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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산바'의 피해로 땅에 떨어진 밤송이를 까서 얻은 밤
▲ 덜 여문 밤 태풍 '산바'의 피해로 땅에 떨어진 밤송이를 까서 얻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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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식탁에 덜 여문 밤이 올랐다. 태풍 '산바'가 휩쓸고 간 자리에 떨어진 밤송이를 까 얻은 것들이다. 추석 즈음에 수확할 것들이라 아쉬움이 크다. 올해는 적은 양의 수확도 기대할 수 없을 것 같다.

'산바'가 강원도 쪽으로 빠져나가면서 강풍과 폭우가 누그러지자, 갇혀 지내던 방안에서 태풍 피해를 점검하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이제 밤나무에는 더 이상 밤송이가 보이지 않는다. 불과 20여 일 전, 15호 태풍 '볼라벤'이 여물지도 않은 밤송이를 쓸어 갈 때도 이렇게까지 허탈하지는 않았다. 부러진 가지 사이로 간혹 한두 개씩 살아남은 밤송이를 보면서 위로를 받았고, 남겨진 밤송이들은 통통한 알밤이 돼 풍요의 가을을 장식할 것이라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에는 은퇴 후 삶의 교두보가 될 집을 짓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난 1월에 통나무를 구입하고, 2월부터 통나무를 치목했다. 집을 설계하기 위해 보령의 한 모텔에서 2개월 가량을 보냈고, 4월부터 집 조립을 시작했다. 그리고 5월부터는 30년이 넘게 다니던 직장을 퇴사하고 본격적으로 집 짓는 일에 매달렸다. 집을 짓는 데 나와 내 아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손수 했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 가령 지붕을 만들고 씌우는 과정, 전기 공사, 설비 공사 등은 전문가들의 손을 빌렸다.

우리가 살게 될 집은 건물이 두 동이다. 연면적이 90여 평이라 그런지 착공 후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완공하지 못하고 있다. 추석 전에는 입주해야 할 것 같아 우선 본채 완성을 목표로 매일매일 빠듯하게 움직이고 있다. 오전 7시가 되면 일손을 돕는 동네 목수가 온다. 나는 그가 오기 전에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기다려야 한다. 오후 6시 반이 돼 하루 일정이 끝나면, 작업 현장을 정리하고 다음날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자재를 점검해야 한다. 집을 짓는 일은 참으로 보람차고 즐거운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너무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집 지으랴, 밤나무 키우랴... 바쁘다 바빠

은퇴 후 삶의 대부분을 보낼 집
▲ 시랑헌 본 집 은퇴 후 삶의 대부분을 보낼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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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나무 관리는 이런 일정 사이사이에 해야 한다. 시랑헌에는 밤나무가 100여 주 정도 있다. 가을에 수확하고 수매해 수입을 내려면 많은 품이 들어간다. 농사일에 능숙하지 않은 우리는 지인들과 나누고, 우리가 먹을 정도만 수확하는 걸 목표로 삼고 꼭 필요한 품만 들였다.

겨울에는 죽은 가지들을 쳐내고 밑거름을 한다. 밑거름은 가축 분뇨를 발효시킨 퇴비다. 봄에는 새싹이 나기 전인 3월 말부터 4월 초순 사이에 퇴비를 준다. 여름에 수정이 끝나고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추가로 시비한다. 퇴비를 주는 일은 노동력이 부족한 우리에게 힘겨운 일 중 하나다.

우리 밤밭은 경사가 심한지라 수레를 이용할 수 없어 지게에 퇴비를 지고 올라가 한 그루에 한 포의 퇴비를 준다. 밤나무 밑까지 퇴비를 나르는 일은 내 몫이고, 포대를 터서 밤나무 밑이 퇴비를 뿌리는 일은 내 아내의 몫이다. 2~3일에 걸쳐 퇴비를 주는 일을 마치고 나면 나도, 집사람도 녹초가 된다.

5월이 지나고 6월이 되면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다. 밤 수확은 밤송이가 벌어져 떨어진 밤톨을 줍는 것. 풀이 무성하게 우거지면 떨어진 밤톨을 찾기 힘들다. 최소한 두 차례 풀을 베야 밤톨을 주울 수 있다. 밤밭에는 굵은 돌이 많다. 양날 예초기로 바닥까지 말끔하게 벌초를 하면 예초기 날이 돌을 치기 십상이고, 튀는 날과 돌은 작업을 하는 이에게 매우 위험하다. 땅 위 20cm 정도의 높이까지는 양날 예초기로 벌초를 하고 지면까지는 줄 예초기로 작업을 한다. 예초기 작업은 힘들고, 어렵고, 위험하다.

밤송이가 커지기 시작하는 7월부터는 농약을 살포하는 대신 방충등을 켜야 한다. 밤밭에 설치한 일곱 개의 방충등은 해가 지는 오후 9시께부터 다음날 오전 5시까지 켜놓는다. 방충들 설치는 상당한 경비가 소요된다. 사용하는 전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경제성을 고려했을 때, 방충등을 돌리는 것이 전체 수익을 감소시키지는 않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심하게 입은 피해, 어디 항의할 데도 없고...

태풍'산바'의 밤 밭 피해
▲ 밤송이 태풍'산바'의 밤 밭 피해
ⓒ 정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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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꿈은 퇴직 후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의 성공적인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일찍부터 이를 준비했다. 지난 2006년, 지금 집을 짓고 있는 시랑헌 터를 구입했다. 당시 5년 정도를 기본환경 구축 기간으로 잡았다. 실패와 성공 사례 모두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 우리 집터를 할퀴고 지나간 태풍 '산바'가 남긴 피해는 금전적인 손해보다 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고구마는 멧돼지에게 털리고, 밤은 태풍에게 상납했다. 아무리 악덕지주라도 수확량의 절반을 넘지 않은 범위 내에서 소작료를 거둔다. 소작농들은 소득 분배가 불합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시위를 해서라도 자신들의 지분을 확보한다. 하지만, 수확량의 거의 전부를 빼앗기고도 시위를 할 수 없다. 멧돼지나 태풍을 상대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자연과 더불어 살다보니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속담이다. 환경 파괴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재해, 그 재해에 대한 피해는 언제나 약하기만 한 농민들부터 입는다는 사실이 서러울 뿐이다.


태그:#밤, #태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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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덕연구단지에 30년 동안 근무 후 은퇴하여 지리산골로 귀농한 전직 연구원입니다. 귀촌을 위해 은퇴시기를 중심으로 10년 전부터 준비했고, 은퇴하고 귀촌하여 2020년까지 귀촌생활의 정착을 위해 산전수전과 같이 딩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0년 동안은 귀촌생활의 의미를 객관적인 견지에서 바라보며 그 느낌을 공유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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