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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공간의 의의

'국학'이라는 말이 있다. 자기 나라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를 연구하는 학문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오늘날의 '국학'은 보통 국문학과 국사학을 일컫는다. 하지만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국학은 '지리학'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사람이 나고 자란 땅을 아는 일이 그 사람과 나라를 이해하는 데에 필수 불가결함을 그들은 모르지 않았다. 물론 오늘날의 우리도 공간에 발을 딛고 흐르는 시간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개인의 시간이 쌓이면 역사가 된다. 즉, 역사도 결국 각각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배우는 역사에는 종종 공간이 결여되어 있다.

한번 질문을 던져 보자. 3.1 운동은 언제 일어났을까? 그리고 한국전쟁은 언제 시작했을까? 이 정도 질문은 누구나 대답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건이 진행된 공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의 차이를 말하는 이는 많지만 그들이 활동한 시대의 미국과 중국, 그리고 한반도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논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인간의 행동은 대개 공간과 조응한다. 동학농민운동에서도 남접과 북접의 활동은 전혀 달랐다. 서울과 평양의 독립운동 스타일도 차이가 있었다. 같은 시대에도 공간의 개성은 분명히 있었고 그 차이는 사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역사의 흐름을 움직일 수 있는 비범한 인물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히틀러와 함께 근대 최악의 학살자였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경우를 보자. 역사에서는 그가 자행한 대량 살인의 원인을 잔혹한 성격으로 본다. 그리고 생부의 폭력으로 얼룩진 유년기와 개인적 결핍을 그 이유로 든다. 하지만 스탈린이라는 '인간'의 성격을 만들고 발현시킨, 그를 둘러싼 공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김정인 교수(춘천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는 이런 식의 단순한 접근이 얼마나 무책임할 수 있는가를 지적한다. 한 사람이 나고 자란 '공간'에 대한 충분한 고찰 없이 그를 역사적 인물로 이해하기는 어렵다. 학생들을 위한 역사 교육에서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아서는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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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9월 7일부터 진행 중인 <교과서로 읽는 한국 근현대사> 강좌 중 네 번째 강의는 바로 '역사적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재교육의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교재로 하는 이 강좌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서술 방향과 역사 인식에 대한 전문가들의 담론을 시민들과 나누고 있다. 다음의 내용은 김정인 교수의 강의 <민족운동의 공간 탐사: 서울 평양 찍고 만주 미주까지>를 토대로 재구성 및 정리한 것이다.

교과서 안의 역사공간

현행 역사 교과서에도 한반도 외에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존재했다는 언급이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충실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그 각각의 공간을 동등한 비중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우선 식민 모국이었던 일본을 보자. 일본에서의 독립운동, 언뜻 듣기에도 쉬웠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2.8 독립 선언을 기억한다. 해방 후 일본에 세워진 조선인학교도, 한인 거류민단과 조총련의 존재도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정도 규모의 조선인 조직이 존재하려면 일본 내에서 민족운동의 맥이 면면히 이어졌어야 한다는 사실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과서에서의 일본 내 민족운동은 2.8 독립선언과 함께 증발해 버린다. 물론 남한 정부의 반공 강박증이 낳은 결과다. 일본 내 민족운동세력은 사회주의 및 무정부주의운동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 모국 본토에서의, 아마도 가장 강한 탄압에 직면해야 했을 독립운동의 기록을 그런 이유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김교수는 강조한다.

