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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살에 나는 무엇을 했나. 기억나는 것이라곤 직장동료들과 밤새워 술 마시고, 새벽에 종로3가에서 택시를 타려고 기다리다가 추위에 술이 깬 기억. 아니면 이 산 저 산 가릴 것 없이 무작정 떠돌던 산행. 무엇을 기다리며, 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하루를 보내면 하루를 무사히 보낸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뿌듯해 하며.

 

6월 6일 현충일에 충남 예산에 있는 충의사에 다녀왔다.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충의사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산온천로 153-5번지에 있다. 남쪽에는 수암산, 남서쪽에는 수덕사를 품고 있는 덕숭산, 서쪽으로는 한티고개, 북쪽으로는 가야산이 에워싸여 있고, 드넓은 예당평야가 서쪽으로 펼쳐져 무지렁이가 보기에도 명당자리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이곳에서 부친 윤황공과 모친 김원상 여사 사이에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23살까지 있었다. 이른 나이인 15세 때 배용순 여사와 결혼했다. 19세 때는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하여, 문맹퇴치 등 농촌 부흥운동을 벌였다. 20살 때에는 어린이에게 글을 깨우치고자 직접 농민독본을 저술하기도 했다.

 

 

ⓒ 허관  어록탑

 

 

미래를 현재의 토대 위에서 준비하자! 우리가 울긋불긋한 단풍잎을 꽃으로 알면 우리는 망할 것이다. 시절은 봄철이 아니요 만물을 죽이는 가을철이다. 우리는 삼동을 살아나갈 양식도 많이 준비하여야 하고 의복도 많이 준비하여야 격렬한 추위를 당할지라도 겁내지 않을 것이다. <윤봉길 의사 어록 중에서>

 

사물과 상황을 똑바로 인식할 수 있는 지식, 즉 나라를 빼앗긴 상황과 앞으로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려주려 했던 것이다. 윤 의사가 만 2세 때, 즉 1910년에 국권피탈의 계기가 된 한일병합조약이 이루어졌다. 일제는 천천히 우리나라의 국민의식을 잠식했다.

 

일제시대 국민 식민 통치는 1919년 3.1운동에 일어나면서 변화했다. 3.1운동 이전에는 재판 없이 즉결처분, 구류 또는 벌금 등 강압과 무력으로 통치하는 체제였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을 격은 일제는 우리 민족을 강압적으로는 지배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유화적인 문화통치 정책으로 전환한다.

 

문화통치 정책은 무력으로는 우리 민족을 다스리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선택한 정책이다. 당연히 그 속에는 고도의 기만성을 감추어 우리 민족을 식민 통치를 인정하게끔 했고, 친일 분자를 양성하여 우리 민족을 이간과 분열을 획책하는 정책이었다.  

 

 

칼보다 펜이 강하다는 말도 있듯이, 철권식민정책보다 문화식민정책이 더 치명적이다. 실제로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주는 약간의 자유에 현혹되어 타협이나 자치론, 민족성 개조론 등에 찬성하여 독립운동 내부의 분열을 가져오기도 했다.

 

윤 의사는 일제의 이와 같은 문화식민 정책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백성이 지식을 쌓아야 함을 인식하고 교육에 힘을 쏟았던 것이다. 윤 의사도 이를 알고 다 같이 울긋불긋 아름답지만, 단풍잎과 꽃을 구분할 수 있는 지식을 백성들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다.

  

교육열은 세계 최고, 독서량은 세계 최저

 

교육기관에 대한 지출액은 한국이 GDP 대비 7.2%로 OECD 평균 5.8%보다 높았다. 이 중 민간 기관에 대한 지출은 2.9%로 OECD 평균 0.3%의 10배 수준인 반면 공공기관에 대한 지출은 4.3%로 OECD 평균 5%보다 낮았다.<세계일보 2009년 4월 6일자>

 

국민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2008년 국민 1인당 월평균 독서량은 0.9권으로, 이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 최하위 수준이다.

