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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으로 감동 전하는 김찬식 시인
 시와 음악으로 감동 전하는 김찬식 시인
ⓒ 김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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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의 '우편배달부' 김찬식 시인

"시와 음악은 같습니다.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공직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훌륭한 서비스로 시민들에게 감동을 주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김찬식 시인은 말한다.

그렇다. 김찬식 시인은 사랑의 '우편배달부'같은 사람이다. 영화 <일포스티노> 속의 '마리오' 시인처럼 김찬식 시인은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 주는 인물이다. 그는 그의 시와 음악과 노래를 원하는 곳이 있으면 퇴근 후 어디든지 달려간다.

'시인이자 색소폰 연주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김찬식 시인은 20여년 동안 어려운 이웃들에게 시와 음악을 선물해 왔다. 그는 이렇게 1인 4역의 분주한 생활을 하면서 틈이 나면 '시와 음악'으로 보다 나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데 주력해 온 공무원이기도 하다.

'시와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고 감동을 전해준다고 강조하는 김찬식 시인은, 20여년 전 모(某) 청소년회관에서 공연 업무를 맡으면서 색소폰을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한 색소폰 연습은 각고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

주말에는 산에 들어가서 연습했고, 새벽에는 한적한 바닷가를 찾아서 색소폰을 익혔다. 그의 등단시 <공동묘지에서>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 색소폰을 연주하다가 떠오른 시상을 그대로 옮긴 시인데 이 시는 월간 <순수문학>의 신인상 작품이 된다.

김찬식 시인은 현재 부산시인협회 부회장 역할을 맡아 열심히 부산시단을 위해 일하고 있고, 공무원 사회에서는 '별난 재주 별난 공무원', '이웃 찾아 감동 주는 피리부는 사나이', '사랑의 공무원' 등으로 불리고 있다.

지난 7일 모처에서 주관한 '시가 있는 작은 음악회' 행사에 참가한 김찬식 시인을 대연동 소재 클래식 레스토랑 필하모니에서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였다.

찾아가는 시와 음악회의 김찬식 시인과 정설미 시인(오른쪽)
 찾아가는 시와 음악회의 김찬식 시인과 정설미 시인(오른쪽)
ⓒ 김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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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우편배달부' 같은 공무원 

- 늘 바쁘게 이웃을 찾아 다니시는 연주회를 하시는데 이런 열정은 어디서 비롯되는지요 ?
"(웃음) 부끄럽습니다. 열정이라는 표현보다는 성실하다는 표현이 어울리겠습니다. 부단히 열심히 살아오다보니 정말 요즘에 와서야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바쁘게 살다보니 어느새 내 나이가 오십을 넘었습니다. 결코 내 생은 심한 굴곡의 삶은 아니지만, 청년기에는 유별나게 나와의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과의 싸움은 아직도 진행형인 것 같습니다. 이것을 남들은 열정이라고 표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쩜 내 성격의 유별남에서 비롯된 것인지 매사에 완벽을 추구하려다보니 스스로에 대한 채찍질을 많이 합니다. 가장 완벽함이 가장 부족함이란 말이 있습니다만, 인생은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행복을 만들어나간다고 감히 생각합니다."  

- 김 시인의 예술의 원천은 어디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웃음) 와 질문이 너무 어렵습니다. 어느 시인이 팔할의 바람이 나를 키웠다고 말한 바 있지만 나는 부산바다가 나를 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산은 나의 고향입니다. 넘실거리는 푸른 부산 바다가 나에게는 문학과 음악의 원천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3남 1녀의 셋째로(위로 형님 둘 아래로 여동생 하나) 부산의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서 성장했습니다.

유년시절을 보낸 동네는 바닷가이면서도 농사도 짓는 그런 동네였습니다. 지금부터 40-50년전 부산은 지금의 부산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도심을 벗어난 변두리는 시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자란 동네는 요즘같은 여름철이면 집에서 조금 걸어가면 곧장 해수욕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집 앞에서 바다가 보이고 집 곁으로는 논과 밭이었습니다. 동네의 나지막한 산이 있었는데 그 산만 넘으면 영화관이 있었습니다. (사이) 학창시절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의 눈을 피해 몰래 영화 감상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때 감상한 흑백 영화들이 지금 글쓰기를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웃음)

