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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나를 친다. 주먹으로 내 어깨를 두들긴다. 필라델피아에서부터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횟수가 현저하게 늘어났다. 미시건, 오하이오, 인디애나, 일리노이, 아이오와를 거쳐 사우스 다코타에 진입했을 즈음, 윤의는 내게 하루 30회 정도 차 안에서 주먹질을 했다.

배드랜즈 국립공원의 암벽. 토질이 밟으면 으깨질 것 같은 느낌이다.
▲ 사막의 병풍바위 배드랜즈 국립공원의 암벽. 토질이 밟으면 으깨질 것 같은 느낌이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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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친구들과 함께 있었던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근엄하게 굴었다. 명령을 받은 군인처럼 무엇이든 시키면 '네'하고 대답하고선 행동으로 옮겼다. 내게 농담이나 장난을 걸지 않았다. 매번 존댓말을 했다. 그러나 친구들이 서울로 돌아간 뒤부터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험악한 인상을 주는 사막이지만, 해질무렵은 그 어느 곳보다 더 아름답다.
▲ 몹쓸 땅의 석양 험악한 인상을 주는 사막이지만, 해질무렵은 그 어느 곳보다 더 아름답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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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오른쪽 어깨를 아들의 주먹에 내줄 때마다 묘한 카타르시스 같은 게 밀려왔다. 아들의 주먹질은 툭툭 치는 것보다는 조금 강도가 셌다. 내가 무슨 말을 할라치면, "그게 아니다"라고 일부러 어깃장을 놓으면서 주먹이 날아왔다.

아들이 마음을 열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들만의 스킨쉽이었다. 그것도 날이 갈수록 횟수가 늘었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의 문이 점점 더 열리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낮시간이면 화염산처럼 달궈지는 배드랜즈의 기기묘묘한 바위산들.
▲ 모래성 낮시간이면 화염산처럼 달궈지는 배드랜즈의 기기묘묘한 바위산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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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쓸 땅' 국립공원에 들어섰을 때, 나는 문득 아들이 친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꼽아보니, 10년도 더 전이다. 아이 엄마 없이 캘리포니아 한 귀퉁이에서 윤의를 키웠을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친구 같다고 했다. 그 때 미국으로 출장 온 동생은 "정말 부럽다"고 연방 입에 침이 마르도록 듣기 좋은 말을 해주었다. 당시 일부러 사근사근 친구처럼 아들을 대한 게 아니었다. 우리 사이엔 그냥 아무런 벽이 없었다.

쭈글쭈글한 땅 거죽들이 주름 하나 하나로는 고통스럽지만, 전체적으로는 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땅 주름 쭈글쭈글한 땅 거죽들이 주름 하나 하나로는 고통스럽지만, 전체적으로는 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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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시간은 채 1년도 지속되지 않았다. 그리고선 날이 갈수록 불편한 관계가 심화됐다. 그즈음 아들에겐 사춘기가 왔다. 그것도 어느 날 갑자기 끌려오다시피 발을 디딘 미국에서였다. 게다가 엄마 조차 없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우리 부자의 천성이 다른 걸 제외하고도, 엇나가기 시작한 둘의 관계를 더욱 삐걱거리게 할 환경에 우리는 노출돼 있었다.

초저녁 처음 배드랜즈를 봤을 때 악마의 성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악마의 성채 초저녁 처음 배드랜즈를 봤을 때 악마의 성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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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랜즈(badlands) 국립공원은 문자 그대로 써먹을 데가 없어 보이는 '나쁜 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인의 손등에 난 잔주름을 억만 배 확대하면 그런 모습이 나올까.

