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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겨울 그리고, 게르
 몽골의 겨울 그리고, 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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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휠체어 타고 떠나온 고향

그의 어머니는 마테차를 보온병에 항상 담아 놓았다. 그는 휠체어에 앉아 차를 마시며 창밖을 본다. 창밖엔 백야의 초원을 비추는 교교한 달빛, 눈발을 쓸어가는 삭풍 소리에 혹시나 하고 귀를 쫑긋 세웠지만 발자국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울란바토르에서 450km가량 떨어진 오지인데다 엄동설한의 추위까지 기승을 부리니 해가 저문 뒤에는 나그네든 가축이든 발이 꽁꽁 묶인다.

간바트르 철몽(25·몽골국립대학교 4학년 휴학)은 동장군이 진군하던 지난해 11월에 고향 바양아트라솜을 떠나왔다. 은빛 자작나무들이 구시렁거렸다.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추운데 그 불편한 몸을 끌고 어딜 간다고 그래!' 양떼를 몰고 가는 목동이 탄 말의 가슴에는 담요가 감싸여졌을 정도로 맵찬 추위였다. 철몽은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나보긴 했지만 외국에 가는 건 처음이었다. 두려움 반 설렘 반.

한국의 수도 서울에선 말과 양을 볼 수 없었다. 빌딩과 아파트, 차량과 인파가 장악한 도시는 북새통이었다. 그래서 항구도시로 향했다. 생전 처음 본 바다, 비릿한 해풍은 초원의 바람 못지않게 싱싱했다. 그곳 항구도시에서 스물다섯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곳 예수쟁이들로 인해 '기적'을 몸소 체험했다. 휠체어를 타고 떠났던 고향, 어머니 곁으로 걸어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몸과 맘이 기쁘다. 철몽은 여수은현교회 선교팀과 함께 8월 10일 몽골로 돌아간다.

인민의 벗이 된 예수쟁이들... 꿈 너머 꿈과 장학금

몽골 장학생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김정명 목사
 몽골 장학생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김정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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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은현교회, 그 예수쟁이들은 인민들의 냉대에도 무릅쓰고 철몽의 고향 마을과 인근 빈데르솜 등을 찾아왔다. 그들은 지난 2005년부터 시작해 매년 여름이면 여러 마을을 찾아가 우물을 파주고 자가 발전기를 설치해 어둔 밤을 밝혀주었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 도시 빈민들을 위한 밥퍼 봉사까지 시작했다. 이 도시에는 거리를 떠도는 아이들만 해도 4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처럼 굶주리는 몽골 이웃들이 늘어나면서 밥퍼 봉사 확대가 시급한 가운데 도움의 손길이 보태졌다. 한정남(67) (주)샤니 전 사장은 오는 8월에 몽골을 방문해 빵 기계 설치를 논의할 계획이다.

가난한 유목민들에겐 양과 염소 등 가축을 사주었는데 거저 주는 것은 아니었다. 양과 염소 등 가축이 새끼를 낳으면 또 다른 유목민에게 받은 만큼 나누어주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유목민들의 삶은 점차 나아졌지만 몽골과 인도, 북한 등 가난한 나라 사람들을 돕는 데 힘을 쏟는 그 교회의 살림은 넉넉지 못하다.

그들은 초·중·고등학교의 가난한 학생들에겐 장학금과 학용품을 매년 나눠주고 있다. 특히, 오지의 가난한 대학생 35명에게 4년 동안 전액 장학금을 주고 있다. 그 도움이 없었다면 부모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유목민으로 살고 있거나 도시 빈민 또는 노동자로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철몽도 장학금 수혜자다.

그들은 장학금을 지급하거나 가축을 나눠주면서 예수를 선전하거나 생색내지 않았다. 그 교회 우두머리인 김정명(64) 목사는 '너희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주면서 너희 것을 준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고 단단히 가르쳤다.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했다. 김 목사는 다만, 가난한 몽골과 이웃을 위해 '꿈 너머의 꿈'을 가져달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그 '꿈 너머의 꿈'이란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게 아니라 빌 게이츠처럼 나눔 실천을 통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다.

불청객이었던 그 예수쟁이들은 이제 좋은 벗이 됐다. 마을 인민위원장과 군수, 교장은 물론이고 유목민부터 어린이까지 그들이 매년 방문하는 8월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들은 몽골인의 자부심을 매우 존중해주었다. 가난한 친구를 사귀거나 도울 때 조건을 달거나 무엇을 돕는다고 행세를 해선 곤란하다. 지금은 가난한 민족으로 전락했지만 세계를 제패했던 칭기즈칸의 후예란 자존심과 기상이 가슴 깊숙이 남아 있다.

올해 8월에도 몽골을 방문한다. 올해 방문은 다른 해보다 뜻 깊다. 작년부터 시작된 문화센터가 완공되기 때문이다. 이 센터는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김 목사의 친구인 김희찬(64) 목사가 아내를 기리기 위해 내놓은 헌금과 여수은현교회 등에 의해 기쁨을 맛보게 됐다.

몽골선 불치판정, 7개월 만에 일어서

철몽을 일으킨 주역들... 김충석 시장(왼쪽에서 4번째) 철몽(왼쪽에서 5번째), 박기주 원장(왼쪽에서 6번째)
 철몽을 일으킨 주역들... 김충석 시장(왼쪽에서 4번째) 철몽(왼쪽에서 5번째), 박기주 원장(왼쪽에서 6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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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철몽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교정을 걸어가는데 갑자기 축구공이 날아왔고 그 공을 맞고 쓰러졌다. 짧은 한 순간에 꿈 많은 소녀에서 절망에 빠진 하반신마비 장애인이 됐다. 울란바토르의 큰 병원까지 찾았지만 의료진들은 불치라는 판정을 내렸다. 몽골 여인들은 초원처럼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달리 방법도 없었기에 열여덟 살 때부터 여태껏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다.

