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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치악산 산골에 홀로 산다. 이 사내가 사는 움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돌로 벽을 쌓고 함석으로 지붕을 한 집이 한 채 있었더란다. 주인은 있되 집은 비어, '마당에는 망초가 우거지고 뒤꼍에는 산딸기덤불이 벽 밑까지 뿌리를 뻗어 내려와 대낮에 지나가기에도 으슥한 기분이 느껴졌다'고 했다.

그 빈집에 꽃이 피는 계절 사내는 가끔 들러 '폐허의 정원'을 즐겼다. 어느 날, 그 집에 한 중년의 남자가 살기 시작하면서 집에 울타리를 쳐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막았다. 사내는 개울을 건널 때 그 집 마당을 가로질러 가면 얕으면서 폭이 좁은 곳을 건널 수 있어 잡초가 우거진 그 집 마당을 오솔길마냥 다녔는데 이제는 그 길이 막힌 것이다.

달랑 혼자 살면서 남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집에 울타리까지 친 남자가 사내는 얄미웠더란다. 그래서 그 집 앞을 지나면서 울타리를 뚫고 망치질 소리가 들려도 모르는 척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사람이 드문 치악산 산골에서 언제까지나 모른 체 하면서 살기는 어려운 법. 어느 날, 사내는 남자에게 말을 건네고 안면을 트게 되었다. 그리고 내심 서운했던 울타리 이야기를 툭 던지듯 지나가듯 꺼냈다.

"울타리를 없애면 이 산이 모두 내건데 뭐 하러 울타리를 쳐요?"

사내는 남자에게 어떤 대답을 들었을까? 사내는 사람이 얼마나 자기 편한 대로만 생각하는지 남자 때문에 깨달았다고 한다. 남자는 자기 구역을, 자기 땅을 표시하고 사람들이 못 들어오게 울타리를 친 것이 아니었다.

깊은 산속에서 홀로 생활하게 된 남자는 밤이 무서웠다. 밤에 산짐승이나 낯선 사람이 불쑥 들어올 것 같아 두려웠던 남자는 그 두려움을 떨치고 싶어 울타리를 쳤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사내는 남자를 이해하게 된다. 그 역시도 처음 산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남자 못지않게 밤이 '두렵고 먹먹하고 막연'했기 때문이다. 

사내는 시인 정용주. 그가 화전민조차 떠난 치악산 산속에서 화전민이 남기고 간 움막을 찾아들어가 집안 곳곳에 쳐진 거미줄을 걷어내고, 곰팡이가 피어 있는 방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먼지가 잔뜩 내려앉은 아궁이 가마솥에 걸레질을 한 것은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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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치악산 살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바람처럼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여행자처럼 그 집에서 살기 시작했는데, 어느 사이엔가 아홉 해가 훌쩍 지났단다. 세월은 머무르지 않는 바람처럼 정말이지 빠르게 흐른다.

그 사이에 시인은 여행자가 아니라 숲의 생활자로 변신했고, 그와 함께 사는 가족(?)은 늘었다가 줄었다. 그가 함께 사는 가족은 개 두 마리와 닭 두 마리, 그리고 벌들이었다. 처음에는 한 통으로 시작된 양봉은 점점 벌통 숫자가 늘어나는가 싶더니, 올해 엄청나게 쏟아진 비 때문에 벌들이 그의 곁을 완전히 떠나는 것으로 끝이 났단다. 하긴 가족도 늘 곁에 있는 건 아니다. 떠나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머무르기도 하니.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는 이렇게 치악산 자락을 찾아들어가 살게 된 시인 정용주가 '치악산 살이'를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러면서도 정감 있게 풀어낸 이야기다.

그 이야기들은 때로는 짧게 때로는 길게 이어지면서 도시에서 삭막하게 시간에 쫓기며 살아가는 내 마음을 울리다 못해 부럽게 만들었다. 

에세이가 아닌 산문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마저 자아내게 하는 시인의 글은 시인이 사는 산골 마을의 풍경을 눈앞으로 고스란히 옮겨 놓아 그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느끼게 했던 것이다.

물론 사내 혼자 사는 산골 삶이 숲속에 피어난 야생화들처럼 그윽한 향기만을 간직할 수야 없다. 남루한 삶은 도시를 떠나 산골로 간다고 해도 이어지는 게 이치이므로.

처음에는 시인도 울타리를 치면서 홀로 사는 두려움을 떨치려고 노력했던 중년 남자처럼 무서움을 타기도 했더란다. 하지만 시인은 살면서 깨닫는다. 실상 무서움이란 실제로 있거나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서 만들어내는 상상의 두려움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물론 깨닫는다고 두려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주는 건 아닐 것이다. 대신 두려움이 사라지게 자신을 설득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냈을 것, 이라고 짐작한다.

산골에서 살고 싶은 도시인들은 텃밭을 가꾸고 싶다는 희망을 품는다. 그건 산골에 살기 시작한 시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집 앞에 텃밭을 가꾸던 시인은 어느 날 부터인가 텃밭에서 손을 뗐다. 혼자 살면서 먹을 수 있는 푸성귀의 양이 얼마나 되겠나. 시인이 먹어치우는 속도보다 푸성귀가 자라는 속도가 더 빨랐던 것. 결국 시인은 텃밭을 내버려두었고, 텃밭은 푸성귀들이 웃자라다 못해 꽃을 피우는 지경에까지 이르러 결국 시인은 텃밭의 푸성귀들에게 자신이 편한 대로 살고자 치악산 산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마음껏 자랄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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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시인은 텃밭이 아닌 산속에서 나물을 뜯고, 푸성귀를 대용할 것들을 찾아낸다. 자연은 수고하지 않아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을 나누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이 사는데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는 사실을 자연을 통해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도시의 삶에 지친 도시인들이 시인처럼 죄다 산속으로 들어갈 수야 없는 노릇이다. 시인도 그걸 안다. 그래서 가끔 도시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시인을 부러워하면서 푸념처럼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떠나지 못한 자의 행복'을 떠올리는 것일 게다.

산속에 산다고 시인이 수도승처럼 속세와 혹은 저자거리와 인연을 완전히 끊은 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시인은 집에 TV를 들여놓았고, 전화도 있으며, 전화선을 이용해 느려터진 컴퓨터도 가끔 이용한다. 뚝 떨어진 곳에 사는 이웃도 있어 가끔 안부를 주고받거나, 방문하기도 한다. 덕분에 시인이 기르는 개가 이웃집 닭들을 죄다 물어 죽이는 일도 생겨, 변상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시인의 친구나 친지 그리고 생판 모르는 남도 시인을 찾아와 밤이면 달이 한껏 차올라 사람을 취하게 하는 마당에서 한담을 나누고, 삼겹살을 굽고, 술잔을 나누기도 한다.

좋겠다고? 그래서 부럽다고? 그렇게 사는 시인이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도시에 사는 보통 사람들처럼 좋은 날도 있고, 싫은 날도 있고, 답답한 날도 있고, 누군가가 몹시도 그리운 날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시인은 그곳에서 별일 없이 사는데 익숙해지다 못해 완전히 적응한 것 같다. 그러니 아홉 해를 내리 살아냈겠지. 그리고 별일 없으면 내내 그곳에서 뿌리를 깊이 내린 야생화처럼 살아가겠지.

도시의 삶이 머리를 복잡하게 짓누른다면, 시처럼 풀어내는 시인의 치악산 살이 이야기를 읽는 것도 좋은 기분전환 방법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내가 그랬다.


나는, 꼭 행복해야 하는가

정용주 지음, 새움(2011)


태그:#치악산, #정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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