사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는 몹시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이 오늘날 내 문학과 음악의 밑거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문학이든 음악이든 결핍에서 비롯되는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태어난 부산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어느 고장못지 않게 풍부한 해산물이 생산되는 바다와 천혜 관광 자연에 대해 늘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합니다. 만약 내가 부산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문학과 음악을 했을까 생각합니다.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말처럼 태어난 고장의 환경이 그 사람의 성품이나 운명을 정하는데도 많은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부산 시민을 위한 색소폰 연주 무료 공연 중의 김찬식 시인
 부산 시민을 위한 색소폰 연주 무료 공연 중의 김찬식 시인
ⓒ 김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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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산실, 시의 산실, 김찬식 시인의 아트방
 음악의 산실, 시의 산실, 김찬식 시인의 아트방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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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으로 봉사하다

- 색소폰은 언제부터 배우기 시작했습니까 ?

"색소폰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었습니다. 내가 처음 색소폰을 배울 때는 지금처럼 색소폰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70· 80세대의 향수를 달래고자하는(옛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심)의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색소폰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고, 색소폰 연주자들에 대한 인기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한 20년 전만 하더라도 색소폰 악기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색소폰이 대중화되지 않아 교습도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일은 마음이 그 절반을 한다고 힘들어도 배우는 보람에 고달픈줄 몰랐습니다. 저가 색소폰에 심취된 것은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유사하여 인간의 정서에 가장 부합되는 악기란 점이었습니다.

처음 교습할 때 약간은 힘들었지만 점점 연주실력이 늘고 연주회의 횟수가 빈번해지면서 남을 즐겁게 한다는 점에 나는 매우 매력을 느꼈습니다. 만약 내가 색소폰을 연주하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남을 위해 음악 봉사할 수 없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색소폰과의 인연으로 각종 축제나 큰 문화행사 등에 색소포니스트로서 초청받고 있으며 지하철 문화마당이나 사회복지시설 등 불우시설 등에 봉사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에게 신이 준 작은 재주로 작지만 이웃들에게 시와 노래의 즐거움을 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아버지 무덤 앞에서 색소폰을 불다

- 아,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럼, 시쓰기는 언제부터 하셨는지요 ?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보면 어릴적부터 문학을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시절에는 아동을 위한 문학책이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머릿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끄적였습니다. 그것이 시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에 남앞에 드러내어 놓지 못하였습니다. (웃음) 그 시절 모아둔 시편만 모아두었다면 지금은 서너 권의 동시집이 되었을 것입니다. (웃음)

시와 음악의 만남을 위한 시간, 오른쪽 클래식 레스토랑 필하모니 대표 조영석 음악인, 가운데 아동문학가 겸 시인 최향숙 씨, 왼쪽이 김찬식 시인
 시와 음악의 만남을 위한 시간, 오른쪽 클래식 레스토랑 필하모니 대표 조영석 음악인, 가운데 아동문학가 겸 시인 최향숙 씨, 왼쪽이 김찬식 시인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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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격적으로 시를 쓴 것은 고등학교 시절입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도심 속이었습니다만, 그래도 운동장이 꽤나 넓어 나무들이 많고 꽃들이 잘 가꾸어진 정원처럼 아담했습니다. 쉬는 시간이나 방과 이후 운동장의 등나무 벤치에 시를 참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 시절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유별나게 고독을 즐기며 방황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내게 위로가 된 것은 시쓰기와 음악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부모님은 옛날분이라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 없는 짓을 한다고 꾸지람을 많이 했습니다.

얼마나 철이 없었는지 대학입시에 매진하여야 할 시기에도 부모님의 속을 참 많이 태웠습니다. 어느날이었을까.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내가 아끼는 기타를 마당에 던져 버려 그만 악기가 박살이 나기도 했었습니다. (웃음)

그 당시 왜 그렇게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던지 모릅니다. (웃음) 이제 나도 부모가 되어 자식을 키우는 아비의 입장이 되니, 비로소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의 심정을 안다.'고 하는가 봅니다. 뒤늦게 철이 들어 아버지 생각에 찾아가서 색소폰을 연주하다가 영감이 떠올라 쓴 시가 <공동묘지에서>입니다."

