 해외자본에게만 그리고 특정 지역에만 영리병원을 허용하는 것은 역차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경쟁 환경 조성을 내세우며 국내 다른 지역으로 영리병원을 확대하려는 재앙적 시도의 발화점이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건강보험을 무너뜨려 의료비 상승을 불러오게 되는 영리병원 도입과 같은 정책은 공공의 이익보다 특권적 사익만을 추구하는 의료공급자·의료자본에 정치가 좌우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영리병원 정책의 뿌리가 삼성경제연구소가 정부의 용역을 받아 수행한 영리병원 도입보고서(투자개방형 의료법인 도입 필요성 연구. 2009.12.15)에 있다는 것이 단적인 사례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일본 다이와증권캐피털마켓 60%와 삼성증권, 삼성물산, KT&G 등 국내 기업 40% 지분으로 참여한 '인천송도국제병원(ISIH)' 컨소시엄을 우선투자협상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의료 공공성 강화, 영리에 망가진 사회의 치료제

 지난 10월30일, 보건복지부 앞에서 영리병원 시행규칙 공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은 임채민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국민건강 포기상' '국민건강보험 파탄상' '삼성 장학생상'을 수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모습.
ⓒ 건강세상네트워크

돈은 국민이 내지만 보건의료정책은 공급자 이해단체들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현실을 바꾸고 공공성을 높여야 한다. 그러려면, 국민이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심사할 수 있는 '국민건강위원회'와 같은 기구가 필요하다.

영국은 국가가 보건의료의 공급을 책임지는 국가보건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 이하 NHS) 체계를 채택하고 있다. 2002년에는 NHS 산하기관인 National Institute for Health and Clinical Excellence(이하 NICE)에서 시민위원회(citizen council)를 소집했다. 이것이 시민 참여를 위한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이 위원회는 중요한 자원배분이슈와 가치 우선 순위에 대해 논의하고 시민의 관점을 제시하기 위해 구성된 기구이다. 일정한 임기를 보장받은 시민위원들이 보건 분야 자원배분과 관련해 심도 있는 토론을 진행한다. 그 결과가 NICE의 의사결정에 공식적으로 반영되는 구조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난 9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와 관련된 국민들의 의사를 파악하기 위해 처음으로 국민참여위원회를 열었다. 이곳에서 이틀 동안 시민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특권적 세력의 이해를 넘어서려는 이런 시도를 통해서만 의술보다 상술에 밝은 우리 의료에 대한 수술이 가능해 진다.

더불어, 우리나라는 공공의료기관이 병원 수 기준으로 전체 병원의 7.3% (병원협회 2010년 기준 자료)에 불과하기 때문에 민간병원의 의료 상업화 흐름에 국가 보건 정책이 더욱 휘둘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소방서가 보편적 국민 안위를 위해 존재하듯 국민의 보편적 의료 서비스를 가능케 할 공공병원 확대도 필수적이다.

여기에는 공공의료시설 확충뿐만 아니라 공공인력(공무원)의 확대가 뒤따라야 완전할 수 있다. 확충된 공공의료시설과 인프라를 누가 운용할 것인가의 문제도 '공공성'의 문제이다. 기존에 찔끔찔끔 늘린 사회복지예산도 문제가 있었지만, 공공인력은 늘리지 않고 돈만 민간에 지원하는 민간위탁방식의 운영은 많은 폐단과 비효율을 낳아왔다.

그러니 복지예산은 늘어도 사회복지에 대한 체감수준은 여전히 낮은 악순환이 계속된 것이다. 적어도 '공공성'의 영역에서만은 민간이 효율적이라는 미신은 맞지 않다. 공공인력을 확충하여 정부의 책임성도 높이고 정책추진의 일관성도 높여야 한다. 무엇보다 질 좋은 일자리는 '공공성 확충'과 한 쌍이다.

현재의 정책 기조인 '작은 정부'로는 '작은 복지'만이 가능할 뿐이다. 예산이 부족하다면 현재 운영 중인 민영의료기관들 중에 공적 기능을 보완하고 있는 종교단체의 자선병원 등과 같은 의료기관을 지역 거점 공공병원으로 지정해서 권한을 부여하는 방법도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하면 성자라 하면서, 가난을 낳는 구조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 빨갱이라고 한다"(Dom Hélder Pessoa Câmara 대주교)는 말이 있다. '보편적 복지' '민주적 경제'를 이야기하면 사상을 의심 받다가도 요즘 대선 후보들이 경쟁하듯 내던지는 공약을 보면 원래 보여주던 정치적 성향을 떠나 모두 '빨갱이'가 된 듯 하다. 이런 현상은 그만큼 '공공성'이 우리 사회에 절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아닐까?

우리 사회를 위한 '공공의료의 리퀘스트(요청)'가 대선 주자들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태그:#영리병원, #공공의료, #건강세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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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세상네트워크는 시민과 함께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건강권 시민운동단체입니다. '건강'은 모든 사람이 누려야 할 기본적 권리임을 선언하며 2003년 4월 출범했습니다. www.konkang21.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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