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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15대, 16대 대통령 선거에 투표도 안 했을 만큼, 정치에 관심이 없었어요.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인터넷 게임이나 웹 서핑에 관심 많은 주부였죠. 그랬던 제가 사회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건 아이 먹을거리 안전을 위해 촛불 집회에 참여한 덕분이었죠."   

 

지난달 23일 경기도 성남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유모차부대 카페 운영자인 정혜원(34)씨는 지난 1년간의 변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렇게 지난해 광우병 촛불집회는 정씨를 비롯한 '엄마'들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를 위해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목소리를 낸 이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통은 매우 컸다. 특히 영장도 출석 요구서도 없이 임의 동행을 요구했던 경찰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고.

 

"2008년 촛불 집회에 참여했던 유모차 주부들에 대해 경찰은 정상적인 출석 요구를 한 게 아니라, 영장도 출석 요구서도 없이, 굉장히 티 나게 임의 동행하려고 했어요. 유모차 주부들에 대한 경찰의 태도는 상당히 고압적이었죠.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갑자기 날아든 기소장

 

당시 경찰의 이런 태도에 분개한 유모차부대는 지난해 9월 22일, 경찰의 강압 조사 사례를 비판하며 부당한 조사를 중지하라는 내용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경찰의 강압적 조사는 사회적 논란이 됐고, 비판에 직면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카페 운영자인 정혜원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정국으로 한창 우울했던 지난 5월, 기소장을 받았다. 이후 검사가 300만원을 구형했고 벌금 100만원을 내라는 약식 명령이 떨어졌다.

 

정씨는 경찰의 강압적인 조사로 인해 기소와 벌금 판결까지 받은 상황에 대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1년 다 돼 날아온 기소장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이 상황에 대해  순진하게 공권력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 화근이라고 말했다.

 

"경찰의 강압적인 조사에 응하지 않았으면 기소되는 일도 없었지 않았을까 싶어요. 정식소환장 없이 채증 사진만으로는 기소를 할 수는 없잖아요. 시키는 대로 하는 국민에게 불이익을 주는 정부, 그런 공권력이 시키는 대로 한 것, 그게 실수였죠. 조사 받을 필요가 없다고 당시 누가 힌트라도 줬으면 좋았을 텐데.(웃음)"

 

 

평범한 아이 엄마에게 닥친 평범하지 않은 일들. 이런 일을 처음 겪는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어떻게 해서든 빨리 일을 마무리 지으려 좀 쉬운 선택(벌금을 내는 일)을 했을 텐데, 정씨는 달랐다.

 

정혜원씨는 "처음에 벌금 100만원을 선고 받은 후, 그냥 벌금을 내서 끝내고 싶다는 유혹도 들었다"며 "벌금을 내는 것이 정식 재판을 청구하는 것보다는 훨씬 쉬운 일이지 않나.재판은 준비에 시간을 많이 뺏기고 정식 재판을 청구한다 해도 무죄를 선고 받기가 쉽지 않으니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씨는 용기 내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재판을 청구한 이유에 대해 정씨는 농담반 진담반으로 "사회 품위 유지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칠 수 없는 곳이 된 것 같아요. 온갖 사회 부조리가 너무나 당연한 듯 자리 잡고 있잖아요. 그래서죠. 제가 나선다고 얼마나 좋아질지, 또 정말 좋아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0.1%, 조금이라도 바뀌기 위해 노력해야죠. 부당한 일이니까, 그냥 순진하게 벌금을 낼 수는 없어요. 부당한 것이 옳음이 되는 사회를 이제 3살이 된 제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처음간 법정, 영화와 많이 다르더라"

 

정혜원씨는 법원에서 보낸 고지서의 정식 재판 청구 전화번호가 까맣게 덧씌워져 있어 관련 번호를 찾는 데만 한참 걸렸지만, 결국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정식 재판을 청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정식 재판을 청구한 정씨는 지난 10월15일 오전 11시, 난생 처음 법정에 섰다.

 

"저를 비롯해 '촛불 집회 관련자 3명'이 사건번호 하나로 공판을 받았죠. 법정은 처음이었는데 영화와는 많이 다르더라고요.(웃음) 첫 공판은 특별한 게 없었던 것 같아요. 제 차례 되어서 법정 안으로 들어가자 검사가 기소 내용을 읽었고, 그 다음에 민변 변호사님이 이의제기 항목을 줄줄이 읽어나갔어요. 다음 공판을 위한 준비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정씨는 지난해 10월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의 서울지방경찰청 국정감사 자리에 참고인 자격으로 불려가 이번 일만큼 황당한 경험을 했다.  