이런 식의 무시나 왜곡은 일본 외의 공간에서도 빈번히 이루어진다.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두 번의 혁명을 거쳐 소비에트 연방 성립으로 이어지는 러시아 혁명은 공간의 이름 뿐 아니라 성격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 사실 러시아 혁명은 20세기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서 가장 크고 가장 낙후된 나라의 최하층 노동자, 농민이 들고 일어나 짜르를 죽이고 자신들의 정부를 만든 것이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 레닌이 이끄는 이 신생 정치집단은 기존체제를 유지하던 각국 지배층에게 공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소련은 계급해방은 물론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로부터 피압박 민족의 해방 역시 주창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레닌은 민족자결주의를 말하고 식민지독립을 통해 이를 실행했다. 김교수는 그 충격과 공포를 50년대 미국 중산층들이 원자폭탄에 품었던 두려움에 비견한다. 아마 실제로도 그러했을 것이다. 세계질서가 뒤바뀌는 일도 당시에는 가능해 보였다. 물론 그 공포는 식민지 피지배층에게는 희망이기도 했다. 일제하의 조선민중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교과서의 러시아-소련 관련 서술은 이런 분위기를 충분히 담아내고 있지 못하다. 이유도 일본의 경우와 같다. 구체적으로는 자유시 참변 같은 부정적 사건만을 강조하고, 레닌의 지원금으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한 사실 등은 제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역사적 시각에서 이는 매우 곤란하다. 반공이라는 색안경을 통해 역사를 제대로 바라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제정러시아나 냉전시대와 달리, 당시의 소련은 전혀 우리의 가상적국이 아니었다.

더욱이 레닌은 3.1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호감을 표한 바 있다. 말하자면, 당시 소련은 국제적 연대세력으로서 광범위한 계층에게 기대감을 줄 수 있었다. 자치론자인 최린마저 소련에서 개최한 극동인민대표회의를 찾았고, 임정개혁을 부르짖던 창조파는 새로운 임시정부 수도로 블라디보스톡을 내정했다. 일본을 제외하면, 당시 민족운동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는 분명 소련이었다.

그러니 박헌영 같은 조선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은 당연히 소련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이들의 행적은 오늘날 남북한 양쪽에서 모두 무시된다. 남쪽은 철저한 반공주의로, 북한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중심으로 역사교육의 방향을 잡은 까닭이다. 역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했던, 레닌이 인정한 조선의 대표적 사회주의자 이동휘도 교과서에서는 거의 외면당한다. 교과서의 러시아 서술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반공주의에 의해 큰 타격을 받은 셈이다.

이렇듯 일본과 러시아가 교과서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는 것에 비하면 중국 지역에 대한 서술은 양적으로 매우 풍부하다. 중국 관내와 만주의 운동을 구분해서 언급할 정도다. 이는 물론 양 지역에서 독립운동 양상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적으로는 이들 공간에 대한 서술도 충분하다고 하기 어렵다.

중국 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은 만주와 관내를 막론하고 매우 복잡하다. 우선 중국 관내에서의 독립운동은 국민당-공산당 간의 역학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중국관내의 조선인 민족운동 세력은 좌우 모두 국민당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한편 한인 공산주의자들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 혁명이 필요하다고 인식했고, 그에 따라 팔로군과 연합해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이런 이유로 중국 공산당이 조직한 동북항일연군의 주요 지휘관 중에는 한인들이 많았다. 무정을 비롯한 팔로군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은 북한 정권 수립 후 인민군에 편입되기도 한다. 이런 정치적 면면을 파악하려면 당대의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교과서는 군벌들의 할거와 국공합작, 국공내전 같은 복잡한 정치상황을 충분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

만주 서술 문제도 간단하지 않다. 만주는 중국보다 일본과 함께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우리의 국외 독립운동 근거지라는 인식도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일본의 괴뢰국가 만주국이 존재했고, 주변 민족들이 섞여 사는 지역이었기에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다. 하지만 분명히 중국 영토인 만주에서 그토록 자유로운 민족운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나 문제의식은 필요하다. 물론, 교과서에는 그런 건 없다. 실제로는 만주국 성립 이후 독립운동은 불가능했다. 만주군관학교출신 장교들인 박정희, 백선엽 등이 독립군 사냥을 시작한 것도 이 때 부터이지만 이에 대한 언급도 없다. 말하자면, 민족운동 공간으로서 만주에 대한 서술도 깊이 면에서는 매우 미흡하다.

