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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란 잘 쓰면 약이 되고, 잘 못쓰면 독이 된다. 일찍이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돈은 최상의 종이고 최악의 주인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돈을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서 잘 쓰면 최고의 종이 되고, 부정한 방법으로 벌어 잘못 쓰면 최악의 주인이 되어 사람이 돈의 노예로 전락하고 만다는 경고다.

 

요즈음 혼자서만 잘 먹고 잘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이 활개를 치는 세상이다. 불법으로 번 돈을 5만 원권 돈뭉치로 110억 원이나 마늘 밭에 파묻어 숨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짜 회사를 만들어 4700여억 원의 세금을 탈세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마늘 밭에 돈을 숨긴 사람은 단 한 푼도 써보지 못하고 철창신세를 지고 있으니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의 종말을 보는 듯하다. 탈세를 한 사람들도 덜미가 잡혀 국세청으로부터 추징을 당하고 있다.

 

반면 세상에는 정반대로 선행을 베푸는 사람들도 많다. 끼니를 굶는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수백 포대의 쌀을 기부하거나, 거액의 돈뭉치를 동사무소나 공공기관에 놓고 가는 '얼굴 없는 기부천사'들이 그들이다. 그들을 볼 때면 일찍이 조선시대 류이주 선생이 실천했던 '타인능해(他人能解)'의 나눔 정신을 보는 것 같아 저절로 마음이 훈훈해진다.

 

230여년 전 조선시대 고택 운조루에는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려온 낙안군수 류이주의 타인능해 철학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는 마치 현대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는 것 같다. 이는 오늘날 부자와 권력자들이 본받아야 할 정신이 아닐 수 없다.

 

지리산에 여행을 오거든 자라나는 자손들과 함께 꼭 한번 전남 구례군 토지면 운조루에 들러서 선조의 나눔 정신을 느껴보아야 할 철학이다. 운조루를 방문하려는 분들을 위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류이주 선생의 고택과 그의 '타인능해' 철학을 집중 조명해 보았다.

 

열린 쌀뒤주가 집안을 지켰다

 

운조루 대문 입구에는 하마석이 좌우에 놓여 있고 그 뒤로 굴뚝이 나지막하게 서 있다. 호랑이 뼈가 걸려 있는 운조루의 솟을대문을 지나니 'ㄱ'자형의 사랑채가 고풍스럽게 펼쳐진다. 솟을대문 좌우로는 긴 행랑채가 이어져 있고, 사랑채 우측에는 앵두나무 꽃이 만발했다.

 

사랑채 밑에는 오래된 탈곡기와 여물통으로 보이는 통나무 통이 놓여 있다. 사랑채 토방 앞에는 잘 다듬어진 정원수가 고택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운조루는 남한 3대 명당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부잣집 양반가옥이다.

 

솟을대문에서 사랑채 부엌으로 통하는 길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경사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니 우선 커다란 쌀통이 눈에 띤다. 둥그런 원형의 쌀통은 밑동에 엄지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고, '他人能解(타인능해)'란 글귀가 보인다.

 

타인능해. '누구나 쌀뒤주를 열 수 있다'란 뜻이다. 즉 운조루의 집주인 류이주는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이 뒤주를 열어서 쌀을 퍼갈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나이가 230여 년이 넘는 원통형 쌀뒤주는 쌀 3가마는 족히 들어갈 만큼 크다.

 

조선시대 양반 부잣집 운조루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도 불타지 않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까닭은 바로 이 쌀통에 있다. 6·25전쟁를 전후하여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이 지리산 문화권이다. 빨치산의 본거지인 지리산 일대의 부자와 양반들은 목숨과 재산을 온전히 지키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류씨 집안만큼은 6·25전쟁을 거치면서도 온전했다. 다른 부자들은 집이 불타고, 총에 맞거나 대창에 찔려 죽었지만 류씨 집안에는 죽은 사람도 없었고, 운조루가 불타는 일도 없었다. 전쟁이 나면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쌓였던 개인적인 감정이 문제가 된다. 개인적 감정은 원한으로 증폭되어 그동안 인심을 잃은 부자는 집이 불타고 대창에 찔려 죽었다.

 

운조루가 전쟁 중에도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타인능해란 운조루의 철학 덕분이다. 쌀뒤주를 열어놓고 누구나 쌀을 퍼갈 수 있게 한 후한 인심이 운조루와 그 집 사람들을 지켜준 것이다. 버리고 비우면 살아난다는 자연의 법칙을 류씨 집안은 실천한 것이다.

