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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덕 선생님(돌아가시기 전 해 고든골 이오덕 글방에서)
 이오덕 선생님(돌아가시기 전 해 고든골 이오덕 글방에서)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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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빠르다"고 하더니, 오늘(26일)은 이오덕 선생님이 세상을 뜨신 지 꼭 여덟 해째 되는 날이다.

사실 나는 학교에서 이오덕 선생님한테 배운 적은 없다. 선생님과는 같은 학교를 졸업하거나, 한 고장에서 자란 선후배 사이도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학연, 지연, 혈연이 전혀 없는 사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오덕 선생님을 내 인생에 가장 영향을 준 스승으로 늘 마음속에 기리면서 살고 있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1997년 <아버지는 언제나 너희들 편이다>라는 책의 원고를 다 쓴 뒤, 선생님에게 보여드리고 추천의 글을 받고자 그 무렵 사시던 과천 선생님 댁을 찾아뵈었다.

자그마한 아파트 공간이 온통 책으로 덮여 있었고 선생님은 나에게 시퍼런 능금(사과)과 강냉이 따위를 내놓으셨다. 선생님에게 원고 보따리를 드리고 돌아오는데 마치 인도의 간디를 만난 느낌을 받았다.

보름 뒤 등기우편물을 받았는데 선생님에게 드렸던 원고 보따리였다. 반갑고 고마운 마음에 원고 보따리를 풀자 내 원고에는 선생님이 손수 연필로 고쳐 쓴 낱말이 거의 쪽마다 나왔다. 솔직히 처음에는 '부탁드린 발문이나 써주실 것이지 이건 뭐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원고를 넘기면서 곧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부끄럽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내가 무심코 쓴 한자말이나 외래어, 유식을 자랑하는 듯한 어려운 말을 일일이 찾아 쉬운 우리말로 모두 고쳐놓았다. 함께 보낸 편지글에는 매우 조심스럽게 당신의 생각으로 일방 고쳐본 것이니까 내가 판단해서 받아들이라는 보탬 말씀이 있었다.

'우리말 살려 쓰기'에 앞장서시다

나는 해방 후 세대로 그때까지 우리말과 글을 50여 년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왔는데도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서 별 다른 생각 없이 한자말이나 외래어, 일본 말투, 서양 말법을 예사로 써왔다. 아니 그런 말을 남이 모르는 가운데 은근히 자랑하듯 썼을 것이다.

식탁 → 밥상, 그럼에도 불구하고 → 그런데도, 이따금씩 → 이따금, 교육이란 미명으로 → 교육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입장 → 처지, 주방 → 부엌, 야채 → 채소/남새, 획일적 → 판에 박은 듯이, 국민/민초 → 백성, 먹거리 → 먹을거리, 그녀 → 그

선생이 일러주신 대로 글을 고쳐 놓고 보니 훨씬 깨끗하고 쉬웠다. 이밖에도 '~적(的)', '및', '등', '~에 있어서', '~에의' 따위도 일본말의 찌꺼기라고, 될 수 있는 대로 다른 말로 고쳐 쓰거나 아예 못 쓰게 하셨다. 또 서양 말법을 따른 '-었(았)었다'라는 과거완료형 시제는 우리 말법에 없는 것으로 우리말의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을 깨트린다고 하셨다.
  
특히 '그녀'에 대한 선생의 보탬 말씀을 듣고는 남녀평등에 대한 높은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왜 하필 여자를 가리킬 때만 '그녀'라고 해야 합니까? 그렇다면 남자를 가리킬 때면 '그남'이라고 해야 되지요. 남녀 없이 '그'로 쓰면 됩니다."

지난날 우리나라에서는 쉬운 우리말과 글은 상스럽다는 말로 '언문(諺文)'이라 하여 천하게 여기고 한자는 '진서(眞書)'라 하여 귀히 여기며, 양반 사대부만 배우고 쓰면서 나머지 백성들은 모두 판무식쟁이로 만들었다. 더욱이 대부분 양반가에서도 여성들에게는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백성들은 무지렁이로, 나라의 발전을 이룰 수 없었다.

지구 반대편 서양은, 바다 건너 일본은 교육의 대중화로 일찍 근대화를 이뤘는데도 우리나라는 계급사회로, 남존여비의 전근대의 생활로, 허우적거리다가 나라조차 빼앗겼고, 그 뒤로도 찌든 생각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다가 국토가 반쪽인 채로 해방이 된지 60여 년이 흘렀다.

