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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평리 계족산에 걸린 무지개
 수평리 계족산에 걸린 무지개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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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3월 30일. 아내가 섬진강 매화를 보고 싶다고 해 여행배낭을 챙기고 있는데, 오랜만에 정용문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와는 2003년도에 칠레의 땅 끝 파타고니아를 여행을 할 때 우연히 만난 인연이 있었는데, 그 후로 피차 통 소식이 없었던 차였다.

"아니, 이거 누구요. 정말 오랜만이요. 정형, 그런데 거기 어디요?"
"네, 찰라님, 오랜만입니다. 저 지금 지리산 섬진강변에 살고 있어요."
"뭐? 지리산? 우리 내일 섬진강 매화마을 가는데?"
"아, 그래요? 잘 되었군요. 그럼 내일 구례읍에서 한 번 만나지요."

7년 전에 만난 그가 잊지 않고 전화를 한 것도 놀라운데, 지리산 섬진강변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이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다음날 우리는 전남 구례읍에서 그를 만났다. 다슬기국으로 점심을 먹으며 정용문씨로부터 지리산으로 이사를 온 사연을 들었다.

세계일주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도시생활이 답답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라는 것. 그래서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귀농할 결심을 했다는 것. 그는 아내와 함께 제주도에서부터 강원도 고성까지 자전거를 타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3개월간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그동안 4살짜리 아들까지 함께하게 된 그는 고성에서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작년 12월에 구례 섬진강에 도착했는데, "여기야말로 우리가 살 곳이다!"는 생각이 들어 즉시 빈 농가를 수소문하여 귀농생활을 시작했다는 것.

"그래 여기서 살 만한가요?"
"네, 도시에서 사는 것보다는 훨 좋아요."
"허허, 다행이군요. 어디 집이나 한 번 구경합시다."
"그런데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천은사 앞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어요."

그는 천은사 내 '이속'이라는 찻집을 인수를 하여 그곳으로 이사를 가게 됐단다. 아직은 30대 후반의 젊은 나이라 무언가 벌이를 해야 하는 참에 마침 지리산에서 알게 된 지인이 찻집을 그만두게 되어 그 찻집을 인수하게 됐다는 것. 이 말을 들은 아내가 귀가 번쩍 뜨이는 표정으로 정색을 하며 그에게 물었다.

"그럼 그 집은 어떻게 하고요?"
"그게... 다른 사람에게 인계를 해야 하는데… "
"그 집, 우리한테 넘겨주세요."
"사실... 문득 찰라님 부부가 가장 적임자라는 생각이 떠올라서 전화를 하게되었어요."
"허허, 이거 고맙소이다."

아름다운 섬진강
 아름다운 섬진강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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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평소에 시골생활을 원했던 아내와 나는 섬진강변으로 이사를 가기로 즉석에서 덜컥 결정했다. 우리가 오랫동안 염원했던 일이 순간의 찰나에 이루어진 셈이었다. 칠레의 땅 끝에서 만난 인연이 이어져 그가 살던 집을 인수해 지리산자락에서 살게 되다니... 사람의 인연이란 참으로 기묘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40년 동안 살아왔던 생활 근거지인 서울에서 먼 지리산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은 우리부부에게 일생일대의 큰 변화였다.

정말 지리산으로 이사 가는 건가요?

드디어 6월 19일, 친구의 1톤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구례로 출발했다. 환갑을 넘은 나이에 지리산 산골로 이사를 간다고 하니 모두가 놀랐다. 나이가 들면 오히려 의료시설과 생활시설이 편리한 도시로 이사를 들어오는 것이 요즈음의 추세인데, 몸도 성치 않는 아내와 어떻게 시골에서 살아가려고 하느냐고 하며 모두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더욱이 아내는 심장이식수술을 한 지 2년을 갓 넘긴데다가 하루에 인슐린 주사를 네 번이나 투여할 정도로 심한 당뇨를 앓고 있어 병원 문턱을 내 집처럼 자주 드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정말 지리산 산골로 이사를 가는 건가요?"
"네, 이번 주에 이삿짐을 옮기기로 했어요."
"믿기지가 않는군요. 어떻게 그런 용기와 결심을 했는지…"

이웃집 203호 아주머니는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10년이 넘게 한 아파트에서 함께 살아온 사이인데 우리가 지리산으로 이사를 간다는 소식을 듣고, 반신반의하며 무척 놀라워했다. 203호 부부는 며칠 전 점심까지 사며 송별회도 해 주었다.