교과서의 부실한 서술과는 달리 국내외를 막론하고 각각의 민족운동은 그 무대가 되는 공간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함흥지역의 높은 교육열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광주의 학생운동과 격렬한 소작쟁의는 빈부갈등과 사회주의의 영향력이 강했던 전라도의 지역적 특성이 배경이었다. 안동 지역은 조선조 이래 유림의 전통 때문인지 민족주의자든 사회주의자든 독립운동가를 유독 많이 배출했다.

서울과 평양은 당시에도 최고의 대도시였고, 따라서 모든 분야의 민족 운동이 존재했다. 중국과 만주에서의 독립운동도 한결 같지는 않았다. 상하이는 임시정부의 터전이었지만 30년대 상하이 사변으로 일본군에게 점령된 이후 독립운동이 어려워진다. 한편 베이징은 북경 군사통일촉성회,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이 자리해, 반 임정 세력의 집결지가 된다. 일본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2.8 독립선언이후에도, 이승만이 탄핵된 후에도 독립운동의 맥은 끊어지지 않았다.

역전된 남북-역사적 공간, 정치적 공간

한편, 한반도 안에서 민족운동의 공간이라는 개념은 조금 더 복합적으로 봐야 할 필요가 있다. 같은 공간이라도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과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병운동 지역과 동학농민운동 지역은 겹치지 않았다. 두 운동이 계급적-정치적으로 지향하던 방향성의 차이가 공간에 반영된 결과다. 그런가 하면 3.1운동이 확산되는 지역은 이전의 동학농민운동, 의병운동과 또 달랐다. 기존의 두 운동이 발원 지역을 시작으로 퍼져나갔다면 3.1운동은 서울과 평양으로 대표되는 근대 도시 중심의 시민 대중운동 형태로 전개되었다.

오늘날의 분단현실에서 역사적 공간 인식은 매우 중요하다. 일제시대의 남북공간은 정치적으로 지금과 정 반대였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 오늘날 남북한 지역의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먼저 평양 중심의 서북지방은 전반적으로 빈부-신분의 격차가 적었다. 특히 함남지역은 반상의 구별도 없다시피 했고 그 중 북청은 '공산국'이라 불렸다고 한다. 지주 소작인간 갈등도 드물고 자산가, 중소지주, 자작농의 비율도 높았다. 평북지역도 자작농 비율이 반을 넘었다.

토지가 척박해 수확량은 적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지조를 대신 부담해 주는 등 지주의 마음 씀씀이가 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주를 큰집이라고 부를 만큼 관계가 좋았다. 이는 천도교와 기독교 세력이 매우 강하고 상대적으로 유교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지역색과도 무관하지 않다. 평안도에 대해서는 자유평등의식은 높지만 3.1운동 이후 관권, 금권과 타협해 생활문제에 치중하는 경향이 짙어졌다는 평도 있다. 다만 지역주의는 강고했다. 한마디로 보수적이고 자유주의 내지는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렇다고 이 지역이 중앙정부로부터 소외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조선총독부를 평양으로 옮기자는 주장도 있었을 정도로 평양은 당시에도 중요한 도시였다. 어쨋거나 흔히 생각하는 '북한지역'의 이미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이다. 

반면 서울 중심의 기호-호남지방은 여러 의미로 계급갈등이 첨예한 곳이었다. 이쪽은 그나마 소설 등을 통해 익숙한 모습이지만, 서북지역과 비교해 보면 또 느낌이 미묘하다. 충남 지역은 양반의 근거지로 계급사상과 빈부차별이 모두 강했고, 경기도는 아예 반촌과 민촌이 따로 살았다. 전라도는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도 풍부했지만 빈부차가 크고 지주의 횡포가 심했다. 1910년 이후 부터는 동양척식회사와 일본인 자본가의 수탈이 더해졌다. 그 결과 많은 자작농들이 소작을 거쳐 파산과 유랑의 길로 떨어졌다.

