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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사연 없는 인생이 없다고 하지만 공무원 시험에 네 번이나 합격한 사람이 있다. 올해 최고령으로 국가직 7급 공무원 공개채용시험에 최종합격한 윤명수(53, 선관위 장애 구분모집)씨가 그 주인공이다.

국가직 9급 합격, 충북 지방직 7급 합격, 다시 국가직 9급 합격, 국가직 7급 합격. 파란만장, 우여곡절이라는 사자성어는 마치 그의 인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윤씨는 어릴 적부터 흰색 와이셔츠를 말쑥하게 차려 입고 사무실 안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한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그의 집안도 그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안정적인 공무원 직장을 꿈꾸게 된 계기가 되었다.

윤씨가 처음 공무원 시험을 보게 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충남 지방직 9급과 국가직 9급을 보았지만 보기 좋게 낙방했다. 성인이 되고 서울로 올라가 구로동 대한광학이라는 제조업체를 다니며 주경야독을 했다.

청와대 인근에 게시된 합격자 명단(지금은 서울신문에 발표됨)에서 드디어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며 당시 사귀고 있던 지금의 부인과 함께 기쁨을 나눴다.

올해 최고령으로 국가직 7급 공무원 공개채용시험에 최종합격한 윤명수 씨.
 올해 최고령으로 국가직 7급 공무원 공개채용시험에 최종합격한 윤명수 씨.
ⓒ 신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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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꿈대로 공무원 되다

1978년도 국가직 9급에 합격하고 1979년 1월 15일자로 그의 고향인 당진우체국으로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무너진 집안을 일으키고, 미래의 손주들에게 자랑이 될 수 있는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찼다. 그 열망은 이내 행동으로 옮겨졌다.

고향에 있으면 친구들과 술을 많이 마시게 되고 공부할 시간이 적어진다는 판단 아래 모두가 기피하는 단양우체국에 지원을 했다. 이후 제천우체국까지 3년여를 근무했다.

그 사이 방송통신대 행정학과에 진학해 법학과 행정학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 그는 1982년 3월께 과감히 사표를 내고 다시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이듬해 5월 행정법과 헌법이 시험과목에 있는 충북 지방식 7급 시험에 도전하고 당당히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어려서 발목을 심하게 다쳐 지체장애 6급인 그는 당시 장애인 특별전형도 없었고, 군 제대 5점 가점도 없었지만 530명 지원자 중 4등으로 합격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충북도에서의 7급 공무원 생활. 평일 밤 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근무하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다.

충북도 공업과에서 3년간 일할 때는 뇌물, 청탁의 유혹도 많았다. 하지만 커피 한 잔도 거절 할 만큼 융통성이 없고, 원칙을 좋아했던 그였다. 그에게 그 원칙이 딱 한 번 깨진 적이 있었다.

당시 그의 업무는 충북도가 농공단지를 조성한 곳에 유치업체들의 사업성을 검토하는 일이었다. 충주 목행동에 농공단지 입주확정이 된 부부가 찾아와 축하를 한 적이 있는데, 그 부부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랍에 10만 원을 넣고 간 것이다.

입주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식사나 한번 하자고 부탁하는 기업체들도 입주가 확정되면 외면하는 것이 태반인데, 그 부부는 그렇지 않은 것을 보며 상사에게 보고를 하고 직원 회식을 한 것이다. 이때도 그의 공부에 대한 열정은 막을 수 없었다.

1984년도에는 내무부 공무원들이 국사, 지역개발론, 행정법 등 1년에 한번씩 보는 소양고사에서 전국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1등에게는 지방공무원에서 중앙공무원으로 가는 길이었다. 중앙에서 내무부로 간다고 전화도 왔었다.

윤명수 씨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윤명수 씨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 신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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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의 꿈은 내무부에 올라가 30대에 서기관이 행정의 중추적 리더가 되보고 싶은 것이었다. 하지만 보름이 지난 후 온 통보는 내무부 장관이 바뀌어서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 2등이었던 논산 공무원, 3등 안동 공무원 등은 중앙으로 올라갔다.

