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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 자리를 내놓고 팔도를 유람하던 양녕대군이 묘향산 암자에 묵을 때 스님의 간청에 써준 시. 동국시선에 수록된 시를 돌에 옮겨 새겼다. 지덕사에 있다
▲ 양녕대군 시 세자 자리를 내놓고 팔도를 유람하던 양녕대군이 묘향산 암자에 묵을 때 스님의 간청에 써준 시. 동국시선에 수록된 시를 돌에 옮겨 새겼다. 지덕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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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동모(同母) 형제는 넷이다. 그 중 넷째 성녕대군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요절했고 세종은 세상을 떠났다. 왕위. 그 자리가 그렇게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정신적으로 혹사당하고 육체적으로 과로에 시달린다. 뿐만 아니다. 밤이면 밤대로 즐기는 게 아니라 종사를 위하여 헌신해야 한다. 세종은 공식적인 부인만 6명이고 슬하에 18남 4녀를 두었다.

세종이 떠난 현재 두 사람이 살아있다. 생존해 있는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죄인이다. 그 죄가 역적질을 해서 죄도 아니고 사람을 죽여서 죄도 아니다. 장남으로 태어나 왕위에 오르지 못한 죄다. 그 죄 값으로 유배당하여 귀양살이도 했다. 유배가 풀리긴 했지만 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태종에서 비롯된 왕통이 세종과 그 후손으로 흐르는 한 그는 역설의 방계다. 그는 항상 뒷전에 밀려나 있거나 2선에서 서성였다. 때문에 왕실의 어른 역할은 효령대군 몫이다.

효령대군 저택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송현수의 딸을 간택하여 왕비로 모셔온 공을 위로하는 자축연이다. 이어 문종의 후궁 양씨가 낳은 경숙옹주의 혼례가 이루어졌다. 반성위 강자순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잔치의 연속이다.

경회루
▲ 경복궁 경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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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이 4공신을 거느리고 경회루에서 풍정을 올렸다. 양녕대군 이제, 효령대군 이보, 임영대군 이구, 금성대군 이유, 영응대군 이염, 익녕군 이치, 화의군 이영, 계양군 이증, 의창군 이공, 한남군 이어, 밀성군 이침, 왕비의 아버지 여량군 송현수, 도승지 신숙주, 좌승지 박팽년, 우승지 박원형, 좌부승지 권자신, 동부승지 구치관, 우의정 한확, 우부승지 권남, 병조참의 양정, 지병조사 이예장이 참석했다.

고관대작들은 잔치로 밤을 새웠다. 이들의 잔치는 보릿고개를 넘기며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던 백성들에겐 딴 나라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배고픔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안 들은 척, 입이 있어도 입을 꾹 닫고 살아야 하는 강요된 침묵이었다.

민심이 흉흉했다. '나라에서 안평대군 별장 담당정 근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은 모두 철거한다'는 괴소문이 떠돌았다. 주민들은 동요했고 백성들의 원성은 대궐을 향했다. 바짝 긴장한 의금부가 소문의 진원지를 추적했다. 박수생과 이징량의 딸 이심방이 용의 선상에 올랐다. 이들을 추포하여 국문했으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밤 3경. 창덕궁에 불길이 솟아올랐다. 궁녀들은 비명을 지르고 궁노들은 물을 길어다 붓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아수라장이었다. 궁궐에는 진귀한 물건이 많다. 좌우포청에 비상이 걸렸다. 혼란을 틈탄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도성의 밤하늘을 환하게 밝힌 불길을 바라보는 백성들은 마음으로 박수를 쳤다. 이 화제로 서쪽 행랑 23간이 소실되었다.

한양성곽의 북문이다
▲ 숙정문 한양성곽의 북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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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예조에 하명했다.

"가뭄이 몹시 심하니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열어라."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열었다. 한양은 풍수지리설을 바탕으로 축조된 도읍이다. 동서남북에 4대문을 짓고 성곽을 쌓았다. 그 북쪽에 숙정문이 있고 남쪽에 숭례문이 있다. 이 두 개의 문은 경복궁 근정전을 중심으로 남북 축을 이룬다. 음양설에 따르면 남은 양(陽), 북은 음(陰)을 상징한다. 또한 남은 화(火), 북은 수(水)를 의미한다.