 

베이컨은 동굴의 우상을 극복해야만 세계의 참된 모습을 알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동굴의 우상이란 자신이 가진 지식이 절대적이라 믿음으로부터 생겨난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이,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경솔한 생각을, 가벼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 군중심리에 휩싸이지 않고, 자신의 현 위치를 똑바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 위해서는 다방면의 지식 습득이 필요하다.

 

IT기술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문화의 국경이 사라진지 오래다. 선진 몇몇이 전 세계 정보시장을 독점해 세계정보 질서를 지배하는 미디어임페리얼리즘의 시대다. 많은 국가들은 경쟁적으로 자신의 문화를 타국에 침투시키는 문화식민주의에 혈안이 되어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 전 계적으로 유행하는 "한류열풍"이다.

 

윤봉길 의사가 자신의 고향에서 일제의 만행을 곧바로 규탄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에게 이를 비판할 수 있는 지식을 쌓게 했던 이유도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만행 규탄이 훨씬 더 쉽게 마을 사람들의 독립의지를 세울 수 있었는데 그는 왜 어려운 학문의 길을 선택했을까.

   

 

당장은 봉기를 일으켜 일본을 한반도에서 쫒아낸다고 해도, 무지한 백성은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고, 자신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살아온 뿌리를 알면, 어떠한 역경이 온다 해도 흔들리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대한민국 교육 현실은 "모두 우물 안 개구리"양성에 혈안이 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국제화에 휩쓸려 도서관 한 귀퉁이만 차지하고, 학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영어"가 지성의 광장인 상아탑에 득세 하고 있다. 철학은 사라지고, 빈틈없고 차가운 "수학"이 그 자리를 차지했으며, 인문학은 취직과 관련 없는 잉여의 학문으로 취급당하고 있다.

 

 

 

그의 영정을 보고 있노라니, 그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소리치는 듯하다.

 

이상을 실천하자. 사람은 왜 사느냐! 이상을 세우기 위하여 산다. 이상이란 무엇이냐? 목적의 성공이다. 보라 풀은 꽃이 피고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만물의 영장인 나도 이상의 꽃이 피고 목적의 열매가 맺기를 자신하였다.<윤봉길 의사 어록 중에서>

 

윤 의사는 이 말을 남기고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갔고 한다. 그리고 물통과 도시락 폭탄을 들고 인생의 "목적의 열매"를 맺고자 중국 홍구공원으로 갔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25세의 나이에 죽었다. 얼마나 확실한 삶인가. 종로 바닥을 해매며, 혈기를 산속에 뿌리며 다니던 나의 25살과 판이하다.

 

이는 지식의 힘이다. 그는 역사를 알았기에, 자신의 현재를 역사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역사 속에 영원히 존재한다. 그의 이와 같은 뚜렷한 목표의식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인류 사유의 집합체인 지식에서 잉태했다.

 

동굴에서 빠져나와야한다. 독선으로 무장한 자신의 머리를 해제시켜야한다. 나와 다른 생각에 대해 틀림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고민을 해야 한다. 이와 같은 행위와 사고를 위해서는 맨 먼저 지식을 쌓아야한다. 다 같이 붉게 아름답지만 "단풍"은 죽어가는 것이요. 꽃은 새 생명을 잉태함을 구분할 수 있는 지식이 필요하다.

 

<독서회를 만들면서 한 연설>

 

독서회를 만들어 책을 돌려보려면 우선 책이 많이 있어야 하겠는데, 우리 동네에서도 서울이나 공주 등지에 가서 공부하는 유학생들도 없지 않으니, 그들을 통하여 책을 구입하는 대로 구입해 놓고, 우리 모두가 그런 책들을 돌려가면서 읽읍시다. 그렇게 되면 지식의 범위도 넓어지고, 교육수준도 자연 높아지리라고 믿습니다.

 

독서회를 구성하고, 만든 규정

1. 낮에 일하다가 쉬는 사이, 밤에 야학이 파한 뒤에도 시간을 내어 독서한다.

2. 누구나 독서한 뒤 그 소감을 적어 두었다가 토론회 때 의견을 발표한다.

3. 제한된 책을 여러 사람이 읽어야 하는 관계로 가급적이면 빨리 읽고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


출처 :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

 


태그:#윤봉길, #충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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