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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10일) 블로그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김예슬씨의 고려대 자퇴 소식을 접했다. 어제 오늘 언론을 통해 보도도 많이 됐던데, 당사자는 자신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인터뷰를 거절했다고 한다.

도도하지만 피곤한 백조보다 자유롭게 날뛰는 닭이 낫다

김예슬씨의 대자보는 오늘날 20대가 처한 상황의 핵심을 잘 짚어내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의 통찰력과 용기가 대단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상처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 대자보 내용 중

길을 따라 똑바로 걷고,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는 게 삶이 아니다. 상처없는 영혼이 어디 있는가. 모두가 상처받지 않으려고, 지지 않으려고, 매끈하고 도도한 척 하려고 기를 쓰지만 다들 알지 않나. 물 위에 떠 있는 백조는 우아해 보이지만 다리는 쉬지 않고 발길질하고 있다는 것을.

아니, 그럼 그냥 물 밖으로 나오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뒤뚱거릴지언정, 우스꽝스럽고, '백조답지 않을'지언정, 어차피 삶이란 다 우습고 별 것 아닌 걸 말이다. 백조나 닭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잡아먹힌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즐길 수 없으면 피하면 안 되나?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는 세상에서, 저 학생은, 아니 이제 곧 학생이 아니게 될 김예슬씨는 숨이 막혔을 것이다. 내가 그랬듯. 때로 숨이 막히지만 많은 대학생들이 할 수 없이 외워버리는 그 정답에.

책 읽고 싶어서 휴학 했어요

나의 보물인 서재. 복학 전에 이걸 다 읽어치울 생각이다.
 나의 보물인 서재. 복학 전에 이걸 다 읽어치울 생각이다.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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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대학을 절반만 다닌 채 휴학을 하고 있다. 사실 요즘 4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

대부분 휴학을 한 후 어학연수니, 교환학생이니, 인턴이니 다양한 스펙을 쌓느라 바쁘다. 그래서 휴학하는 자체는 사실, 새삼스러울 건 없다. 하지만 내가 휴학한 주 목적은, 이유는 좀 다르지만, '책을 읽고 싶어서'였다.

중학교 때까지는 책을 참 좋아해서 많이 읽었지만, 고등학교에 가니 대입 준비한다고 도무지 책 읽을 시간이 없었다. "수능만 끝나면, 대학만 가면"을 늘 되뇌었으나 막상 대학을 가니 현실은 달랐다.

인생 즐기며 살자는 주의이기 때문에 특별히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은 아니었으나, 21학점 꽉찬 시간표에 영어학원, 동아리, 각종 대외 활동 등으로 책은커녕 신문 한 글자 읽을 시간이 없었다. 뭐, 내 게으름을 탓하면 할 말 없지만.

학점은 그런대로 나왔지만 전공 이외의 책도 좀 읽고 싶었다. 요즘 대학생들이 연간 읽는 단행본 수가 채 2권에 못 미친다고 하지만, 머리가 '텅텅' 비어가는 기분이 너무 싫었다. 숨막히는 학교생활, '바빠 죽겠어'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생활이 너무 싫었다. 한 번쯤 한가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휴학을 했다.

휴학한다니까 주변에서 백이면 백 묻는 소리. "뭐 하려고?" 아니, 휴학은 말 그대로 쉴 휴(休)에 배울 학(學), 배움을 쉬는 것이다. 뭘 하긴 뭘 해, 쉬어야지. 대부분은 농담처럼 "그냥 좀 놀게"라고 대답했지만 영어공부나 인턴과 같은 답을 기대하며 끝까지 묻는 사람에게는 내가 책을 읽을 건데(여기까지만 말했을 때 대개는 의아한 눈빛을 거두지 않는다), 나는 또 글쓰는 사람이고, 또 지금 책을 쓰는데(이쯤까지는 말해야 아하, 라며 수긍한다)라고 구구절절 설명해줘야 한다. 정말이지 피곤하다.

남들 눈엔 한심할지 몰라도 지금 나는 너무나 행복하다. 남들처럼 영어학원을 다니거나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 나이 되도록 탈 줄 모르던 자전거를 배웠고 못 듣던 음악도 라디오도 매일매일 듣는다.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집안일도 하고 홍차 한 잔의 여유도 갖는다. 굳이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하루에 한 권 이상 꼬박꼬박 책을 읽어 연 300권을 채울 생각이었는데, 놀러도 다니고 빈둥거리다보니 벌써 3월인데 스무 권밖에 못 읽었다.