비가 오지 않으면 음기가 부족하고 물(水)이 고갈된 것으로 간주했다. 때문에 가뭄이 들면 숙정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았다. 음기를 받아들여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효험이 없었다.

의정부에서 계문을 올렸다.

"한재(旱災)가 절박하니 한강과 양화진, 그리고 박연에 호두(虎頭)를 넣도록 하소서."

비가 내리는 것은 용(龍)의 조화로 생각했다. 때문에 용이 살고 있다고 믿어지는 한강과 양화진 그리고 황해도 우봉산 아래 박연(朴淵)에 호랑이 머리를 물속에 빠트렸다. 그것도 아무 호랑이나 쓰지 않았다. 한강에 제물로 쓰는 호랑이는 삼각산에서 생포했고 양화진에 쓰일 호랑이는 인왕산, 박연에 빠트릴 호랑이는 구월산에서 잡았다. 용호상박 쟁투에서 힘들 것 이라고 생각하는 용에 대한 인간의 아부다. 역시 효험은 없었다.

승려를 모아 흥천사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어린 아이를 시켜 경회루 못에서 석척기우(蜥蜴祈雨)를 행하였다. 도마뱀이 용과 비슷하다 하여 이를 잡아 물에 잠그고 지내던 제사다. 역시 효과는 없었다. 임금이 직접 삼각산에 나아가 제를 올리고 무당을 모아 한강에서 기우를 빌었으나 비는 오지 않고 민심은 더욱 흉흉해졌다.

한양성곽의 남문이다
▲ 숭례문 한양성곽의 남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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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이 한명회를 사저로 불렀다.

"시정의 여론이 썩 좋지 않다. 어떻게 생각하나?"
"그야 하늘의 뜻입죠."

한명회가 느물거렸다. 일종의 여유다.

"이 사람이 싱겁긴. 때가 되면 비가 내리겠지만 해괴한 소문은 점점 커지고 있지 않은가?"
"서강에서 발화한 들불이 도성을 휩쓸고 이제 삼남까지 내려간 것은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곧 군대가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이 경상도에 퍼진 것은 사비(私婢) 눌거리와 함안 관노 검동이가 지어낸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러한 말이 경상도까지 내려간 것이 문제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라고 묻지를 않은가?"
"소인이라고 특별할 게 있겠습니까?"

한명회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자네는 예전의 한방이 아닐세. 예전에는 내 사랑채의 식객이었지만 이제는 나라의 녹을 먹는 승지가 아닌가? 나라를 위하여 꾀주머니를 풀어놓아 보시게."

이 때 한명회는 동부승지에 있었다. 승지는 임금을 보필한다. 주군의 숨소리까지도 감을 잡아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막중한 자리다. 허나, 한명회의 역할은 달랐다. 임금을 보필한다는 미명아래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나리께서는 여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돌한 질문이다. 많이 컸다는 반증이다.

"좋은 여론은 우리에게 유리하고 나쁜 여론은 우리에게 불리한 것 아닌가?"
"여론은 좇아가는 것이 아니고 끌고 가는 것입니다."
"끌고 간다?"

수양이 한명회를 빤히 쳐다보았다.

"좇아가면 하책이고 끌고 가면 상책이며 만들어 내면 최상입니다."

역시 한명회는 꾀의 종결자다. 수양이 무릎을 쳤다. 한명회가 수양에게 속삭였다.

"곧바로 시행하게."

명례궁을 빠져나오는 한명회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사대부가의 사랑채. 운현궁
▲ 사랑방 사대부가의 사랑채. 운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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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간원과 사헌부에서 포문을 열었다.

"도진무 정효전의 집이 시좌소 울타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난하는 날 내다보지도 않았으며 다음 날에도 병이라 핑계하고 대궐에 나와 시위하지 않고 집에 있었습니다. 속병전(續兵典)에 '중추원 부사 이상의 사제에는 호군·갑사·별시위 등 군사가 사사로이 드나들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헌데, 갑사 강주명은 정효전의 집을 자주 왕래하였습니다. 이들을 율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힘없는 임금이 어찌할 것인가. 양사의 요구대로 봉교(奉敎)를 내려줬다.