이오덕 선생님께서 나에게 보낸 편지
 이오덕 선생님께서 나에게 보낸 편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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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가르침들

첫 만남 이후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2003년 8월 26일까지 직접 찾아뵌 일은 10여 차례, 전화통화로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나는 선생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나의 많은 스승 가운데 이오덕 선생님은 마지막 스승님으로, 내 인생에 가장 큰 영양을 주신 분이다. 내가 입때까지 글줄이나 쓰고 사는 것은 다 선생님의 가르침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스승의 그늘을 밟을 수도 없는, 가르침을 십분의 일도 실천치 못하는 못난 사람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에게 주신 글과 책 가운데 몇 대목을 뽑아 오늘 아침 여러분에게 전한다. 평생을 어린이 교육에 몸 바친 이오덕 선생님은 '우리말 우리 글 바로 쓰기' 못지않게 사람 교육에도 깊은 생각과 뚜렷한 철학을 가지셨다.

사람이 사람답게 자라나려면 반드시 겪어야 하는 삶이 있다. 그 첫째는 일하기인데, 사람은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고, 일을 해야 사람이 된다. 일을 해야 사람다운 태도를 가지게 되고, 일을 해야 사람다운 생각을 하게 되고, 사람다운 감정을 가지게 된다. 세상의 모든 이치도 일하는 가운데서 깨치고 찾아낸 것이 가장 올바르고 확실한 앎이다. 몸과 마음의 건강도 일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다. 사람의 행복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즐겁게 하는 것 말고는 없다.

일이 즐겁고 그 일이 공부가 되려면, 그 일이 자연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사람은 모름지기 자연 속에서 자연을 따라 자연의 한 부분으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삶이다.

옛날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보다 더 큰 스승은 없었다. 사람이 자연을 배우고 자연을 따라 살면 모든 것을 얻고 모든 것이 제대로 된다.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비로소 아름답고 참된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자연을 배반하고 거역하면 사람은 병들고 스스로 망한다. 자연이 없는 교육은 죽음의 교육이고, 자연을 떠난 삶은 그 자체가 죽음이다.

평생 어린이와 우리말을 사랑했던 이오덕 선생님
 평생 어린이와 우리말을 사랑했던 이오덕 선생님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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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가난의 체험이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다.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가난해야 물건을 귀하게 쓰고, 가난해야 사람다운 정을 가지게 되고, 그 정을 주고받게 된다.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이 넉넉해서 흥청망청 쓰기만 하면 자기밖에 모르고, 게을러지고, 창조력이고 슬기고 생겨날 수가 없다. 무엇이든지 풍족해서 편리하게 살면 사람의 몸과 마음이 병들게 되고, 무엇보다도 자연이 다 죽어 버린다. 가난은 어렸을 때 체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이 가난은 책으로 배울 수 없다. 가난하게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를 아무리 책을 통해 읽어도 자기 스스로 굶어 보지 않고는 굶주린 사람의 마음을 몸으로 알 수는 없다. 텔레비전으로 어떤 사람들의 가난을 보았다고 해도 그것은 가난을 구경한 것밖에 안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교육에는 일과 자연과 가난이 사라졌다. 이 세 가지 가운데 그 어느 한 가지만 없어도 참된 사람 교육은 될 수 없는데, 이 세 가지가 죄다 없으니 무슨 교육이 되겠는가? 지금 우리 교육은 이 세 가지를 싹 쓸어 없앤 자리에 딱딱한 콘크리트 구조물을 세우고 그 속에 아이들을 가두어 놓고는 책만 읽고 쓰고 외우고 아귀다툼을 하게 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무슨 사람다운 교육이 되겠는가?"
- 박도 지음 <길 위에서 아버지를 만나다>의 끄트머리에 붙인 이오덕 선생님의 말씀

2009년 가을, 기자가 이오덕 선생님의 무덤을 찾아가다
 2009년 가을, 기자가 이오덕 선생님의 무덤을 찾아가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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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남긴 말씀

선생님이 돌아가신 제삿날 아침, 나는 마지막 남긴 말씀에 귀를 쫑그린다.

이제 우리가 정말로 외세에서 풀어 놓이게 되고, 우리 아이들이 모두 펄펄 살아나게 되는 그날이 하루빨리 오도록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온 세계에 자랑할 말과 글자를 가졌고, 어는 민족에 못지않은 재주와 정신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직도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갈라진 반쪽 땅에서조차 산산조각으로 나뉘어 추악한 이기주의로 희망 없이 살고 있다.

그 근본 까닭은 국민교육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잘못된 글의 질서로 길들이기 때문이고, 글의 세계에 아이들을 가두어놓기 위해 서로 잡아먹는 교육으로 아이들을 짓밟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사람답게 자라나도록 하는 일, 이것이 우리 겨레가 스스로 해방되는 길이다."
- 이오덕 지음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339쪽


태그:#이오덕, #우리말 살려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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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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