익숙한 것들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문화시설, 교통, 쇼핑, 병원시설 등 온갖 편리한 것들이 다 모여 있는 서울. 그러나 너무 많은 것들로 넘쳐나는 서울은 소음과 공해로 가득 차 있다. 그 편리하고 익숙한 것들의 곁을 떠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버린 셈이지만 나는 여전히 가진 것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시골에서 생활할 최소한의 물건만 실었는데도 1톤 트럭이 넘쳐났다. 여러 가지를 버리려고 무척 노력을 했지만 나는 여전히 가진 것이 넘쳐나고 있다. 끼니를 해결할 도구와 몇 벌의 옷, 읽을 책 몇 권만 가지고 떠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나는 책에 대한 욕심이 많았고, 아내는 부엌살림, 가재도구 등 필요한 것들을 챙기다 보니 1톤 트럭이 넘쳐난 것. 서울을 출발하여 덜컹 거리는 이삿짐 차를 타고 지리산까지 오는데 인도의 한 성자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다.

날마다 울어대며 유리창을 기어오르는 청개구리
 날마다 울어대며 유리창을 기어오르는 청개구리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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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 한 성자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숲속에서 홀로 살았다. 어느 날 다른 성자가 그에게 <바가바드기타> 한 권을 주고 갔다. 성자는 그 책을 읽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쥐가 책을 쏠아버린 것을 보고, 쥐를 쫒기 위해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기로 했다. 고양이에게 먹일 우유가 필요하게 되자 이번에는 젖소를 키웠다.

그렇게 되자 그는 이 짐승들을 혼자서 돌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던 끝에 젖소를 돌봐줄 여자를 한 사람 구했다. 숲속에서 몇 해를 지내는 동안 커다란 집과 아내와 두 아이와 고양이 떼와 젖소들과 여러 가지 잡다한 것들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성자는 걱정이 되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혼자서 살 때, 자신이 얼마나 행복했던가를 돌이켜 보았다. 이제 그는 신을 생각하는 대신 아내와 자식들과 젖소와 고양이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한권의 책이 이토록 엉뚱한 사태를 몰고 온 것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지었다.

20년이나 젊은 청년으로 살아가게 되다

"전남 구례군 간전면 수평리 9**-1*". 우리가 살아갈 집 주소다. 먼 길을 가는데, 꾸역꾸역 쑤셔 넣은 짐들이 삐거덕 거렸다. 남원 밤재터널을 넘어 구례읍을 지나갔다. 노고단에는 운해가 신비하게 걸려 있었다. 지리산 산신령이 곧 나타날 것만 같은 장엄한 풍경이었다. 아픈 아내와 함께 시골 벽지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그래도 나는 자연의 신과 좀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다소 마음에 위안이 되었다. 토지면을 지나 섬진강 간전교를 건너 점심때쯤 수평리에 도착했다.

우리가 살아갈 집은 30여 호 되는 수평리마을 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동쪽엔 백운산, 남서쪽엔 계족산, 북쪽에는 지리산이 둘러싸인 삼각지 지역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비가 오락가락 하더니 계족산에 무지개가 환상적으로 걸렸다. "오, 아름다워요!" 무지개의 신이 우리를 환영해 주는 것일까? 이삿짐을 자동차에서 내려 옮기는데 동네 어르신들이 오다가다 들여다보며 한마디씩 했다.

"아이고, 이렇게 젊은 친구가 우리 마을로 이사를 오니 겁나게 조네."
"암 그렇고말고. 젊은 친구들이 좀 이사를 와야 마을이 살아나제잉~"

섬진강 구례벌판에서 노고단으로 피어 오르는 운해
 섬진강 구례벌판에서 노고단으로 피어 오르는 운해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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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어르신들은 환갑을 넘은 나를 '젊은 친구'라고 불렀다. 젊은 친구들이 도시로 거의 다 빠져나가다 보니 요즈음 시골에는 폐가가 즐비하게 늘어나고, 칠십을 넘은 노인들만 모여 산다. 우리가 살아갈 집도 빈농가주택의 하나다. 이 집에서 살았던 정용문씨가 나를 50대 초반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다가 흙을 묻히지 않는 도시사람들을 시골 어르신들은 10년 정도 더 젊게 보는 것 같다.

그러니 이제 아내와 나는 지리산 섬진강변에서 20년 정도 젊은 청년(?)으로 살아가게 된 셈이다. 어쨌든 젊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어르신들은 빙긋빙긋 웃으며 짐을 들어서 옮겨주기도 했다. 옷장을 운반할 때에는 "가만가만, 요렇게 저렇게, 살살…" 마치 운전 교습을 하듯 안방까지 들어와 거들어 주었다.

