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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폭염과의 전쟁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도 또 하루 더위와 싸울 생각에 절로 비장한 각오가 생겨난다. 이렇게 무더운 날씨에도 어김없이 사람들은 산으로 바다로 피서 행렬을 이어간다.

자동차가 자전거보다 흔한 세상에, 전국의 고속도로가 5000킬로미터를 넘어 선 시대에 기름 넣고 시동 걸면 못 갈 곳이 없는 세상이다. 사상 최악의 불경기니 경제 불안이니 떠들어도 고속도로 곳곳이 밀리고 피서지마다 사람들은 넘실거리고 있다.

농한기에 접어 든 농촌이지만 밭작물과 무성한 풀들이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개, 고양이, 닭 등의 먹이를 챙겨주는 일 때문에 오랫동안 집을 비우기도 쉽지 않다.

그러던 차 얼마 전 아내와 초등 2학년 막내딸과 함께 1박2일의 여름 여행을 다녀왔다. 비용도 그렇고 푹푹 찌는 더위에 길을 나선다는 일이 사실 선뜻 내키지 않았다. 머뭇거리던 내게 막내딸은 한방의 결정타를 먹였다.

유달리 공룡을 좋아하던 막내는 올봄부터 공룡박물관엘 가자고 성화였고, 얼떨결에 나는 그러마하고 약속을 했다. 막내는 손님들에게 용돈을 받을 때마다 돼지저금통에 집어넣었고, 저금통 무게만큼 공룡박물관 꿈도 무럭무럭 키웠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기도 전에 막내는 "언제 공룡박물관에 갈 거야?"라며 확답을 재촉했고, 나는 슬며시 "이 더운 날씨에 꼭 가야겠니?"하며 막내의 반응을 떠 보는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박물관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아이에게 물었다.

"성결아, 너 공룡 박물관 갈 생각이 별로 없나 보다."
"아빠, 또 안 갈 거잖아?"
"뭐? 언제 아빠가 그렇게 약속을 안 지켰냐?" (약간 흥분한 목소리로)
"아빠, 자주 그러잖아."
"음, 끙........"

이미 아빠의 의중을 파악한 아이는 '또 약속 안 지키는 아빠'라는 최후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과거에 약속을 지켰니 안 지켰니 따지기 전에 이번 여행 약속은 무조건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막내딸에게 불신의 벽을 더 이상 키웠다간 큰일 나겠다 싶었다.

"내일 당장 떠난다. 준비하자."

막내딸 성결이의 얼굴이 활짝 펴진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었다.

고성의 공룡박물관이 월요일 휴관함에 따라 첫 날은 통영을 여행하고 다음날 고성으로 올라가면서 공룡박물관을 관람한다는 큰 틀의 계획을 세우고 짐을 꾸렸다.

월요일 새벽, 들뜬 마음으로 길을 나선 우리 세 식구는 3시간도 채 안 돼 '동양의 나폴리'라불리는 통영 땅에 들어섰다.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에 바다가 보이는 통영의 아침 역시 무더운 날씨로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는 막내딸이 한마디 던진다.

"정말 모처럼 이런 데 와보네."

말투가 조금 애들 같지 않아 끼어들었다.

"뭐가 또 모처럼 이니?"
"그렇잖아, 지난해에 언니네 모임 가고 처음이잖아."
"?!!"

그랬다. 아이들의 기억은 확실히 빠르고 정확했다. 지난해 여름 인천 장봉도에서 풀무를 졸업한 큰 딸 동기 학부모모임을 했고, 막내도 함께 간 기억을 되살린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해저터널로 들어서는 아내와 막내딸.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해저터널로 들어서는 아내와 막내딸.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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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 일제가 시공하는 해저터널 당시 기록 사진.
 80년 전 일제가 시공하는 해저터널 당시 기록 사진.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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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발걸음은 해저터널,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만든 동양 최초의 해저터널은 450미터의 평범한 터널 같아보였지만 터널 안에 전시된 시공 당시의 기록사진을 보노라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야~ 어떻게 공법도 빈약한 시절에 이렇게 바다를 막고 터널을 만들 수 있었을까? 아무튼 일본인들 기술 하나는 우리가 인정해야 돼."

만든 지 몇십 년도 안 돼 흔들리고 붕괴되는 우리나라 건축물과 비교를 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여름 휴가철이라 그런지 터널 안엔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띄었다.