그러니 이 지역의 소작쟁의는 격렬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 사회주의운동이 활발했던 것도 당연하다. 심지어 일제 경찰당국은 호남지역을 '사상의 제일선'이라 불렀다. 말하자면, 사회적-경제적으로 사회주의사상이 자라기 딱 좋은 토양이었다. 김교수는 한국사회에서 호남지역을 소위 '빨갱이 땅'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시점을 이 때로 잡는다. 훗날 김대중이 박정희에 의해 용공분자로 쉽게 몰릴 수 있었던 것도 이시기에 형성된 전라도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다.

이런 지역성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들 지역이 가진 정치성향과 정 반대인 두 개의 정부가 남북에 각각 수립 되었다는데 있었다. 물론, 이는 미-소의 이해관계와 알력의 결과물이었지만, 바로 그 어긋남 때문에 한국전쟁 후까지 남북한 모두 결코 적지 않은 피를 흘려야 했음을 김교수는 지적한다. 괴리를 공유하게 된 남북 정부로서는, 그 이상의 마찰과 갈등도 공유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 남북한의 사회문제는 거울에 비춘 듯 닮은 부분이 많다. 흔히 남한 초기 좌익의 준동이라는 식으로 설명되는 반체제 운동은 우익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북한에서 똑같이 벌어졌다.

소설 <태백산맥>을 통해 친숙한 빨치산 역시 북한에도 존재했다. 구월산 부대로 대표되는 이들 '반공 빨치산'은 전쟁 전후 북한 지도부의 골칫거리였다. 김일성 본인도 민족주의자들의 암살시도와 반대시위를 수차례 겪어야 했다. 정치적 기반과 정반대의 정부가 들어섰으니 유혈사태는 예견된 거나 다름없었다. 6.25전쟁이 그토록 모질고 잔인한 비극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숨어 있다. 이후 후퇴와 수복을 반복하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룬 이유도 여기에 있다. 휴전 후에도 남북은 각각 반정부 세력을 무자비하게 토벌하고 나서야 정국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은 사상적. 정치적 남북 공간과 어긋나버린 정부수립에서 잉태된 셈이다.

타자의 공간과 역사인식

우리에게는 이런 사실들이 새롭다. 이유가 있다. 그동안 우리는 무대와 조연이 없는 1인 활극의 독립 운동을 상정하며 역사를 배우고 또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물론 역사적 상상력의 빈곤이다. 게다가 우리는 과거사 청산을 완수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남는 것은 여유와 배려가 아닌 피해의식과 콤플렉스 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독립운동에만 천착한다. 그 무대인 공간과 그 안의 타자에 대한 고민은 없으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김교수는 이런 콤플렉스와 빈곤한 역사인식이 반영된 결과물로 남한의 화폐를 꼽는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국가의 화폐에는 일반적으로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들어간다. 일본의 경우는 후쿠자와 유키치 등 근대화의 주역들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 화폐에는 온통 조선시대 인물 뿐이다. 친일논란과 좌우논란에서 모두 자유로울 수 있는 근대 인물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해방 60여년 만인 이제야 간신히 10만원권에 김구 초상이 들어갈 예정이라니 늦어도 보통 늦은게 아니다. 정치적인 제약 외에도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한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다른 이의 역사를 아는 것은 곧 역사공간의 이해를 뜻한다. 그리고 그 공간의 또 다른 '인물'인 우리를 더 면밀히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이는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대표적 인물, 김구와 이승만이 활동한 공간의 예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알다시피 이승만은 전투적인 반공주의자이자 북진 통일론자였다. 보도연맹사건 등을 통해 공산주의자로 추정되는 사람이라면 가리지 않고 죽였다. 그에게 공산주의자는 민족도 동포도 아니었다. 이런 이승만을 이해하려면 당시 미국 사회의 분위기를 알 필요가 있다. 1921년부터 12년간 미국 대통령과 의회는 공화당이 장악했었다.