시골 인심이란 이런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너무나 소박했다. 이웃집 사람들은 논밭을 오가며 호박 한 덩이, 오이, 야채, 고추 등을 한 움큼씩 문지방에 수시로 놓아주고 갔다.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시골 인심. 어디 도시에서는 꿈이나 꿀 일인가? 아파트 벽 하나 사이를 두고 사람이 죽어서 나가든, 도둑이 들든 무관심 속에 살아가는 것이 도시의 삶이다.

낭만은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면사무소에 가서 전입신고를 마치고 나니 여직원이 "간전면민이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며 주민등록증을 건네주었다. 구례군청에 가서 자동차 번호판도 새 번호판으로 바꾸었다. 낡은 번호판을 새 번호판으로 바꾸고 나니, 구입한 지 10년을 넘긴 고물차가 새 차로 변했다. 차도 사람만큼 젊어진 셈이다. 마을로 돌아오다가 이장님을 만났다.

"어디들 다녀 오슈? 워메, 자동차가 새차로 변했네."
"네, 전입신고를 하고 자동차 번호판을 갈고 오는 길입니다."
"오메, 인제 진짜 우리 마을 주민이 되어뿌렸네잉~. 이거 입주 축하 잔치를 한번 벌려야것는디잉."
"이장님,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맥가이버처럼 집을 수리하며 20년 젊게 살아가는 지리산 청년이 되다.
 맥가이버처럼 집을 수리하며 20년 젊게 살아가는 지리산 청년이 되다.
ⓒ 박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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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아내와 나는 '구례군 간전면 수평리 주민'이 되었다. 주소를 이전하고 나니 어쩐지 마음이 더 떳떳해지고 편안해지는 느낌이 든다. 내가 태어난 땅은 제1의 고향이고, 인생의 거의 모두를 살아온 서울이 제2의 고향이라면, 인생의 말년을 보내게 될 섬진강은 제3의 고향이다.

허지만 시골생활은 생각보다 그리 녹록치만은 않았다. 우선 낡은 집을 여기저기 손을 봐서 수리를 해야 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금방 허물어지고 만다. 부엌, 화장실, 문틀, 모기장, 방충망… 손을 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집도 사람이 살며 습도와 온도를 맞춰주고, 수시로 손을 봐야 무너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서울처럼 집을 수리할 사람을 금방 부를 수도 없다. 10km 떨어진 읍내에서 수리공들이 금방 오지도 않을 뿐더러 한 번 부르면 출장비에다가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러다보니 서투른 솜씨이지만 멕가이버처럼 손수 고쳐서 살아야 한다. 날마다 일을 해도 일어나면 또 일이 생겨났다. 생전 해보지 않는 서투른 일을 하다보니 일은 더디지만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육체는 힘이 들지만 밤 9시가 되기 전에 톡 골아떨어지곤 했다. 허지만 다음 날 아침은 언제나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일찍 일어나 새로운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파리와 모기 등 벌레는 또 어찌나 많은지. 잠을 자다가 밤중에 아내가 한 번, 내가 한 번씩 지네에게 물리는 소동이 일어났다. 비상약이 없어 달걀을 으깨서 소금에 섞어 바르고 먹고 하며 지네의 독을 빼내야 했다. 벌도 한 번 쏘였다. 이제 벌레들을 내쫒기보다는 아예 친구가 되기로 했다. 금년엔 비가 많이 온 탓인지 밤마다 청개구리가 유리창에 올라왔다. 도시에 사는 동안에는 시골생활을 전원과 낭만이 있는 곳으로 늘 꿈꾸곤 했었는데…. 그러나 낭만은 대가를 그 톡톡히 치러야 했다.

그래도 역시 시골은 사람 사는 맛이 난다. 우선 사람이 적은 시골은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항상 이웃의 안부를 묻고 서로 돕고 산다. 계절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풍경 속에서 신의 존재를 느끼고, 삶의 영감을 얻는다. 텃밭을 가꾸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당에 세평 텃밭을 만들어 배추, 무, 상치, 시금치, 파, 부추 등 야채를 심었다.

세평 텃밭에서 우리 두 식구가 먹을 야채를 그런대로 자급자족할 수 있었다. 지난 11월 17일에는 텃밭에서 기른 배추와 무로 김장을 했다. 배추 43포기, 무 31포기로 김치를 담그고 나니 부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절반은 벌레가 다 먹어 치웠지만 무공해 야채로 김장을 하고 나서 아내는 부러울 것이 없다며 흡족해 했다.