7개월의 재활치료 끝에 두발로 일어선 몽골여대생 철몽
 7개월의 재활치료 끝에 두발로 일어선 몽골여대생 철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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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나라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매우 큰 고통이다. 그가 대학에 입학했지만 학교 입구에서부터 강의실 곳곳 그 모든 턱이 가로막았다. 그 턱을 고치려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애를 썼지만 그 턱은 꿈쩍하지 않았다. 그렇게 좌절을 맛본 철몽에게 '꿈 너머 꿈'이란 사치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 장애인의 운명이 2012년 세계엑스포를 개최하는 항구도시 여수에서 바뀌었다.

지난해 12월 초순, 김정명 목사 초청으로 여수를 찾았다. 12월 중순에 귀국해야 했기 때문에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잠시 구경한 뒤 귀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김충석(71) 여수시장과 박기주(50) 여수사랑재활요양병원 대표원장 등을 만나면서 계획이 바뀌었다. 김 시장은 철몽의 하반신을 두드려보더니 "철몽 같은 사례를 직접 경험했다. 일어설 수 있다"면서 자신의 사위(이대목동병원 의사)와 활법치료사 등을 동원했고, 박 원장은 일체 비용을 무료로 도우면서 재활치료에 심혈을 기울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구였던 철몽의 몸을 일으켜 세운 것은 항구 예수쟁이들의 깊은 사랑과 믿음이었다. 만약, 의술과 시설이 뛰어난 서울의 어느 대형병원이었다면 그 의술과 시설의 고급 수준을 확인한 채 휠체어에 몸을 실고 귀국했을 것이다. 꾸준한 돌봄과 정성을 다한 재활치료, 그 거칠고 뜨거운 사랑으로 감싸주지 않았다면 재활치료를 중도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해풍이 싱그럽긴 했지만 고향 자작나무 숲속 바람이 그리웠고, 그 보살핌과 사랑이 컸지만 어머니를 더 보고 싶어 했다.

재활치료 3개월이 됐지만 여전히 하반신은 무감각했다. 그건 위기였다. 서울의 대형병원도 재활치료를 불신했는데 항구의 작은 병원에서 가능할까? 믿음과 불신의 기로에 선 박 원장은 믿음을 선택했다. 박 원장은 "철몽, 우리 끝까지 해보자"고 했고, 김 시장은 "의지를 가져야 한다"며 질책과 격려를 보탰다. 그들의 파도처럼 거친 사랑은 몽골인의 기질과 어딘가 닮았다. 오라버니 같은 김송식(49·전남도청 공무원) 안수집사는 출퇴근하면서 병원을 찾곤 했는데, 재활의지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혼을 냈지만 그보다는 눈물의 기도가 더 많았다.

그건 기적이었고 드라마틱한 사건이었다. 4개월을 조금 넘기면서 차갑기만 했던 발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발가락에 힘을 주니 꼼지락거렸다. 물리치료사와 간호사들이 놀라기 시작했고 다른 환자들은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그리고 재활치료 7개월째이던 지난 6월 초순, 홀로 일어서게 됐다. 휠체어 타고 가던 예배당을 사람과 기구 등 일체의 도움 없이 혼자 걸어서 들어가자 박수를 쳐주었다. 교인들은 직립보행, 기적의 사건발생 기념으로 신발을 사주었다. 다시 예쁜 구두를 신을 수 있다니….

[에필로그] 작은 자를 향한 그 사랑

왼쪽부터 통역인 텔게르마(33), 철몽, 김정명 목사, 김송식 안수집사
 왼쪽부터 통역인 텔게르마(33), 철몽, 김정명 목사, 김송식 안수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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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여자는 잘 울지 않는다. 그런데 철몽은 그 사랑을 생각하다가 눈물 흘렸다. 아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새어나왔다. 그건 기쁨의 눈물, 은혜의 눈물이다. 그는 예수를 잘 모른다. 그 예수를 만난 적도 없지만 그 예수쟁이들의 사랑에 은혜 입으면서 그 사랑을 따라하고 싶어졌다고 고백했다.

김정명 목사가 "예수님께서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했다. 철몽이 일어서게 된 것은 기적이 아니라 작은 자를 향한 사랑의 승리"라고 말했다. 철몽은 그 말씀처럼 작은 자를 향한 사랑의 길, 승리의 길을 걷고 싶다.

한국사람 특히, 항구의 예수쟁이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그 은혜로 인해 '꿈 없는 장애인'에서 '꿈 너머 꿈'을 갖게 됐다. 그는 그 사랑에 보답하고 싶어 했다. 우선 복학해서 나머지 공부를 마친 뒤 한국에서 더 공부하고 싶고 그 배운 지식으로 몽골을 위해 일하고 싶다.

이제 철몽은 무엇이든 될 것이다. 인민위원장 혹은 군수, 그 이상 그 무엇이 되든지 간에 사랑을 나누는 작은 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그는 고향에 돌아가서 인민위원장과 친구, 자작나무 숲에게 가서 말할 것이다. 한국 사람 특히, 항구 예수쟁이들의 사랑과 친절에 대해 증거하게 될 것이다. 철몽은 몽골과 한국을 잇는 일꾼이 되어 또 다른 고향인 여수를 찾아오고 싶다고 했으니 그 날이 기다려진다.


태그:#몽골, #여수은현교회, #하반신마비, #꿈 너머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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