 

처음 쌀뒤주를 열어놓았을 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대거 몰려들어 혼잡을 빚었지만 점차 그 수는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것은 쌀뒤주가 비면 다시 채워 놓으니까, 언제라도 쌀이 필요하면 가져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두세 끼 정도의 양만 가져갔다고 한다. 운조루 주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쌀은 한 해 수확량의 20%나 되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운조루의 쌀통을 믿고 게으름만 피우지 않았다. 가능하면 자기보다 더 배고픈 사람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이러한 마을 사람들의 정신은 운조루 주인 류이주가 실천하고자 했던 '나눔 실천'의 철학과 일맥상통한다.

 

"얼굴 없는 기부천사"로 이어지는 타인능해 정신

 

타인능해 철학은 '자비는 무적'이란 말을 떠오르게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게 조건 없이 베푸는 자비야말로 남을 살리고 자신도 살리는 길이다. 운조루의 타인능해 정신은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전북 전주시 금암1동사무소에서는 쌀뒤주를 현관에 설치해 끼니가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 금암새마을금고와 통장협의회, 새마을부녀회, 일반 주민들이 기증한 쌀을 담아두고, 쌀통 밑 서랍을 열면 5식구가 한 끼 밥을 지을 수 있을 만큼 쌀이 쏟아지도록 해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금암1동사무소를 필두로 점점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전북 정읍시 입암면을 비롯해서, 광주 금호1동, 주월동, 월산5동, 백운동, 화정3동, 강원 인제군 남면 등 전국 각지에서 결식 주민들을 위해 사랑의 쌀뒤주를 운영함으로써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또한 최근 불황 속에서도 전국에 '얼굴 없는 기부천사'들의 기부 행렬이 이어지는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연말만 되면 소외된 이웃을 도와달라고 전북 전주시 노송동 동사무소에 7년째 거액을 내놓는 익명의 독지가가 있는가 하면, 광주 송정동사무소에 익명으로 전달된 쌀 50포대, 경기 광명시 광명2동사무소에 역시 익명으로 전달된 쌀 20포대, 경기 시흥시 정왕동에 어느 독지가가 33개월째 전달하고 있는 쌀 100포대, 부산 동래구에 4개월간 전달된 쌀 120포대, 서울 성북구 월곡2동에 전달된 쌀 200포대 등 불황 속에서도 '얼굴 없는 기부 천사'들의 따뜻한 온정이 전국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 운조루

 

사랑채의 부엌은 바로 안채로 통한다. 안채로 들어서니 우선 학처럼 흰 목련꽃이 눈에 확 들어온다. 장독대 위에 만개한 목련꽃은 마치 수백 마리의 학이 날개를 펴고 앉아 있는 듯한 모습이다. 'ㅁ'자형의 안채는 안주인이 거처하는 거소와 잘 어울린다. 이는 마치 류이주 선생의 선비정신을 보는 것 같다. 목련꽃 그늘 아래에는 돌과 나무로 된 절구통 두 개가 놓여있고, 반석 위에 장독대가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마당 왼쪽 안채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는 맷돌과 돌확이 예스런 모습으로 놓여 있다. 확독이라고도 불리는 돌확은 곡식이나 양념을 가는 데 쓰는 타원형의 돌이다. 자연석을 우묵하게 파놓은 돌확은 적은 양의 곡식을 찧거나 마늘, 생강, 고추 등을 갈 때 맛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요긴한 도구들이다. 안채 중앙 마루 토방에는 사각형의 돌 상자가 하나 놓여 있다. 중앙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안주인의 세숫대야라고 한다.

 

지금도 류이주의 종손들이 거주하고 있는 안채는 운조루 식구들이 살아가는 살림공간이다. 그러니 안채를 방문할 때는 프라이버시를 지켜줄 수 있도록 조심해야 한다. 처마에는 새로 단 듯한 '운조루' 현판이 걸려 있다.

 

통나무로 만든 대청마루는 문이 뒤뜰로 열려 있어 통풍이 잘돼 매우 시원하게 보인다. 시렁에는 대나무로 만든 오래된 바구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안방 벽에는 호랑이, 공작새 등을 그린 그림이 노란 바탕에 수를 놓듯 그려져 있다.