중앙에서 일할 것에 대해 청운의 꿈을 꾸고 있던 27살 청년인 그에게 시련의 절망이 찾아왔다. 그 충격으로 술도 많이 마셨다. 연좌제가 심했던 당시 그가 중앙으로 가지 못하는 것이 6.25 때 납북되었던 삼촌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2등이었던 논산시청 공무원은 행정학 석사였고 3등도 유수한 대학을 졸업한 것과는 달리 고등학교 밖에 졸업하지 못한 학력에 대한 콤플렉스도 컸다. 그는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젊은 나이로 다듬어지지 않고 자유분방했으며 아직 기회는 많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명단에서 뒤로 뺀 것은 아니었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때의 사건은 그에게 고등고시를 더 절실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10년 넘게 보낸 충북도에서의 공직생활에서 승진 누락도 그를 힘들게 했다. 7급에서 6급 승진을 만 9년 넘게 만에 달았던 그는 자신보다 늦은 해에 시험 본 후배가 승진하는 것을 보며 또다시 절망했다고 한다.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고, 성격상 인사청탁한 적도 없는데 후배에게 추월당했다고 하는 생각에 자존심이 용납을 하지 못했던 그였다. 충북에 연고가 없었기에 승진에 누락이 되었다는 마음도 들었다.

결국 그는 당당히 행정고시에 패스하여 사무관으로 입성하기 위해 1997년 1월 5일자로 6급 행정주사 4년 6개월 근무를 끝으로 사표를 내고 또다시 모험의 길을 나섰다.

사무관 되기 위해 사표 던졌지만 '가시밭길'

그해 법원행시를 봤지만 낙방했다. 이후 불운은 계속됐다. 방향을 틀어 법무사 공부를 3년 했지만, 3명의 충북 합격자 중에 그에게만 1차 합격에 머물렀다. 퇴직금으로 받았던 5천만은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고 카드 돌려 막기를 하다가 결국 2002년에는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밤낮으로 오는 독촉전화에 충주로 피신까지 가서 노점상 등 임시직을 전전했다. 나이 마흔이 넘고 어렸을 적 다리를 심하게 다쳐 장애인 그를 받아주는 것도 드물었고 신용불량자라 마음 놓고 들어갈 직장도 구하기 힘들었다.

다행히 퇴직 전 주택관리사를 자격증을 따 놓은 것으로 관리소장을 할 수가 있어 2009년부터 5년간 개인회생으로 100만원씩 빚을 갚아 갈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에서 공무원 응시연령을 폐지한다는 기사를 보고 지난해 다시 국가직 9급 시험을 봤다. 불안한 직장이었던 관리소장보다는 안정적인 직장을 원했기 때문이다. 다시 우체국으로 돌아왔지만 그 사이 세상은 많이 변해있었다.

행정직 시험을 봐서 들어왔지만 전산능력이 부족했던 그에게는 택배업무가 배당되었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바에야 열심히 하자는 마음에 업무에 최선을 다했다. 택배 일로 열심히 걷고 술, 담배, 커피 안 마신 결과 살도 7kg이나 빠졌다.

그러면서도 하루 3~5시간 자며 다시금 주경야독에 몰입했다. 그리고 올해 7급 시험에 도전한 결과 11월 15일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올 국가직 7급 공채 최종합격자의 영광을 안았다. 내년 1월에 지원한 선관위 교육 예정이 잡혔고 총선 전에 발령 날 예정이다.

그에게는 아직도 꿈이 있다. 독학사 자격증을 딴 그는 장기적으로 로스쿨에 진학하고 행정고시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는 "지금 민주화가 된 것은 사법부의 노력이 크다고 본다. 그동안 법의 기초가 서고 정리는 많이 됐지만 규율이 많이 흐트러졌다고 생각했다"면서 "선관위에 가서 공명정대하게 법을 집행하는 부분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지역시사주간지 <충청리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윤명수, #공무원시험, #충청리뷰, #아산우체국,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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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 분야로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등 전방위적으로 관심이 있습니다만 문화와 종교면에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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