동피랑 마을의 벽화앞에서 아빠와 막내딸 성결이.
 동피랑 마을의 벽화앞에서 아빠와 막내딸 성결이.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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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구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동피랑 마을로 들어섰다. 철거를 반대해 전국의 예술가들이 모여 마을 벽 전체를 그림으로 장식해 관광명소가 돼버린 곳, 예술의 도시 통영이니 가능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관광객들도 찌는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 벽화 앞에서 연신 사진을 찍었고, 막내도 그림이 신기한지 소리를 지르며 벽화를 구경했다.

포구에 정박 중인 거북선을 보더니 막내는 탄성을 지르며 뛰어갔다. 사진을 찍어 달라며 자세를 취하고 거북선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말로만 듣던 거북선 내부를 둘러보았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 잠시 설명을 듣던 막내는 이내 따분한지 구경에만 집중했다.

포구에 정박 중인 거북선 앞에서 기쁨으로 자세를 취하는 막내딸.
 포구에 정박 중인 거북선 앞에서 기쁨으로 자세를 취하는 막내딸.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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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가장 기대하며 달려간 통영의 명물(?) 케이블카는 아뿔싸, 월요일은 휴무였다. 제대로 정보를 확인하지 못한 아둔함에 혀를 차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간단히 점심을 때운 후 우리는 충무공 이순진 장군의 유적지인 한산도로 가기 위해 유람선을 탔다. 교과서에서만 듣고 배운 한산대첩, 이순신 장군의 고뇌가 담긴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중략)".

수루가 있는 제승당 가는 길은 1킬로가 넘었다. 뱃시간에 맞추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아내가 힘이 드는지 한마디 한다.

"휴~ 이러니 여행도 젊어서 해야 하는 거야."
"그럼 늙으면 여행도 못해."
"나중에 자식들이 어디 가자고 하면 겁날 것 같아"
"별 걱정을 다하네~~"

제승당 수루에 앉아 바라 본 한산도 앞바다.
 제승당 수루에 앉아 바라 본 한산도 앞바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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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수루에 직접 앉아 멀리 통영항과 한산도 앞바다를 바라보니 450년 전 풍전등화같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인 장군의 결기와 그 와중에도 당파 싸움에 골몰하면서 장군을 죽이기 위해 모함하던 조선의 역사가 우울하게 떠올랐다. 이 모든 흐름을 알고 마지막 전투에서 자살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장군의 최후를 생각하니 잠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다시 육지로 나온 우리 가족은 박경리 기념관으로 차를 몰았고 이때부터 막내딸의 기분은 짜증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내일 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괜히 공룡 박물관엔 언제 가냐고 투덜거렸다. 아이들 기분 전환엔 아이스크림이 최고였지만 가게 찾기가 쉽질 않았다.

박경리 기념관 앞에서 세식구가 기념으로 찍었는데 막내딸의 포즈는 변함이 없다.
 박경리 기념관 앞에서 세식구가 기념으로 찍었는데 막내딸의 포즈는 변함이 없다.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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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내에서 꽤 떨어진 한적한 곳에 자리 잡은 박경리 기념관과 묘소는 찾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이 운명이었던 한 문인의 혼이 살아 숨 쉬는 기념관에서 농부가 흙에서 생명을 키우는 일과 원고지 위에 인류문화의 꽃을 피워 낸 인간의 힘이 교차되었다.

다음은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기념관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통영 거리를 다녀 봐도 기념관을 알려주는 표지판 하나 찾기가 힘들었다. 관광지도에 나타난 기념관을 헤매다 겨우 찾아간 윤이상 기념관, 찌는 한낮이라 그런지 기념관 내에는 방문객이 없었다.

2층의 기념관에는 그가 살았던 기록과 유품 등이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박정희 독재시절 동백림 사건으로 참담한 고난을 겪은 음악가에게 분단은 그의 삶과 예술의 뿌리가 되었다. 독일이 국교 단절이라는 강수를 내놓으면서까지 구하려 했던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이었다. 조금만 유명세를 타도 지역의 인물이라고 홍보를 하며 축제 등의 행사를 통해 문화자산으로 키우는 데 예산을 아끼지 않는 요즘 시대다. 위대한 세계적인 예술가가 이념이라는 굴레에 갖혀 아직도 통영이라는 반도의 남쪽 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윤이상 기념관 사진 앞에서 막내딸이 기념으로 사진 한장 찍었다. 나중에 커서 윤이상이란 위대한 음악가를 만났다는 기록을 위하여...
 윤이상 기념관 사진 앞에서 막내딸이 기념으로 사진 한장 찍었다. 나중에 커서 윤이상이란 위대한 음악가를 만났다는 기록을 위하여...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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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책을 한 권 사면서 직원에게 물어 보았다.

