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1월 18일, 어젯밤에 프랑스 남부 아끼텐(Aquitaine) 지방의 빌뚜레(Villetoureix)라는 마을의 프랑스 농부 브와이에(Boyer) 선생님 댁의 민박집에 도착하여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잠을 자다가 소변이 마려워 잠이 깨었다. 그런데 너무 캄캄한 것이다. 방안에도 복도에도 인공의 불빛은 아예 없었다. 더듬더듬해서 복도에 나가 화장실 문을 더듬었으나 화장실 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잘못하면 주인이 매우 사랑하는 잘 생긴 개를 밟을 수도 있겠고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여자들이 자는 방으로 들어가는 실수를 할지도 몰라 별 수 없이 밖으로 나갔다.
 
밖에 나오니 하늘에 별이 너무 총총했다. 우리 어린 시절에도 하늘에는 저리 별이 총총했었는데 이제 도시의 하늘에서 저런 총총한 별들을 볼 수도 없다. 프랑스 남부의 아끼텐지방의 밤하늘은 너무 아름다웠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침을 했는데 프랑스 사람들은 아침은 간단하다는 것이다. 모두 같이 모여서 먹는 것도 아니고 일어나는 데로 먹는 다는 것이다. 식사를 하면서 어젯밤에 하도 컴컴해서 화장실을 찾느라고 혼이 났다는 애기를 하면서 저녁에 조그만 전깃불이라도 켜놓아야 할 게 아니냐고 했더니, 가이드가 프랑스 사람들은 환경문제를 끔찍하게 생각하니 조금 불편하더라도 참으라는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전깃불 하나에도 co2의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서 그렇게 깜깜한 밤으로 지낸다나.

 

우리는 브와이에 선생님과 사모님의 차를 나누어 타고 어디론가로 향했다. 나는 사실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브와이에 사모님께 여쭈어 보았어도 어디로 가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남편 차만 따라간다는 것이다. 광활한 평원에 해바라기, 옥수수, 포도밭이 펼쳐지다가 도르도뉴(Dordogne)의 아름다운 강과 숲, 시골풍경과 성벽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느 중소도시에 도착해서 주차를 하기에 아, 여기가 우리가 관광할 목적지인 것을 알았다.

 

그 도시는 샤를라(Sarlat)라는 도시였다. 나는 솔직히 그 도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갔다. 도시의 외관만 보고 느낀 바는 타임머신을 타고 서양의 중세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건축물들이 중세의 고딕양식이며 이끼가 끼고 상처투성이여서 칙칙한 느낌이다. 도시 전체가 나이께나 들었음직한 늙은 건물들이다.

 

사를라의 자유광장으로 향하는 골목길을 가다가 일행은 우연히 낡은 화실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아담한 체구의 머레이요(Mireio)라는 할머니 화가의 화실이었는데 우리에게 무척이나 친절하셨다. 할머니 화가는 부친이 이 마을에 들어와 1100년대 건물을 사서 지금도 그 건물을 물려받아 화실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머레이요 할머니 화가는 3층에 걸쳐있는 화실을 동양인 관광객들에게 속속들이 보여 주셨다. 정리되지 않아 너절하기까지 했지만 예술가의 화실은 정리되지 않아 더 멋이 있었다. 머레이요 화가는 자신이 사인한 자신의 책을 선물해 주셨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바로는 프랑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참 친절한 국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관광객에게 자신의 안방을 보여준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은 데 말이다.

 

우리는 사를라의 자유광장으로 갔다. 광장에는 흰 마네킹 같은 것이 서서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움직이면서 관광객이 옆에 가면은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사진을 찍으면 자세를 취하기도 해서 처음에는 로봇으로 착각을 했다. 나중에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사람이 직접 한다는 것이다. 참 대단했다. 몇 시간을 한결같이 그 동작으로 관광객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관광객이 던져주는 동전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깜박 잊고 동전도 못 던져주고 나왔다. 무척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사를라의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푸아그라(Foiegras)라는 것이다. 푸아그라는 거위나 오리의 간으로  만드는데 서양요리의 캐비어, 트뤼플과 함께 3대 진미로 꼽힌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를라의 자유광장으로 가니 많은 음식점이 있었다. 이곳에서 푸아그라 요리로 했는데 뭐가 맛있는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그냥 느끼한 프랑스 음식일 뿐이다. 내일은 다시 파리에 가니 파리의 우정식당에 가서 된장국에 밥 먹을 생각 밖에 없었다. 

 

도르도뉴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인 샤를라는 9세기경부터 수도원을 중심으로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1962년에 발효된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77개의 건축물이 기념물로 지정 복원되었고 2002년에는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벽돌, 기와장 하나라도 보존한다고 한다. 사를라의 특산물로는 푸아그라통조림, 호두, 송로버섯 등이 유명하고 수요일과 토요일에 열리는 재래시장이 볼거리로 유명하다고 한다.

 

우리는 사를라를 떠나 다시 어디론가 떠났다. 도르도뉴 지방은 지중해성 해양성 기후 때문에 따뜻하고 들과 숲이 넓어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선사시대부터 중세 때까지 인류가 이곳에 군락을 이루고 살았는데 도르도뉴에는 자연동굴, 자연피난처 등의 유적들이 많았다.

 

먼저 암벽에 동굴을 파서 원시인들이 기거를 했던 유적지를 구경했다. 그런데 놀란 것은 그곳에 원시인들만 살았던 게 아니라 중세 근대까지 그곳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곳에는 현생인류의 시초인 크로마뇽인의 두개골, 원시인들이 사용했던 석기, 이런 것들뿐만 아니라 아마 프랑스 혁명을 피해서 이곳에 피난 온 난민들이 남긴 근대 유물 등도 함께 전시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그곳에서 정조대란 것을 실제로 보았다. 내가 알기로는 중세 십자군전쟁에 징집당해 나가는 남자들이 자기가 없는 사이에 집에 남겨둔 아내가 바람을 피울까 봐 정조대를 아내에게 채워놓고 열쇠는 자기가 가져갔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참으로 정조대란 것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를 않았다. 그것은 말쟁이 들이 만들어 놓은 말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도르도뉴의 메이슨 동굴에 살았던 사람들의 유물에서 실제로 정조대를 보았다. 구리로 만든 팬티모양의 정조대, 용변 보는 구멍만 남긴 채 벗을 수도 없게 열쇠까지 달려있었다. 이것을 보고 유럽 사람들이 동양 사람들보다 더욱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을 만들었는지 머리가 좋아서인지 알 수가 없다. 여자들이 그런 정조대를 차고 얼마나 불편한 삶을 살았을까. 정말 비인륜적인 도구다.

 

도르도뉴 지방은 인류문명이 시작된 곳이고 이를 잘 보존해서 살아있는 생태교육장이었다. 도르도뉴에는 40만 년 전에 인류가 살았던 암벽도시 생 크리스토프(La Roque Saint Christophe), 라스코(Lascaux) 동굴벽화 등 30개의 유적지가 있다는 데 유명한 라스코동굴벽화는 보지를 못했다. 라호크생크리스토프만 돌아보았는데 생크리스토프는 암벽도시라 일컫는다. 높이 80m, 길이 1kw의 절벽에 주거지를 만들었던 구석기인들부터 중세까지의 주거생활 형태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암벽 거주지 중 하나로 유네스코에 등록된 세계의 문화유산이라고 했다.

  

 


태그:#도르도뉴, #아끼텐, #사를라, #푸와그라, #정조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여행에 관한 글쓰기를 좋아합니다. 여행싸이트에 글을 올리고 싶어 기자회원이 되고자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