 

안채의 맞은편에는 곳간이 있다. 곳간에는 나무로 된 몇 개의 항아리와 큰 상자가 놓여 있다. 오래된 장기판도 눈에 띤다. 곳간은 안주인들이 행세를 하는 권력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곳간에서는 200년을 넘게 곳간의 열쇠가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전수되는 여인들의 세리모니가 있었을 것이다.

 

안채의 풍경은 고요하고 고즈넉하다. 안채의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눈을 뗄 수 없는 그런 풍경이다.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의 풍경이라고나 할까?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마음속의 고향 같은 곳, 운조루의 안채는 그런 곳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나의 발길을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한다.

 

안마당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술을 저장해놓았던 또 하나의 곳간이 나온다. 이는 암수제의 주련에 '有朋自逺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라고 표현한 것처럼 반가운 문우들과 술 한잔 나누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는 데 쓰였을 것이다. 운조루 사람들이 시인 묵객들과 교류를 하며 대대로 써온 시조가 만여 편에 달한다. 저 술독은 운조루의 풍류정신이 깃든 술독이다. 

 

술 곳간에서 사랑채의 뒤뜰로 나가는 곳에는 아궁이가 셋 뚫려 있다. 이곳에서 돌거북이 나왔다고 한다. 소위 '금귀몰니'의 현장이다. 예부터 남부지방에서는 아궁이에 조앙신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조앙신은 아궁이를 관장하는 신이다. 안채의 부엌에서 돌거북이 나온 것은 이 집안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갈 것이라는 좋은 징조였을 것이다.

 

그러나 돌거북 역시 도난당하여 없어졌다고 한다. 운조루의 문화재 도난은 마치 이집트 고대 왕가의 무덤이 수난을 당하는 꼴과 비슷한 형태이다. 돈이 된다 하면 무조건 손을 대는 도둑들의 근성은 세계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이다.

 

'낮은 굴뚝', 보릿고개 배고픈 자를 헤아리는 '배려'

 

안채의 부엌에서 사랑채로 통하는 뒤뜰로 나가니 우물터가 나오고 또 하나의 장독대가 놓여 있다. 뒤뜰에 있는 굴뚝은 한결같이 낮다. 1m도 채 안 되는 굴뚝은 쇠똥처럼 주저앉아 있는 모양이다. 연기조차 제대로 빠져나가지 않을 것 같다. 양반가라면 보통 굴뚝을 높이 세워 권세를 높이고 연기도 잘 빠져나가게 했으련만 왜 이리 낮게 세웠을까? 

 

이는 운조루의 굴뚝을 낮게 세운 것은 마을 사람들의 보릿고개를 고려한 주인의 배려라고 한다. 양식이 없어 배가 고파 부항이 들 정도인데 양반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펑펑 나면 주린 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 것인가?

 

해서 류이주는 굴뚝을 낮게 만들어 연기가 밖으로 새지 않고 안마당에서 자연스럽게 흩어지도록 만든 것이다. 매운 연기를 마셔야 하는 집안 사람들의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배고픈 서민들을 고려한 굴뚝이다. 이는 타인능해의 운조루 철학을 실천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숨은 보석이다.

 

사랑채의 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 보니 천장에 서까래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활처럼 휘어진 상량목에 좌우로 배열된 서까래는 탁월한 예술적인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방에서 류이주는 시인 묵객들과 조우하며 풍류를 즐겼을 것이다.

 

그러나 류이주의 운조루 생활은 그리 길지가 않았다. 운조루는 1782년에 완공되었고 류이주는 1797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고작 15년을 산 것이다. 더욱이 해임과 등용을 오간 류이주는 운조루에 오랫동안 기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채 마루 밑에 놓여 있는 커다란 수레바퀴는 아직도 운조루의 정신을 돌리고 있는 듯하다. 저 수레바퀴로 200년 동안 곡식을 실어 날랐을 것이다. 나무로 된 수레바퀴는 마치 운조루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제 곡식 대신 마지막 남은 고택이라도 지탱할 심산일까? 수레바퀴는 시간을 역류하여 활동사진처럼 과거의 생활상을 비추어준다.

 

사랑채를 돌아나와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오래된 동백나무 한 그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이를 몇 백 년은 족히 먹었을 저 동백나무는 이 집안의 내력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동백나무 밑에는 함께 운명을 같이 했을 법한 낡은 기둥이 하나 놓여 있다.