푸짐하고 싼 구례장날..
 푸짐하고 싼 구례장날..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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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품을 제외하고는 모든 물건이 서울보다 배가 쌌다. 시안이네 세 식구가 한달을 사는데 30만 원이면 되고, 개구리집 두 식구는 15만 원이 들어간다는 말이 믿기지가 않았는데, 몇 달을 살고 나니 이해가 갔다. 푸진거리는 자급자족을 하고, 필요한 물건은 구례장날 가서 사오는데 물건 값이 무척 싸다. 교통비가 들지 않고, 외식비, 경조사비 등 겉치레 비용이 덜 들어간다. 아프지만 않으면 서울 생활비의 절반 정도면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내년에 형편이 닿으면 밭을 300평 정도 임차를 해서 농사도 지어볼 계획이다.

텃밭에 보리를 심다

김장을 하고 난 무청을 끈으로 매서 처마에 달아 놓았다. 시래기를 만들기 위해서다. 겨울 텃밭에는 궁리 끝에 보리와 양파를 심기로 했다. 김장거리를 뽑아낸 텃밭이 휑하고 허전했기 때문이다. 구례장에 가서 보리씨를 한홉만 달라고 했더니 할머니가 하늘을 보고 허허 웃으며 손바닥을 쳤다.

"세상에 보리 한 홉만 달라는 사람도 다 있네잉~."
"그게, 할머니 텃밭에 좀 심으려고 그래요."
"근께 텃밭에다 보리를 심는다 이거제잉~? 그거 쬐끔 심어서 뭐하려고?"
"네, 내년 봄에 보릿국을 좀 끓여 먹으려고요."
"보릿국 끓여먹으면 징하게 맛있기는 하제잉~ 옜다 젊은이 이거 그냥 가지고 가쇼잉~."

인심 좋은 할머니가 공짜로 준 보리씨를 가져와 텃밭을 갈아엎고 보리씨를 뿌렸다. 11월 18일, 희망의 보리씨를 뿌리고 나니 기분이 상쾌했다. 그런데 김장에다가 보리씨까지 뿌리는 등 가을 일을 다 마치고 나서,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인지 다소 무리를 한 아내가 그만 덜컥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우환이 도둑인데, 심장이식환자들은 감기만 걸려도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한다. 기침이 심해 토혈까지 한 아내를 데리고 서울 아산병원 응급실에 부랴부랴 입원을 했다. 보름 동안 입원 치료를 하고 나니 아내의 상태가 좋아졌다. 대신 병원비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빨리 구례로 가고 싶어요."
"완전히 나아서 가야지."
"이만하면 됐어요. 내 몸 상태는 내가 더 잘 알아요. 텃밭에 심은 보리씨도 궁금하고...."
"주치의와 상의를 좀 해 봅시다."

시래기를 말려 무청을 만들다.
 시래기를 말려 무청을 만들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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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서울이 싫단다. 복잡한 거리를 보면 눈곱이 낄 것만 같고, 생명이 없는 콘크리트 벽을 보면 그만 가슴이 답답해진단다. 오래 있으면 오히려 다른 병이 날 것 같으니 어서 구례로 가자고 한다. 주치의에게 상담을 하니 다음 날 퇴원을 해도 좋다고 했다. 퇴원 즉시 기차를 타고 구례로 내려갔다.

구례구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섬진강변을 달려갔다. 굽이굽이 지리산을 휘돌아 흘러가는 섬진강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맑은 물, 신선한 공기! 돈을 아무리 주고도 살 수 없는 자연의 치료제요 보약이 아닌가! 심장병 환자에겐 신선한 산소가 특효약이기도 하다. 수평리 마을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간 아내가 입이 함박처럼 헤헤 벌어졌다.

"여보, 저기 파란 보리 싹이 났어요!"
"어디? 와, 정말이네!"

텃밭에는 보름 전에 심은 보리가 파랗게 싹을 틔우며 돋아나고 있었다. 그렇다! 보리처럼 싱싱하게 겨울을 이겨내자! 마지막 남은 12월 캘린더 한 장을 넘기며 감회에 젖어본다. 결코 잊지 못할 2010년! 저 캘린더 뒤에는 날마다 새로운 20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에게 2010년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해다. 지리산 산골에서 20년이나 <젊은 청년>으로 살아가게 되었으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2010년, 나만의 특종



태그:#지리산, #구례, #섬진강, #귀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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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여행, 작은 나눔, 영혼이 따뜻한 이야기 등 살맛나는 기사를 발굴해서 쓰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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