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겨울에 눈발이 흩날리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었다. 6일 오전 9시30분 제3은성호는 완도군 노화읍 어룡리에 딸린 섬 어룡도 부근해역을 지났다. 어룡도는 바다에 사는 큰 물고기가 용이 되어 승천하려다가 개에게 꼬리가 잘려 승천하지 못하여 얻은 이름이라고 한다. 수심이 낮은 이곳 바다는 올망졸망한 섬들이 산재해 있어 항해하는데 많은 위험부담이 있는 지역이다. 해난사고가 많아 어룡도 정상에는 바다의 길잡이 등대가 설치되어 있다.

 

"옛날 이곳에서 돼지머리 빠치고 고사지낸 곳이요."

 

한 선원이 이곳 해역은 사고가 잦아 돼지머리를 놓고 뱃사람들이 자주 고사를 지내곤 했던 지역이라고 한다. 항해 중이던 선장(56·조태원)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제대로 항로를 잡지 못하고 있다. 배에 항법장치가 있지만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어느 누구도 사용법을 익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항해는 대부분 오래전의 경험과 육감에 의지했다. 선속 9.6노트(kn), 제3은성호는 약18km/h의 속도로 항해하고 있다.

 

"와따, 여기가 맞당께."

 

흩날리는 눈발로 인해 시계가 안 좋은 상황인데도 해남 땅끝 전망대 모습이 저 멀리서 뿌옇게 다가온다. '날씨가 좋으면 풍경이 얼마나 좋을까'하는 우리들의 기대감도 저버린 채 속절없는 눈은 계속 내린다. 바다에서 만난 눈은 눈앞에 잠시 나타났다 푸른 바다로 이내 사라지곤 한다.

 

햇살을 품은 바다는 눈이 시릴 지경이다

 

 

해남의 만호조선소에서 건조한 배는 지난 1일 건네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상악화로 인해 오늘(6일)에야 가지러 온 것이다. 날씨 때문에 그간 애태웠던 선장은 배를 인도해 가는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기쁘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완도 군외면 흑일도 해상에서 철부선 '훼광페리2호'를 만났다. 일행은 무료함을 달래려 트롯 음악을 엄청 크게 틀었다. 갑판 위에 음악이 흐른다. 음악에 취해 여객선을 탄 듯 잠시 착각에 빠졌다. 함박눈이 쏟아진다.

 

 

오전 10시 "인자 날이 배끼지그마" 선장의 말에 하늘을 보니 파란 하늘이 보인다. 여전히 눈발은 흩날린다. 다도해, 그 이름처럼 수많은 섬들이 스쳐간다. 10시 8분께가 되자 햇살이 눈부시다. 햇살을 품은 바다는 눈이 시릴 지경이다. 바다에서 본 바다가 이리도 아름다울까. 깎아지른 해안의 절벽들도 아름다운 풍경이다. 파도가 오랜 세월을 거쳐 만들어낸 예술작품에 탄성이 절로난다. 

 

뱃전에 파도가 밀려와 자꾸만 부딪힌다. 제 몸 파랗게 멍이 드는 것도 모르고 철썩대며 달려와선 하얀 포말로 사라진다. 맑게 갠 하늘, 물빛도 맑다. 언제 눈보라가 몰아쳤을까 의아할 정도로 이제 세상은 청명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망망대해다. 바다 한가운데서 갑판위에 서있으니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바다에 그대로 떠있는 느낌이다. 태양전지를 매단 항로표지도 홀로 떠있다.

 

바다농장이다. 섬 근처는 항로를 잡기가 어려울 정도로 양식장이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통발어선이 지나간다. 통발에 미끼를 넣어 해저면에 내려놓았다가 일정시간이 지나면 통발을 걷어 올려 장어와 게 등을 잡는 배다. 근해통발어선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100m 이상의 수심에서 작업을 한다고 한다.

 

허기 때문일까, 자꾸만 솥단지 바라보며 애태워

 

 

얼마나 달려왔을까. 아직도 그 바다가 그 바다다. 먼 바다의 풍경은 그리 변화가 없다. 김양식장의 부표가 밤하늘의 별처럼 수없이 떠있다. 아직 완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10시53분, 배의 속도는 8.4노트(kn)로 약15.6km/h다.

