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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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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이다. 100년 전 오늘, 조선이 낳은 대장부 안중근은 중국 여순감옥에서 31세의 짧은 생애를 접었다.

100년 전 이날 여순지방에는 새벽부터 찬비가 내리고 있었다. 유교철학에는 하늘과 사람이 합일체라는 '천인합일설(天人合一說)'이 전한다. 또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도 있다. 하늘과 사람, 사람과 하늘이 합일이고 서로 감응한다는 학설이다. 수운 최제우는 여기서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도출했다. 한대의 학자 동중서(董仲舒)는 "하늘은 인간과 같은 희로애락이 있다"고 주장했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하기 15년 전인 1895년 전봉준 장군이 일제에 처형되던 날도 하루 종일 궂은 비가 내렸다. 대한제국 말기 조선의 두 영웅이 구국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싸우다가 일제에 붙잡혀 순국하던 날, 하늘도 무심치 않아서 비를 내렸다. '천인감응'이었다.

안중근 의사, 1910년 3월 26일 숨 거둬

안중근 의사는 순국의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멀리 고국의 부인이 섬섬옥수로 지어 보낸 우리 옷으로 갈아입고 동쪽을 향해 묵도하면서 붓을 들었다.

'장부가 비록 죽을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처할지라도 기운이 구름과 같다.'

이날 아침 형무소장이 직접 안중근 의사를 데리러 왔다. 감방을 나와 형장으로 걸었다. 형무소장이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명령에 의해 사형을 집행하겠다. 남기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지금 말하라."

안중근 의사는 머리털 하나 흔들리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 것도 남길 말이 없다. 다만 내가 한 일은 동양평화를 위해서였다. 한·일 양국이 협력하여 평화를 이루기를 바란다. 그것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싶다."

안중근 의사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기도를 올렸다.

안 의사는 다 같이 동양평화만세를 부르고자 했으나 집행관들이 규칙을 내세워 불가함으로써 이 마지막 소원도 이루지 못하였다. 간수가 두 장의 종이로 안 의사의 눈을 가린 뒤 흰보를 씌워 앞을 못 보게 했다. 그리고 마치 예수가 골고다언덕을 올라간 것처럼 이윽고 7개의 계단을 걸어올라간 뒤 교수대 앞에 섰다. 목에 밧줄이 걸리고 안 의사는 아스라이 살아져가는 멀리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순국 100주년, 반드시 유해를 찾아야 한다

형무소장 구리하라는 안 의사의 유해를 모실 관을 밖에서 구해와서 한국식으로 만들었다. 당시 사형수는 중국식 옹기에 넣어 공동묘지에 묻었다. 일제는 당시 안 의사의  두 아우가 여순에 와 있었음에도 시신을 넘겨주지 않고 비밀리에 매장했다. 일본의 법률에도 시신은 유족에 넘겨주도록 되어 있었다.

일제는 여순감옥 뒷산 공동묘지에 안장했다고 밝혔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안 의사의 묘소가 알려지면 한국 독립운동가들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비밀리에 다른 곳에 안장했거나 화장하여 일본으로 옮겼을지도 모른다. 안 의사가 순국한 여순감옥에서는 뒷날  신채호·이회영 등 애국지사들이 순국했다.

일본정부 기밀문서 보관소 어딘가에는 안 의사의 매장과 관련한 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다. 안 의사의 사형집행 때까지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해 온 일제가 이 부문을 빼놓을 리 없다. 이명박 정부는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서라도 이 문제를 제기하여 순국 100주년이 되는 올해 유해를 반드시 찾도록 해야 한다.

안 의사는 순국 전에 면회 온 두 아우에게 "죽은 뒤 시신은 공동묘지에 묻었다가 광복되거든 조국으로 반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로부터 100년, 광복이 되고도 65년, 일본과 국교가 수립된 지도 35년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안 의사 유해를 해외에 방치한 것은 국민·국가의 도리가 아니다. 애국자에 대한 대접이 아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효창원에 가묘를 만든 지도 60년이 되었다. 언제까지 주인 없는 가묘상태로 남겨 둘 것인가.

'안중근 정신'을 되살리는 작업 '시급'

안중근 의사 기념비
 안중근 의사 기념비
ⓒ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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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우리가 또 하나 실행해야 할 일이 있다. 동양평화는 커녕 남북화해도 비틀거리고 있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한민족이 해야 할 과제는 동양평화이다. 한반도가 남북갈등을 빚고 있는 사이에 일본 하토야마 총리는 '동양평화론'을 선점하면서 보폭을 넓히고 있다. 우리가 구경꾼으로 전락할 순 없다. 안 의사의 순국일을 맞아 정부는 메마른 추모사로 이 날을 넘길 것이 아니라 한 가지라도 실천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

예컨대 안 의사가 동양평화론에서 제기한 것 가운데 "3국(한중일)의 청년들로 공동의 군단을 만들고 그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어학을 배우게 하여 우방 또는 형제의 관념을 높인다"는 대목은 정부가 제기하여 중·일과 협력하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더불어서 '안중근 정신'을 되살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안 의사는 반제·반봉건의 기치를 들고 교육사업·의병활동·이토처단·동양평화론을 전개했다. 안 의사는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반제국주의 사상과 1인 통치를 거부하고 공화제를 추구한 근대정신의 선구자였다.

지금 일본의 침략주의 사조는 끝났는가. 지금 우리의 공화제는 무탈한가. 안중근 의거를 살인행위라 규탄했던 종교인들은 참회했는가. 이토 장례식에 참석하여 통곡하고 추모비와 추모제를 지냈던 친일세력은 사라졌는가.

'의열사'는 정신적 실천적 호칭이다

최근 육군이 안중근 의사의 호칭을 '장군'으로 바꾸기로 하고 육군본부의 지휘부 회의실 이름을 '안중근 장군실'로 바꿨다고 한다. 안 의사의 고귀한 업적을 한갓 '군인'으로 격하시키는 처사다. 

'의열사'는 민족사 최상의 정신적·실천적 호칭이다. 육군이 진정 안중근 의사의 정신을 받들겠다면, 먼저 1940년 9월 17일 광복군 창군일을 국군의 날로 바꾸는 정통성부터 회복했으면 한다.

100년의 세월에도 시신조차 찾지 못한 채 이역 만 리에서 고국을 그리실 안중근 의사의 넋을 위해, 그동안 모두를 잊고 살아온, 잊어버린 추념가를 소개한다.

중국 여순감옥 현장에서 - 안중근 의사 추념가
김탁영 작사, 계정식 작곡

1. 수양산 빛난 정기 의인이 타고나서 피끓는 애국정신
    온 땅을 두루 돌며 의군을 일으키어 구국에 힘쓰셨네

2. 나랏집 기울어져 대세가 그릇되매 할빈역 찬바람에
    한국혼 외치면서 의의 팔 높이드니 큰 원수 쓰러졌네

3. 대의에 바친 목숨 천추에 기리살고 한족의 애국 단심
    온세상 비치었네 장렬한 그 공적은 천지에 무궁하리

4. 위대한 님의 기백 이 강토 지키나니 3천만 우리 겨레
    그 뜻을 이어받아 독립과 자유평화 억만세 누려보세.

* 후렴 : 장하다 품으신 큰 뜻 크시다 밟으신 길
           온 겨레 뭉치어서 영원히 노래하세.

덧붙이는 글 | 김삼웅 기자는 전 독립기념관장입니다.



태그:#안중근, #순국 1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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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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