고등학교 자퇴한 선배 아들

우연히 며칠 전에 아는 선배 아이가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갓 고2가 되었다는데, "아들이 충분히 놀길 바랐다"며 학교를 그만두게 하셨다. 선배는 내가 휴학하고 온갖 희한한 일들 하면서 빈둥빈둥 노는 것에도 자극을 받으셨다 하며 모종의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고등학교 자퇴와 대학교 자퇴는 분명 차원이 다른 일이긴 하다. 여러 반사회적인(?) 이유가 아니라도, 단지 '대입준비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학원으로 향하는 아이들도 많으니까.

하지만 무의미한 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은 같다. 만 여서일곱 살 이후 평생 가져왔던 '학생'이라는 신분을 잃어야 하고, "왜 자퇴했어?"라는 토끼눈 뜬 사람들의 똑같은 질문도 골백 번 받아야 하고, 여러모로 피곤한 일이긴 하지만 나는 선배와, 김예슬씨의 결정을 지지한다.

사실 나도 1월에 '숙대문건 사태'를 보도하고 칭찬도 받았지만 "모교 망신"이라는 비난도 많이 당하면서 "앞으로 학교생활이 괴로워지겠구나" 예견하고 사뭇 진지하게 자퇴를 고려한 바 있다. 용기 있게 기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아마 학교에 별 미련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이유로 "그래도 대학은 마쳐야겠다" 생각했는데, 그건 '인연'과 '적성' 때문이었다. 동기동창, 동문, 교수님들을 비롯 소중한 인연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자유분방하긴 해도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고 사교적인 성격이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힘들어한다.

어차피 일반기업에 취직할 생각은 일찌감치 버린지라 별로 취업 걱정을 하며 사는 것도 아니라서, 내가 듣고 싶은 수업만 골라 듣고 배우고 싶은 교수님만 찾아다니다보니 굳이 자퇴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음… 어차피 안정적인 소득을 올릴 수 없는 삶을 살 것 같기에, 부모님 집에 계속 붙어 살려면 좀 평화적인 게 필요했기도).

또한 나에겐 전공 공부가 잘 맞고 재미있다. 뭐 절실한 것도 아닌데 굳이 자퇴하는 것 역시 결국 남 따라하는 일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나는 최대한 휴학 오래하고 학교는 천천히 졸업하고, 그렇게 나름대로 내 길을 가련다! 하지만 많은 것을 감수하고 어려운 결정 내린 김예슬씨를 진심으로 지지하고 응원한다.

이제 김예슬씨는 무얼 하고 살까?

속물적인 고민인데, 김예슬씨는 이제 무얼로 밥벌이를 할까? 젊은 놈이 제 손으로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며 괴로워하던 그녀인데.  많이 상처받고, 아프고, 또 그렇게 휘청거리며 그러나 진정한 삶을 살 것이다.

기사의 댓글 중 다음과 같은 게 있었다.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당신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경쟁자 하나 줄어 난 좋긴 하지만." 아무래도 베르테르를 따라 죽은 유럽 청년들처럼 김예슬씨를 따라 자퇴하는 행렬이 이어지거나 하지는 않을 모양이다.

사실 이미 대학생들에게는 너무나 낯익은 것이어서 새삼 큰 충격이 아닐 수 있는 데다, 대학 졸업장이 주는 그 달콤한 기득권을 포기할 용감한 자가 얼마나 많겠는가. 뭐, 부모님들의 반대도 큰 이유일 것이고.

그녀의 결정에 대해 "나중에 후회할 걸"이라는 식으로 비아냥거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누가 더 강한지, 누가 더 후회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영화 <나에게 유일한>에 나오는 대사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는 젊었고 오만했으며, 우스웠고 극단적이었으며 성급했었다. 그러나, 우린 옳았다."

오만하면 어떻고, 우습거나 극단적이면 어떻고, 성급하면 또 어떻단 말인가! 우리가 옳은데.

덧붙이는 글 | 블로그에 썼던 글을 고친 것입니다. 원문은 기자의 블로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김예슬, #고려대, #자퇴, #고려대자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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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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