"어떻게 거리에 윤이상 기념관을 알리는 표지판이 하나 없죠?"
"(웃으며).........."
"통영시에서 기념관 만들고 운영하는 거 맞죠?"
"네, 시에서 만들고 저희가 위탁 운영하고 있어요."
"혹시 색깔 이런 것 때문에 그런 건가요?"
"사실 기념관 이름도 아직은 공식적으로 도립테마공원입니다."
"아? 네!......."

그랬다. 통영시도 노력하고 있지만 올 들어 불거진 '통영의 딸' 사건 등으로 인해 윤이상이라는 세 글자는 또 다시 분단과 이념이라는 질곡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이 무더위 속에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임란 후 이순신 장군의 공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객사인 세병관엘 들러 잠시 휴식을 취했다. 막내는 그 틈에 수첩에다 이런 저런 그림을 그린 후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여행 중 사물을 그린다는 모습이 매우 기특해 보였다.

다시 남망산 조각공원을 답사 한 후 해질녘 포구의 통영 시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흔하디흔한 충무김밥의 본고장에서 2인분을 시켜 먹으니 역시 맛이 다르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 활어시장에 들어서니 살아 있는 생선처럼 시장의 활기가 느껴졌다. 양식보다는 자연산이 주로 많다 보니 몸집이 작은 어종들이 광주리마다 가득하다.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전복과 자리돔을 시켜 오랜만에 회로 입맛을 돋우니 막내 덕(?)에 통영이라는 아름다운 바닷가에 온 기분이 고조되었다.

통영 활어시장에서 만난 자연산 활어.
 통영 활어시장에서 만난 자연산 활어.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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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찜질방에서 통영의 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아내와 막내딸은 잠시 실랑이를 벌려야 했다. 밤에 잠을 설쳐 몸도 상당히 무거운 상태였다. 고성의 공룡박물관에 마음이 다 가있는 막내는 케이블카 타고 가자는 아내의 제안에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반대를 했다. 결국 아직 시간이 충분하다고 살살 달랜 후 케이블카로 향했다.

전날 휴무라 그런지 아침부터 케이블카를 타려는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높은 곳으로 오른다는 설레임과 약간의 공포심이 어우러져 잠시 굳은 표정은 곧 이어 눈앞에 펼쳐진 한려수도의 장관 앞에 탄성으로 바뀌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다던 막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경지를 구경하기에 바쁘기만 했다.

케이블카 정상에서 바라 본 통영 앞바다의 아름다운 풍경.
 케이블카 정상에서 바라 본 통영 앞바다의 아름다운 풍경.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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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자 통영아'를 속으로 읊조리며 이제 마지막 일정, 올라가는 길에 고성의 공룡박물관은 막내를 한없이 들뜨게 했다.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린 여행이었을까? 네비게이션 없는 탓에 한 차례 헛수고 끝에 도착한 공룡박물관은, 과연 공룡의 고장답게 전망 좋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기암절벽 등 고성 바닷가 절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막내는 환호를 지르며 공룡 앞에서 연신 사진을 찍고 그토록 기다렸던 공룡박물관 관람을 할 수 있었다.

공룡 발자국이 있는 상족암 구경은 지독한 폭염으로 포기해야 했다. 이 더위에 걸어서 관광을 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체력이 아니면 엄두 내기가 힘들었다. 그늘에서의 휴식이 필요했다.

고대하던 공룡박물관 공룡앞에서 기념으로 사진 찍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사진촬영은 허락을 받으라고...
 고대하던 공룡박물관 공룡앞에서 기념으로 사진 찍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사진촬영은 허락을 받으라고...
ⓒ 이종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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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올해 세계공룡엑스포가 열린 당항포로 향했으나 시간 관계상 앞에만 갔다가 늦은 점심을 먹고 곧바로 귀가 길에 올라야 했다. 막내의 투정을 뒤로 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 후 막내의 모습이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우선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고 배운 것인지 대화 수준(?)도 높아진 것 같았다. 급작스런 출발과 사전 정보의 부족, 지독한 무더위로 아쉬움도 많았지만 여행은 우리 식구 모두에게 기쁨을 주었다.

아내도 잠시 산골에서의 일상에서 벗어남 자체에 만족했고, 나 역시 막내딸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만족했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남이자 고생의 시작일 수도 있다. 특히 이렇게 무더운 여름에는... 그러나  그 고생이 다시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다면  여행은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그렇기에 다시 달력을 찬찬히 살펴본다. 언제 다시 또 훌쩍 떠날 수 있는 날이 있는가를.....


태그:#통영, #고성, #공룡박물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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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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