 

항해 도중 스쳐가며 외형만 보는 섬들이지만 퍽이나 아름답다. 그 섬에 꼭 한번쯤 가보고 싶다. 바다에서 만난 섬들이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탐험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이제 배는 항로를 제대로 찾아 순항중이다.

 

허기가 진다. 압력솥단지에 돼지고기와 물을 붓고 휴대용 가스렌지에 올렸다. 선장의 지시에 따르긴 했지만, 흔들리는 배위에서 불도 시원찮은데 과연 돼지고기가 잘 익을까 다들 의아스러워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으니 별 수가 없다. 다들 허기 때문일까. 자꾸만 일행들은 솥단지를 바라보며 애를 태운다. 11시10분 식칼로 고기를 찔러본 선원이 "잘 삶아져 부럿네!"라며 만족해한다. 삶은 돼지고기를 안주삼아 한잔 술로 허기를 면했다. 술은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촉매제다. 일행들은 오랜 지기처럼 금방 친숙해졌다.

 

멀리 완도읍과 신지도를 연결하는 신지대교가 보인다. 오른편엔 청산도가 동행을 한다. 다양한 빛깔을 뽐내는 신지대교의 야경과 드넓은 명사십리 해수욕장의 고운모래가 떠오른다. 푸른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청산도는 대한민국의 '슬로시티'다. 지난 2007년에 담양 창평, 장흥 유치, 신안 증도 등과 함께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로 인정받았다.

 

"완도 가서 꼼장어 안주 삼아 소주 한 잔하면 정말 좋은데…."

 

뱃머리에서 스쳐가는 완도의 풍경을 바라보던 한 선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료함 탓일까. 일행은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씩 응수했다.

 

"꼼장어는 통째로 삶아서 양념장에 찍어 묵어야 맛있어."

 

그는 완도 꼼장어 맛은 사실 부산 자갈치시장의 그것과는 비길 바가 못 된다고 말했다. 꼼장어는 껍질째 요리를 해야 하는데 부산의 꼼장어는 껍질을 벗겨낸 것이라며.

 

"꼼장어 가죽은 최고급 핸드백 소재로 겁나게 좋아."

 

가장 값싸고 대중적인 장어가 꼼장어(먹장어)다. 포장마차의 대표 안주인 꼼장어는 고추장 양념을 해 연탄불에 구워내면 꼬들꼬들한 식감이 아주 뛰어나다. 꼼장어 껍질은 지갑이나 핸드백 등을 만드는데 사용하고 그 부산물인 고기는 값싼 대접을 받았다. 이제는 싸구려 안주가 아닌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짚불에 구워낸 산꼼장어의 몸값은 비싼 민물장어 못지않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너울대는 바다...

 

 

선원(안경수)은 옛 시절 배 연통에 구어 먹었던 꼼장어 맛이 최고라고 했다. 바다에서 생활하는 뱃사람들에게 있어서 술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인가보다. 그들은 고단함과 무료함을 달래는데 술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적당하게 잘 마시면 술은 보약이다.

 

섬 속에 섬이 있다. 섬 너머에도 섬이다. 갖가지 자태를 뽐내며 섬은 모습을 드러냈다가 사라지곤 한다. 두 개, 세 개, 때로는 거대한 몸짓으로 섬이 다가온다. 뭍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처음 대하는 낯선 섬들이 대부분이지만 왠지 낯설지가 않다. 하지만 그 이름을 다 알 수가 없어 섬의 이름을 목청껏 불러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바위섬이다. 파도가 밀려와서 부서진다. 하늘에는 흰 구름이 무심하게 떠돈다. 완도의 덕우도가 보인다. 수년 전 얼굴도 모르는 장인어른을 뵈러 성묘길에 가보았던 곳이다. 잠시 상념에 잠겨있는데 선장은 왜 "배 멀미를 안 하느냐"고 묻는다. 그때서야 바다를 살펴보니 바다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너울대고 있다.


태그:#완도, #항해, #여수, #파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