 

운조루에는 정원수로 심어진 나무도 매우 아름답다. 연못 앞에는 백 년을 묵었을 배롱나무가 있고, 연못 중앙에는 예술적으로 구부러진 소나무가 서 있다. 앵두나무와 동백, 사랑채 토방 앞의 분재수, 그리고 집 뒤 산수유와 대나무 밭이 멋스럽다. 아름다운 나무들 때문에 운조루는 멀리서 바라보면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

 

운조루 사람들의 효심이 깃든 가빈터

 

동백나무 밑 행랑채로 이어지는 길로 나오는데 사당처럼 생긴 단칸 기와집에서 중년 남자가 문을 열고 나온다. 무슨 집인가 하고 속을 들여다보니 화장실이다. 양반가의 화장실은 사랑채와 멀리 떨어져 있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운조루의 이곳저곳을 돌아보느라 시간이 꽤 지났다.

 

진즉부터 자연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수세식으로 개조한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고 있자니 묘한 생각이 든다. 변소를 찾아 동네를 한 바퀴 돌아온 느낌이다. 화장실이 이렇게 멀리 있으니 필시 겨울에는 요강이 필요했으리라.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변소에서 나와 가빈터로 갔다. 가빈터란 조선시대 때 죽은 사람을 모셔두는 곳을 말한다. 사람이 죽으면 운명을 한 후 3일이 지나 입관을 한다. 그리고 가빈터에 3개월 동안 안치를 했다가 출상을 했다고 한다.

 

안치 기간에는 조석으로 상식을 올리고 삭망(음력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제례를 올렸다. 가빈터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운조루 사람들의 효도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운조루 사람들이 백 년을 넘게 기록해온 일기 내용을 보면 조상을 섬기고 부모님께 효성을 다하는 내용이 거의 대부분이다.

 

사랑채 앞 너른 마당을 지나 앵두나무 옆으로 가면 기왓장이 켜켜이 쌓여 있고, 그 뒤로 돌아가면 사당이 나온다. 사당으로 통하는 정원에는 노란 산수유가 거뭇해지며 봄의 여운을 남겨주고 있다.

 

사당은 문이 잠겨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운조루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는 일과 무덤을 돌보는 일도 소홀하지 않았다.

 

제실에는 류이주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아무리 탁월한 명당 터에 살더라도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다. 등용과 사직을 오가며 부귀영화를 누린 류이주도 이제 한갓 사당의 영정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타인능해 정신은 아직도 운조루와 함께 여실히 남아 있다. 시든 산수유꽃 사이로 대나무 잎새가 봄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운조루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호해야

 

이제 운조루를 떠날 시간이다. 나는 사당을 나와 안채의 뒤로 연결되는 좁은 길을 따라 다시 한번 운조루를 돌아보았다. 큰 사랑채 마루로 나오니 이 집 9대 종부인 이길순 할머니가 솟을대문 옆 평상에 앉아 마늘을 까고 있다. 낭자머리를 하고 비녀를 꽂은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 날 보아왔던 한국의 어머니 상이다. 필자의 어머니도 항상 머리를 감은 후 동백기름을 바르고 저렇게 평생을 비녀를 꽂고 다녔다.

 

묵묵히 마늘을 까고 있는 그녀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때 마침 그녀의 맏아들인 류홍수씨가 들어오더니 그의 어머니 옆에 앉았다. 그들 옆으로 다가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저 또 왔습니다."

"아이고, 또 오셨네."

"아드님 다친 머리는 좀 어떠신가요?"

"아직도 가끔 아프답니다."

 

10대 종손인 류홍수씨는 문화재 도둑들에게 머리를 크게 다쳐 2년 여 동안이나 병원 신세를 지고,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 그의 말과 행동이 아직도 좀 부자연스럽고 말도 어눌하다. 실로 안타까운 모습이다. 

 

그동안 운조루는 무려 17번이나 도둑을 맞았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운조루에 귀한 문화재가 있다는 TV 방송이 전파를 타고 나가자 문화재 도둑이 더 극성을 부렸다고 한다. 그러므로 언론기관은 알리는 데만 급급하지 말고 문화재를 보호하는 일에도 앞장을 서야 할 책임이 크다.