삐죽 솟고, 푹 꺼지고, 흉하기 짝이 없다. 처음보면 처절하기까지 하다. 땅 거죽이 괴로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밟으면 와르르 무너질듯한, 흙과 바위의 중간쯤 되는 토질의 땅덩어리들은 갖은 모양을 하고서 나신을 드러내고 있다. 창 끝처럼 뾰족하게 생긴 것도 있고, 커다란 투구처럼 땅에 넙죽 엎드려 있는 것들도 있다. 불쑥 솟아오른 땅덩어리들은 대부분 거죽에 풀 한 포기도 두르지 않은 상태였다.

미국 북서부 대평원 지역에 흔한 프레리 독. 설치류지만, 생김새 때문에 독으로 불린다. 뒷편으로 프레리 독의 집 역할을 하는 구멍이 보인다.
▲ 프레리 독 미국 북서부 대평원 지역에 흔한 프레리 독. 설치류지만, 생김새 때문에 독으로 불린다. 뒷편으로 프레리 독의 집 역할을 하는 구멍이 보인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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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참혹한 풍경이 우리로 치면 1개 면도 훨씬 넘는 면적에 펼쳐져 있다. 웬만한 크기의 군 지역을 능가하는 넓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처참한 풍광이 보면 볼수록 아름답다. 역설의 미학이다. 충격이다. "나, 전에 여기 처음 봤을 때 악마들이 성을 쌓아놓은 줄 알았다."

6년 전 가을 해가 막 지기 시작할 무렵, 이 곳을 찾았을 때 첫 인상을 윤의에게 들려줬다. 윤의는 "기기묘묘한 게 전혀 악마 같지 않은데요"라고 응답했다. 낮이냐, 밤이냐 보는 시간이 다른 탓일 수도 있다. 허나 어쨌든 사물을 대상으로 하든, 사람을 화제로 삼든 우리 부자의 시각 차이는 어제 오늘일이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둘 다 감동을 했다는 점이다.

사우스 다코타의 마운트 러시모어에 있는 미국 초기 대통령 얼굴 조각.
▲ 대통령 얼굴 바위 사우스 다코타의 마운트 러시모어에 있는 미국 초기 대통령 얼굴 조각.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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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랜즈는 한 방에 사람을 훅 가게 하는 마력이 있다. 너무 기이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명소'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는데, 그럴 만도 하다. 감탄사가 튀어나오는데 단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배드랜즈를 묘사하는 데는 이색적이라는 말도 사실 턱없이 부족하다. '외계적'이라는 말 정도가 그나마 어울릴까.

미국 대통령 얼굴상에 맞서 조각된 원주민 추장,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 미완성작품으로 사우스 다코타의 대평원을 가리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 크레이지 호스 미국 대통령 얼굴상에 맞서 조각된 원주민 추장, 크레이지 호스의 조각상. 미완성작품으로 사우스 다코타의 대평원을 가리키는 모습을 하고 있다.
ⓒ 김창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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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드랜즈 앞에서면 다툼도 갈등도 한 없이 오그라들 수 밖에 없다. 지구상 땅거죽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참혹한 역설의 미학이 혹은 그 절경이 사람 자체를 작게 만든다. 배드랜즈 일대는 미국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다 보면, 서부 냄새가 본격적으로 나기 시작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건조한 공기, 한낮에는 땅을 구워 익혀버릴 듯한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밤에는 수은주가 정신 없이 곤두박질한다. "고향에 돌아온 기분인데요." 어린 시절을 미국 서부에서 보낸 윤의는 몸으로 서부 냄새를 맡는다.

의도하고, 바랐던 바보다 우리 부자 관계 개선의 진도가 빠른 속도로 나가고 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본 친구 같은 이 느낌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 그러나 잘만하면 서로에 대한 오해를 상당 부분 덜어낼 수 있을 듯한 기분이다.


태그:#배드랜즈, #국립공원, #사우스 다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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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 6학년에 진입. 그러나 정신 연령은 여전히 딱 열살 수준. 역마살을 주체할 수 없어 2006~2007년 북미에서 승차 유랑인 생활하기도. 농부이며 시골 복덕방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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