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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7일)은 24절기 가운데 21번째 절기로 1년 중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대설(大雪)입니다. 태양의 황경이 225°에 도달한 때로 농촌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한기가 시작되는 때이지요.

 

 

날씨도 '대설' 이름값을 하려는 모양입니다. 6일 오후에 발표된 기상예보를 보면 7일부터 전국 대부분 지역의 기온이 영하권으로 뚝 떨어지고 바람까지 불어 무척 추워진다고 합니다. 강원도 산간지방에는 대설 예비특보가 발효될 예정이라고 하는군요.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따끈따끈한 화롯불이 생각나고, 막내 누님이랑 동생이랑 닥나무 창호지 문짝 앞에 앉아서 숨은그림찾기를 하던 추억도 아슴푸레 떠오르는데요. 온갖 동물의 형상을 고르고 찾아내면서 상상력을 키웠던 놀이로 기억합니다. 

 

을씨년스러워진 겨울 들녘

 

대설은 양력으로 12월 7, 8일경에 듭니다. 눈이 많이 내린다고 해서 대설이라고 했다는데, 우리 마을은 아직 첫눈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절기는 역법의 발생지이자 기준 지점인 중국 화북지방 일기를 따라 붙인 이름이니 꼭 이 시기에 적설량이 많다고는 볼 수 없겠습니다.

 

추수가 끝난 요즘 우리 마을 들녘은 가끔 철새들만이 오갈 뿐 그야말로 황량하고 을씨년스럽습니다. 불볕더위 아래에서 흘린 농부들의 구슬 같은 땀이 전설처럼 회색빛으로 남아 있어 파장한 시골 장터의 스산함이 묻어납니다.

 

저렇게 거칠어진 들판에서, 생명의 숨결이 되살아날지 의문이 들 정도인데요. 그러나 옛날 코흘리개들에게는 씨름도 하고 썰매도 타면서 뛰놀던 놀이터일 뿐이었습니다. 논바닥에 눈이 쌓이거나 꽁꽁 얼면 마구 달리고, 엎어지고 자빠지면서도 마냥 즐거웠으니까요.

 

예전 어른들은 '동짓달과 섣달에 눈이 많이 오면 풍년이 든다'고 했습니다. 보리농사를 많이 짓던 시절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는 말인데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푸릇푸릇 자라는 보리가 안쓰럽게 보였을 터 이불처럼 덮어주는 함박눈이 무척 고맙고 반가웠을 것입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은 보리가 자라서 잘 여물 수 있도록 기운을 더욱 실하게 해서 이듬해 봄에는 풍년을 예약했고, 눈밭에서 뛰노는 아이들도 옹긋옹긋 자라는 보리의 끈질긴 생명력을 닮아 강인하고 힘차게 자랐습니다. 

 

지금은 거칠고 쓸쓸해진 들녘을 철새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논보리 이모작이 가능했던 예전에는 보리가 주인공이었습니다. 한시도 땅을 놀리지 않았던 우리네 부모들은 추운 겨울에도 논에 보리를 심어 자식을 먹여 살리고 공부도 시켰지요.  

 

어머니에게 삶은 메주콩 얻어먹기도  

 

대설은 항상 음력 동짓달 초에 들어 '11월 절기'로도 표기하는데요. 농한기임에도 아녀자들 할 일이 더 많은 때이기도 합니다. 간장, 된장, 고추장의 주재료인 메주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었지요.

 

 

제가 사는 집 앞마당에도 메주들이 매달려 있습니다. 지난 10월 중순 메주콩을 수확한 집주인 아주머니가 하순에 삶아서 만들었는데요. 보온용 비닐 옷을 걸친 메주들이 초겨울의 짧은 해를 원망하는 것 같았습니다. 

 

먹을거리가 귀했던 50-60년대에는 메주콩을 삶는 날도 잔칫날에 버금가는 기쁜 날이었습니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메주콩을 삶으면 집안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는데요. 주걱을 쥔 어머니 손이 바빠지기 시작하면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메주콩은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가마솥에 삶았습니다. '따다닥' 소리를 내면서 타들어가는 장작불이 지치도록 삶으면 눈만 흘겨도 뭉개질 정도로 콩이 익는데요. 어머니가 주걱으로 퍼주는 메주콩을 호호 불면서 친구들과 나눠 먹으면 꿀보다 맛있었습니다.

 

24절기에서는 '입동-소설-대설-동지-소한-대한'까지 3개월을 겨울로 치는데요.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와 눈이 내리는 절기, 1년 중 밤이 가장 긴 절기, 크고 작은 추위가 몰아치는 절기로 각각 나눠서 표시하고 있습니다.

 

11월은 한겨울이라 대설 동지 절기로다/ 바람 불고 서리치고 눈 오고 얼음 언다/ 가을에 거둔 곡식 얼마나 되었던가(중략) 여자들아 네 할 일이 메주 쓸 일 남았구나/ 익게 삶고 매우 찧어 띄워서 재워 두소(생략)

 

이상은 농경사회였던 시절에 1년 열두 달 동안 농가에서 하는 일들을 읊은 조선 시대 가사 '농가월령가' 11월령의 일부입니다. 

 

우리 조상은 음력 10월 중순을 넘어서면 콩을 삶아 메주를 만들어 띄우고 정월에 장독에 소금물을 붓고 메주를 넣어 장을 담갔습니다. 메주로 된장과 간장, 고추장을 만들어 먹었고, 삶은 콩을 볏짚과 함께 두어 만든 청국장도 즐겨 먹었습니다.

 

콩으로 만든 다양한 발효식품을 만들어 먹은 것은 가축을 이용해 경작했던 농경문화에서는 육류를 소비하기가 어려웠고,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식품이 콩이었기 때문으로 풀이됩니다. 

 

그러나 콩은 단백질 소화효소인 트립신의 작용을 억제하는 단백질과 복부 팽만감을 유발시키는 물질, 그리고 각종 사포닌류를 포함하고 있어, 영향학적 가치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단점을 우리 어른들은 발효를 통해 훌륭하게 극복했지요.

 

예전에 대설은 메주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는 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경제가 성장하면서 곳곳에 정육점이 넘쳐나고 값싼 외국산 쇠고기를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요즘에는 육류 소비가 늘어나 부족한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콩 발효식품을 먹을 필요가 없어졌지요.

 

그러나 콩에서 얻어지는 여러 영양소는 심장병과 뇌졸중을 예방해주고 비만과 고혈압에도 좋다고 합니다. 또 콩을 발효해서 만든 된장, 청국장 등은 몸속의 병균을 죽여 없애는 방식이 아니라 몸 밖으로 몰아내 물리친다니 '콩은 밭에서 나는 쇠고기'라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게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음력 2월 1일을 '콩 볶아 먹는 날'로 정하고, 겨울에 부족했던 영양소를 채웠던 옛 어른들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인데요. 한바탕 눈이라도 펑펑 내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심신이 피로해진 사람들 마음을 백설이 꿈꾸는 겨울로 채워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다가올 엄동설한의 시련을 이겨내고 찬란한 봄날을 건강하게 맞이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대설, #메주, #첫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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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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