즉, 미국의 20년대는 경제적 풍요와 보수주의의 시대였다는 뜻이다. 헐리우드 영화, 메이저 리그, 포드 자동차 등 우리가 아는 미국 대중문화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대공황과 함께 미국은 심각하고 장기적인 경기침체를 겪는다. 그리고 정치적-문화적으로 강력한 급진주의와 저항의 조류가 대두된다. 실제로 미국사회가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중산층들은 혁명과 체제전복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이들의 불안감은 러시아 혁명으로 실체를 갖게 된 부분도 있다. 훗날 매카시즘 광풍의 전조인 '적색공포' 현상이 이 때 처음 일어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은 바로 이 시기를 미국에서 보냈다. 완벽한 이상 국가의 전복을 꾀하는 공산주의자에게 그가 발작적인 증오를 갖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미국은 9.11 전까지 한 번도 본토를 공격 받은 일이 없다.

이승만은 공포의 실체를 직접 겪지 않았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도 망설임도 없는 맹목성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부분에서 드러나는 공간 경험의 바탕이 김구와 이승만의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었다는 것이 김정인 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김구가 활약했던 중국대륙, 그 중에서도 만주는 매우 독특한 땅이었다. 만주족은 중원을 정복한 후 만주 지역을 조상의 성지라 하여 민간인의 출입을 막았다. 하지만 이 조치는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쉽게 했고 청 왕조가 약해지면서 조선, 일본 등 주변 지역에서 밀려난 이들이 만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만주는 중국의 온전한 영토가 아니라는 주변국가의 인식도 이 때 생겼다. 만주국 성립 전까지 비교적 자유로운 독립운동이 가능했던 것은 이런 이유다. 그리고 현재 중국이 만주 대신 동북지구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도 주변국의 '만주 인식' 때문이다.

어쨌거나, 당시의 만주는 동아시아 유랑민들에게는 새로운 삶의 안식처이자 민족간, 문화간 교류의 매개지역이었다. 반면 만주는 동아시아 세계의 모순이 중첩되는, 변동의 진원지이기도 했다. 또한 모순의 돌파구로서 민족국가 간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면 물리적 충돌의 각축장이었다. 실제로 국공내전 당시 격전지는 중국본토보다 만주지역에 더 많았다. 이런 지역에서 직접 전쟁과 합작을 보고 겪은 김구의 역사인식은 이승만과 또 달랐다. 김구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 노선을 견지하면서도 끝까지 좌우합작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남북총선거 관철을 위해서는 스스로의 정치생명을 거의 포기해 가면서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를 김교수는 김구의 이런 경험에서 형성된 역사인식에서 찾는다. 반면 이승만의 정치행보와 언행에서 드러나는 역사인식은 당대 미국의 강력한 고립주의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많다. 그렇기에 지도자의 역사인식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듣기에 따라서는 오싹한 이야기이다.

역사인식의 형성은 '공간'이자 '타자'인 인문환경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한다. 환경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사람이 기록한 역사에도 반영된다. 그리고 그 역사를 배운 이들은 역사인식을 공유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도 결국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역사인식을 가지고 어떤 공간에서 어떤 맥락으로 활동했는가는 역사를 이해하는 근간이다.

하지만 교과서의 틀은 언제나 경직성과 완고함을 특징으로 하기에, 그 틀에 '인간'을 오롯이 반영 하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이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역사를 배우는 이들이 껍질을 깨고 역사적 공간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 역사교육 현장에서 상상력과 여유가 부활하는 일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참여연대 아카데미 인턴 김도형님이 작성해 주셨습니다.



태그:#참여연대, #아카데미, #느티나무, #역사교과서, #김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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