"정효전은 이미 죽었으니 부관참시하고 재산을 적몰하라. 연좌된 정원석은 남해 관노에 영속시키고 그의 형제 정효손과 정효순 그리고 조카 정유석과 정신석은 진도와 거제도, 남해도에 분산 안치하고 강주명은 수군에 충당하라."

정효전은 태종의 후궁 소생 숙정옹주의 혼인하여 일성군에 봉해진 부마다. 즉, 왕실에 한 발 담그고 있는 척실이다. 삼군도진무를 역임한 그는 동반이지만 무골이나 다름없었다. 성격이 올곧고 강직하여 따르는 후배 무인들이 많았다. 계유정난이 일어나던 날 '이제 우리일은 틀렸다'며 가슴을 치던 그는 김종서와 황보인이 참살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화병으로 죽었다.

의금부에서 추가로 아뢰었다.

"정효전의 딸 정석을금과 정옥금, 아들 정막금. 정원석의 처 만금, 첩 자동선, 첩의 아들 정비내, 정효순의 아들 정석지와 정석희, 정효완 첩의 아들 정흥생, 정효강 첩의 아들 정백지를 아울러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또 다시 봉교(奉敎)를 내려줬다.

"만금은 남해에 관비로 영속시키고 정석지와 정석희는 거제도에, 정생과 정흥생, 정백지는 외방에 안치하고 정막금과 정비내는 아직 16세 미만이니 성인이 된 후에 관노에 영속시키라."

의정부 당상과 좌승지 박원형, 우승지 권자신, 우부승지 구치관이 함께 아뢰었다.

"간당(姦黨)을 베어 없애소서."

"정난할 때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으려고 너그러운 법을 따랐는데 근일에 대간에서 간당의 근본을 모두 제거하자고 청하므로 과인이 마지못해 대신과 대간의 청에 따른다. 부처한 안평의 아들 이우직과 황보석의 아들 황보가마·황보경근, 김종서의 아들 김목대, 김승규의 아들 김조동·김수동, 이승윤의 아들 이계조·이소조, 민신의 아들 민보석·민석이, 윤처공의 아들 윤개동·윤효동, 이현로의 아들 이건금·이건옥·이건철, 이경유의 아들 이물금, 조번의 아들 조계동, 이징옥의 아들 이성동, 이보인의 아들 이해, 이심. 이의산의 아들 이우경, 김말생의 아들 김산호, 김정의 아들 김개질동, 김상충의 아들 김득천·김복천, 황귀존의 아들 황경손·황장손, 황의헌의 아들 황석동, 정효전의 아들 정원석, 정효강의 아들 정백지, 그리고 정분·이석정·조완규·조순생·정효강·박계우를 법에 의하여 처치하라."

정분은 김종서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고 이석정은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손자이며 조완규는 태종 이방원의 총애를 받았던 조영무 장군의 손자다. 이들은 모두 김종서와 안평대군을 추종하는 무리로 지목된 자들이다. 정효전의 아들들은 유배지에 도착하자마자 칼날을 받게 된 것이다.

울고 싶다. 살육을 그만 하려 했는데 또 사람을 죽이란다. 이제는 이 짓 그만하고 내려가고 싶다. 정말로 어좌(御座)를 마음대로 오르고 내려갈 수 있는 자리라면 당장 내려가고 싶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 자리에 앉아서 사람 죽이는 일만 했다는 기억뿐이다. 참으로 가슴 아팠다. 하늘을 향하여 마른 침을 삼키던 임금이 다시 명했다.

"대신과 대간의 청에 따라 간당의 근본을 척결했으니 다시 역당(逆黨) 어쩌구 옛일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내 마땅히 용서하지 않으리다."

힘이 약한 군주의 몸부림이며 절규다.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의금부에서 다시 아뢰었다.

"난신(亂臣) 이경유 첩의 아들 이한산을 다른 사람의 예에 의하여 교형에 처하소서."

가히 싹쓸이다. 그동안 각처에 유배되어 한 가닥 희망을 부여잡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모두가 사사(賜死)되거나 교형에 처해졌다. 불리하게 작동하는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공포의 서슬이다.


태그:#수양대군, #한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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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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