아비의 무덤가에서 피리를 분다.
한 무리의 까마귀 떼들이
허공을 가로질러
눈 내리는 산언덕으로 날아간다

피리소리는 온 묘지를 울려
언 땅은 녹아내리고 못 박힌 침실은 열려
수십 수백 년간 잠들었던
무수한 영혼들이 일시에 깨어나고
백골의 춤이 난무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피리소리에 허물어지고
오직 존재하는 것은 시공의 합치이다
산 자의 미래가 눈앞에 펼쳐져 있고
죽은 자의 과거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백골의 춤은 바람에 실려
온 묘지를 적시니
마른대지와 헐벗은 나뭇가지도
생명의 춤을 춘다

구멍 난 백골처럼 비워야 한다
비운 자만이 춤을 출 수 있다
가벼운 자만이 춤을 출 수 있다
영혼이 깊고 무거운 자만이
치열한 고뇌의 삶을 살은 자만이
아름다운 백골의 춤을 출 수 있다

겨울이 짙은 눈 내리는 날
공동묘지로 가라
가서 피리를 불어라
산자와 망자가 어우러지는
경계가 초월되는 광경을 만끽하라
세상사에 섞고 찌던 영혼을
씻고 오라
향기로운 피리소리와
백골의 춤으로 적셔오라

- 김찬식의 시, <공동묘지에서> 전문

시와 음악으로 이웃 찾아다니는 김찬식 시인의 창작방
 시와 음악으로 이웃 찾아다니는 김찬식 시인의 창작방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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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 부문에 있어서도 수상이력도 화려하다고 들었습니다. 자랑 좀 해 주시면 합니다.
"대학시절에는 대학가요제가 한창 인기가 있었습니다. 나는 고교시절에 익힌 통기타실력을 그 시절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창작곡도 만들어 발표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대만큼 유명해지지는 않았지만, 모(某) 대학음악제에 듀엣으로 출전하여 영광의 수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수상 때문인지 시민회관이나 대학교 축제 등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대학생 신분으로서는 제법 인기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웃음)

정말 철이 없이 고독과 낭만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돌이켜 생각하면 나에게 그때의 고독과 방황과 낭만이 나를 성숙케 한 거름이라고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는 취업 공부를 위해 음악과 시쓰기를 그만 둔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취업한 곳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모(某) 기업이었습니다. 그러나 1-2년 일하다보니 내가 꿈꾸는 직장과 너무 달라 사표를 냈습니다. 그때 신혼이었는데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사표를 던지고 나온 나를 보고  아내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웃었습니다.

그런 탓에 아내는 종종 내게 '이상주의자'니 '꿈꾸는 낭만주의자'라고 놀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술인은 현실적인 시각으로 인생의 잣대를 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반듯한 공무원이 무슨 색소폰 연주를 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미래 사회의 공무원상은 맡은 바의 임무도 충실해야 하지만, 문화예술분야에도 전문적인 식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 행정 서비스의 안목을 높일 수 있다고 봅니다."

- 장시간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김찬식 시인의 시와 카툰
 김찬식 시인의 시와 카툰
ⓒ 송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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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 속에는 밤마다 우주가 열린다
달과 별, 산과 들판이 물속에 피어난다
만상을 담고도 무거워하지 않는 연못이여
물결로 슬퍼하고 봇물 흐르는 소리로 아파하자

내 안에는 날마다 잔치가 열린다
너와 나, 선과 악 가슴속에 함께 노닌다
고단한 생의 지게지고 할 말 잃은 자여
시로 슬퍼하고 목 맺힌 노래로 아파하자

-김찬식 시, <연못> 전문

김찬식 시인은 누구 ?
<순수문학>으로 등단. 시집<누구나의 가슴에도 강물은 흐른다>, 현재 부산시립박물관 근무. 부산시인협회 부회장, 국제펜클럽 부산본부 감사, 부산문인협회 이사, 부산시 공무원문인회 회원, 시울림동인. 색소포니스트로도 활동하면서, 부산 바다축제 초청연주, 대한민국 시인대회 초청연주, 부산 길축제 초청연주, 부산시청 수요콘서트 초청연주, 지하철 문화마당 출연 등 무료 봉사 초청연주 수십여회 참여, 올드팝 색소폰앙상블 회장역임, PBO웹진 2009 신년호 STAR 공무원 선정 외 다수 음악봉사활동함.


태그:#김찬식 시인, #아버지, #공동묘지, #순수문학, #색소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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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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