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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능진은 1948년 5월 10일 초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질 당시 이승만과 동대문 갑구에서 맞대결을 벌였습니다.
▲ 최능진 최능진은 1948년 5월 10일 초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질 당시 이승만과 동대문 갑구에서 맞대결을 벌였습니다.
ⓒ 주철희 역사학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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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오후 7시, <여수넷통>에서 준비한 '커피와 인문학' 강좌가 열렸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 강의입니다. 강의는 지난주에 이어 주철희 역사학자가 맡았습니다. 소제목은 '주홍글씨의 서막'입니다. 주홍글씨라는 말은 1850년 초판된 N.호슨이 쓴 소설 제목입니다.

이 소설은 17세기 미국 청교도 사회를 그린 작품이죠. 17세기 미국사회는 간음(Adultery)한 여자에게 간음이라는 영어 알파벳 첫 글자인 'A'를 가슴에 달고 다니도록 했습니다. 이 표시는 수치의 상징이자 한 인간을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시키고자 하는 잔인한 수단이었습니다.

주홍글씨와 비슷한 일이 우리나라에도 있었죠. 조선시대에 '경(黥)'이라는 형벌이 있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행해졌던 형벌과 비슷한데 얼굴이나 팔뚝의 살을 따고 흠을 내 먹물로 죄명을 찍어 넣는 형벌입니다. 한 인간을 영원히 죄인으로 묶어두는 방법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영조 때까지 행해졌으리라 추측되는 이런 제도는 그 후 사라졌지만 한국현대사에 또 다시 기형적인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번에는 팔뚝과 얼굴에 글씨를 새기지는 않지만 사회가 개인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 넣는 '빨갱이'라는 단어입니다. 강사는 참석한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더군요.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반대한다는 내용을 기록한 당시 신문기사입니다.
▲ 반민특위 반대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반대한다는 내용을 기록한 당시 신문기사입니다.
ⓒ 주철희 역사학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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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받은 형벌입니다. 특이하게도 최고 책임자 서세중은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무죄를 받았다네요.
▲ 혁명의용군 사건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받은 형벌입니다. 특이하게도 최고 책임자 서세중은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무죄를 받았다네요.
ⓒ 주철희 역사학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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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폭력에 맞선 '최능진'의 아들이 정수장학회 이사장?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발생 20일전 '혁명의용군'이 터졌다. 국가는 5월 10일 초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질 당시 이승만과 동대문 갑구에서 맞대결을 벌인 최능진을 '혁명의용군' 사건의 책임자라고 발표했다. 이 사건은 이승만과 국가가 최능진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려 조작한 최초의 국가폭력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의 이러한 국가폭력은 박정희 시대로 그대로 전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야산에서 최능진을 처형했는데 죽음을 앞두고 그가 쓴 유서를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는 듯하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최씨가 오남매와 아내에게 쓴 유서를 보면 '필립'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가 요즘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오른 박근혜 후보와 관련된 정수장학회 이사장인 최필립이기 때문이다"고 말했습니다.

덧붙여 "국가폭력을 마음껏 휘두른 이승만에 의해 아버지가 죽었는데 그 아들이 국가폭력의 대를 이은 박정희 딸과 손잡고 있으니 역사는 참 짓궂다"고 꼬집었습니다. 또 그는 강의에서 "여순사건 이후 전남동부지역은 피바람이 불었는데 대학살의 정당성을 '빨갱이 처단'에 두었다"고 말했습니다.

더 기가 막힌 일은 '최능진'과 '오동기'는 일제강점기시절에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른 독립투사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지금도 독립유공자로 지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누구를 탓해야 할까요? 그래서 강사는 '나쁜 국가 착한 국민'이라는 제목으로 이번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강의를 계속 들었습니다. 그는 "여순사건 이후부터 현재까지 '빨갱이'라는 말은 주홍글씨처럼 새겨져 많은 사람들 가슴을 아프게 했고 지금도 그 상처는 이어져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한번 새겨진 '빨갱이'라는 주홍글씨가 얼마나 질기게 사람을 따라 다니는지 몇 곡의 노래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 의견이 안 맞으면 따지고 살지'

부용산

작곡 안성현 / 작사 박기동

부용산 오리 길에 /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 밭 사이 사이로 / 회오리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주철희 역사학자는 강의에서 '빨갱이로 낙인 된' 오래전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첫 곡은 '부용산'이라는 노래였습니다. 강사가 전해준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쓴 사람은 박기동이라는 인물이다, 여수시 돌산읍 둔전리에서 태어나 벌교에서 살았는데 자신의 여동생이 자식도 없이 스물네 살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죽자 부용산에 동생을 묻고 내려오면서 한편의 시를 썼다"고 말했습니다. 시는 노래가 되었고 사람들 사이에 불렸다고 합니다.

이어, 그는 "가사 어디를 찾아봐도 빨갱이를 찬양하고 국가를 전복하려는 내용이 없는데 여순사건 이후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이 노래를 불렀고 노래를 작곡한 안성현이 월북하면서 박기동의 인생은 고문과 감시와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단지 동생을 그리워하며 쓴 시 한편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긋나게 했군요.

강사가 두 번째로 들려준 곡은 '여수야화'라는 노래였습니다. 얼핏 들으면 요즘 한창 뜨는 '여수밤바다'와 비슷한 서정적 제목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총 3절로 만들어진 노래인데 마지막 절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내용이 나옵니다.