 

어떻게 보면 운조루 사람들은 조상이 남겨준 고택을 지키며 살아가느라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대고택과 조상이 물려준 소품을 지키기 위해 전투나 다름없는 생활을 해 오고 있는 것이다. 집은 허물어지고, 살림은 줄어들고, 사람은 다치고….

 

그러나 운조루를 관람하러 오는 관광객은 고택과 명당의 우수성만 떠들어댔지 고택을 지키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후손들의 피나는 노력은 말하지 않는다. 운조루는 겉으로는 꽤 부유하고 화려하게 보이지만 속은 타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나마 최근 문화관광부가 나서서 집을 보수하고 있는 것은 퍽 다행스런 일이다.

 

현대문명의 편리성을 거부하고 불편한 고택에서 살아가는 어려움은 누구나 견딜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문화재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이다. 이는 마치 유리상자 속에 박제되어 있는 죽은 집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운조루는 다르다. 운조루 사람들은 문명의 이기를 넘어 옛날 방식 그대로 고택을 지키고 살아가고 있다. 때문에 운조루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고 살아 움직이듯 생기가 돈다. 

 

"아직도 아들의 건강이 심히 걱정이 된답니다."

"그렇겠군요. 다시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두 분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마늘을 까며 이길순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한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전 운조루를 다섯 번이나 방문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이집 9대 종부인 이길순 할머니를 만난다. 그녀의 손길과 온정이 있기에 이 집은 따뜻하고 살아 있는 느낌이 든다. 이 집을 지은 류이주 어른의 나눔과 배려의 정신을 그녀를 통해 느낀다고나 할까?

 

이제 운조루는 어느 한 개인의 재산을 넘어, 옛 선조들의 나눔과 배려의 정신이 깃든 타인능해 철학을 전수하는 문화재다. 열린 쌀뒤주, 낮은 굴뚝, 소박한 안채, 풍류와 선비정신이 깃든 사랑채 등 운조루에는 곳곳에 남을 배려하는 정신이 보석처럼 숨겨져 있다. 이러한 고귀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고택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호해야 마땅하다.

 

그동안 운조루의 소장품은 숱하게 도난을 당하며 수난을 당하고 있다. 아직도 운조루의 소장품은 극성스런 도둑 때문에 집에 보관을 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피난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서글픈 일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1987년 조사한 운조루의 소장품은 전적 326종 811책(32종 145책은 성균관대학교에 기증), 고문서 26종 636건, 향촌문서 40종, 서화류 및 현판으로 추사 김정희 편액 21점, 팔곡병풍, 글씨 16점, 석봉 글씨 등 서첩 26점, 채용신의 이산공 영정 등 11점 등이 있다. 이밖에도 흰삿갓, 흑립, 수레, 확독 등 많은 민속자료가 있다. 운조루를 그린 오미동 가옥도 등 많은 그림과 문화재를 도둑들이 훔쳐갔다.  

 

이러한 고귀한 문화재는 운조루 인근에 전시관을 지어 진열하고 국가가 엄격히 보호해야 한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도난당하여 프랑스와 일본에 가 있는 것은 우리가 문화재를 소홀히 보관했기 때문이다. 이는 민족의 수치다. 작은 문화재라도 소중하게 보호하고 보존하여 우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운조루의 소중한 문화재가 도난당하여 엉뚱한 곳에 보존된다는 것 역시 우리의 수치다. 오래된 것은 소중하고 역사적인 교육 가치가 크다. 당국이나 관람객이나 운조루는 매우 소중한 고택이라고 떠들어대면서도 CCTV 하나 설치하지 않고 있다.

 

운조루는 이제 집도 종손의 행색도 초라해지고 쇠락했다. 실제로 운조루 사람들은 집을 보수하고 문화재를 보호할 경제적인 능력이 없다. 그러나 운조루는 겉은 허름하지만 곳곳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눔과 배려의 숨은 보석을 간직하고 있다. 류이주 선생의 타인능해 정신을 200년 넘게 실천하며 살아온 집이다.

 

운조루는 우리들이 갈구해온 우리들의 오래된 미래의 모습이다. 따라서 우조루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보호해야 소중한 문화재다. 또한 운조루를 찾는 사람들에게도 타인능해의 나눔철학을 전수해주는 전당으로 이용해야 할 아름답고 값진 고택이다.


태그:#구례 운조루, #타인능해 쌀뒤주, #운조루의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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