'왜놈이 물러갈 땐 조용하더니/오늘에 식구끼리 싸움은 왜 하나요/의견이 안 맞으면 따지고 살지/우리 집 태운 사람 얼굴 좀 보자'(작사 : 김초향, 작곡 : 이봉룡, 노래 : 남인수)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했습니다.
▲ 여수야화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발생했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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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 제사는 지내야 하니 네가 대신 죽어라

짐작하셨겠지만 당시 유명한 가수였던 남인수씨가 노래를 불렀습니다. 강사의 말을 들으니 이 노래는 "몇몇 곡과 함께 묶여 정식앨범으로 만들어져 판매되었는데 이승만 정권은 자신이 벌인 폭력을 숨기기 위해 이 곡이 담긴 레코드를 판매금지 시켰다. 당시에는 레코드를 판매 금지할 법조차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기사를 보면 "가사에 있어 불순할 뿐만 아니라 민심에 악영향을 초래할 우려가 있어서 판매금지 시킨다"고 되어 있습니다. 1948년 10월, 여수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진솔하게 노래했지만 이승만 정권의 입맛에는 맞지 않는 노래였던 거죠. 강사는 "음반을 판매 금지할 법은 없지만 국가의 권력은 곳곳에서 정권의 편의에 따라 적용되면서 국민을 통제하고 압제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때문에 '여수야화'는 본의 아니게 한국 최초의 금지곡이 되는 영광(?)을 얻었답니다. 그러면서 우리지역의 이야기를 한 편 들려주었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삼촌때문에 부모가 억울하게 죽은 한 사람을 소개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지만 "그의 삼촌은 여수 제14연대 하사관으로 지리산에 입산했다"고 합니다.

또, "그 삼촌 때문에 본인은 평생을 빨갱이라는 연좌제에 묶여 손가락질과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고 전해줍니다. 그리고 "그는 자식을 낳아 전라도 땅에서 키우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 자식들마저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게 위해서 말이죠. 이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멍해졌습니다. 이것이 21세기의 대한민국의 현실인가요?

산동애가

백순례

잘 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산수유 꽃잎마다 설운 정을 맺어놓고
회오리 찬바람에 부모 효성 다 못하고
갈 길마다 눈물 지며 꽃처럼 떨어져서
노고단 골짝에서 이름 없이 스러졌네

마지막으로 강사는 '산동애가'라는 애절한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노래는 '백순례'라는 열아홉 처녀가 불렀다고 합니다. 전남 구례군 산동면은 봄이면 산수유 꽃피는 마을로 유명하죠. 하지만 이 아름다운 마을에는 비극적인 사연이 숨어있습니다.

산동마을은 이승만 정권이 여순사건 이후 좌익세력에 동조한 사람들을 찾던 중 유일하게 좌익세력 명부가 발견된 곳이랍니다. 때문에 이 마을사람들 많이도 죽었답니다. 이곳에 백순례라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위로 세 명의 오빠가 있었다지요. 오순도순 다정했던 가정은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큰오빠는 징용에 끌려가 죽고 둘째 오빠는 여순사건이 터지기 전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마지막 남은 막내 오빠조차 여순사건에 얽혀 죽을 처지가 됐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이 되자 백순례의 어머니는 "조상에게 제사는 지내야 하지 않겠냐"며 "열아홉 처녀에게 오빠를 대신해서 죽어라"고 부탁했답니다.

주철희 역사학자가 '부용산'을 작사한 박기동과 작곡자 안성현의 부인 성동월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강의 주철희 역사학자가 '부용산'을 작사한 박기동과 작곡자 안성현의 부인 성동월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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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 미국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하는 주철희 역사학자
▲ 이승만과 미국 이승만과 미국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하는 주철희 역사학자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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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후 7시, <여수넷통>에서 '커피와 인문학'이라는 강의가 열렸습니다. 소제목은 '주홍글씨의 서막'이었습니다.
▲ 커피와 인문학 20일 오후 7시, <여수넷통>에서 '커피와 인문학'이라는 강의가 열렸습니다. 소제목은 '주홍글씨의 서막'이었습니다.
ⓒ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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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필요한 시기, 민중들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기막힌 사정을 아는 터라 거절도 못하고 죽으러 떠나면서 열아홉의 처녀가 노래를 불렀다고 합니다. 강사의 말을 들으니 "당시 전남동부지역에서는 대살(타인을 대신해서 죽는 일)이 광범위하게 벌어졌다"고 합니다. 이어 강사는 "산동을 비롯한 전남동부지역의 대학살 이후 지금도 누가, 어떻게,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 입을 여는 이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는 아직도 유효한 형벌인 가봅니다. 12월 대선에 또 어떠한 '빨갱이'가 등장할지 걱정입니다. 끝으로 강사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경제를 살렸다"는 말도 설득력이 떨어진답니다. 왜냐하면, 1957년이면 "휴전협정이 조인된 1953년보다 세수가 무려 9배 신장했다"는 건데요 당시 미국 신문(Newsweek, 1959년 8월 3일자)에 표현된 자료를 근거로 내놓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시대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영웅을 찾는데 이는 올바르지 못한 일"이라며 "영웅을 필요로 하는 시기는 민중들에게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고 단정했습니다. 올해 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영웅을 찾아야 할까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인문학 강의였습니다.

마지막 글은 브레히트(Brecht, Bertolt)가 <갈릴레오의 생애>에서 던진 말입니다.

'영웅을 필요로 하는 불행한 이 나라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혁명의용군사건, #여순사건, #최능진, #최필립, #정수장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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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 커가는 모습이 신기합니다. 애들 자라는 모습 사진에 담아 기사를 씁니다. 훗날 아이들에게 딴소리 듣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세 아들,아빠와 함께 보냈던 즐거운(?) 시간을 기억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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