 

 

국정감사 현장에서 장제원 한나라당 의원이 주부 정혜원씨에게 호통을 치며 무안을 줬던 것이다. "묻는 말에만 대답하라"는 장 의원의 호통은 안하무인의 진수를 보여주며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자, 아이들이 저렇게 울고불고, 또 자고, 지쳐서…. 이게 아동학대가 아닙니까? 정말 아동학대가 아닙니까? 저도 자식 키웁니다. 유모차 불법시위가 빗나간 모정임은 충분히 국민들이 납득하리라 믿습니다." - 국감 당시 장제원 의원 발언 중

 

하지만 정혜원씨는 장제원 의원의 이런 막말 발언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조목조목 반박해 눈길을 끌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화가 나고 당혹스러워 언성을 높였을 만한 상황인데, 유연하게 대처한 정씨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1년여가 지난 지금, 당시 상황에 대해 묻자 정씨는 웃으며 "그냥, '이 아저씨(장재원 의원) 참 똑똑하구나'하는 생각을 했다"며 "비리비리한 것 가지고는 이슈가 안 되니까 뭔가 큰 것을 터뜨려서 주목을 받고 싶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장 의원은) 국민들한테 비판을 많이 받았지만 자기 이름을 석자는 알리셨으니 성공하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며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 아닐까요?"라고 반문했다. 

 

당시 이 국감을 접한 많은 국민들은 유모차 주부들에 대해 "빗나간 모정"이라는 주장하는 장제원 의원을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자신의 입맛대로 국민의 이름을 판 국회의원에 화가 난 누리꾼들은 곧장 장제원 의원의 홈페이지를 항의 방문하기 시작했고 이후 그 홈페이지는 누리꾼들의 '성지순례지'가 되었다. 국감 뒤, 연이틀 동안 장의원의 홈페이지가 비판글로 마비될 만큼 비판의 목소리는 컸다.

 

촛불시위 이후 정혜원씨와 유모차부대 카페 회원들의 생활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촛불 집회 후 1년 하고도 반이 흐른 지금까지 정씨를 비롯한 유모차 주부들은 여전히 미국산 쇠고기는 입에 대지 않는다.

 

"미국 쇠고기는 입에도 대지 않고 있고, 싫다는 걸 굳이 수입해오고 국민 세금으로 남의 나라 축산물이 안전하다 광고하고 이런 정부의 행태가 불쾌해서 고기는 잘 먹지 않게 됐다"는 정씨, 그리고 유모차 주부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신세대 엄마들의 교류 장소였던 유모차 부대 인터넷 카페는 소통이 되지 않는 죽은 카페가 됐다는 점이다. 아마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며 '공권력에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겠다'라는 신념을 몸소 실천하는 '그분'들 때문이리라. 요즘 카페 회원들은 인터넷이 아닌 전화로만 대화를 나눌 정도로 조심스러워 졌다.

 

"저를 비롯한 유모차 카페 회원들은 대부분 정치색이 없는 평범한 주부예요. 이전까진, 선거, 집회도 나가본 적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 때는 아이들의 먹을거리를 걱정해서 집회에 참가 했던 것 것이죠. 그런 저희를 '빨갱이', '애들을 볼모로 잡고 있다'라는 둥, 색을 입혀 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런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니니까 웃어넘기려고 노력했죠. 하지만 아무래도 카페활동은 예전보다 잘 못하게 되었죠. 물론 애 키우는데 바빴던 탓도 있지만요.(웃음)"

 

"명백한 표적수사... 재판에서 밝히겠다"

 

정씨가 첫 재판을 받던 날 법원 방청석엔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주부와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판을 관심 깊게 지켜봤다. 당시에 유모차를 타고 다녔던 아이들은 이제 제법 많이 커서 엄마 손을 잡고 법정을 찾았다. 주부와 아이들이 많아서인지 법정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고.

 

"지난해 경찰이 집으로 찾아오고 조사받고 할 때는 어떤 점이 정확하게 부당한 건지 제대로 판단을 못했어요. 소환장 없이 온 경찰에 대해 제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몰랐죠. 내가 어떤 특정행위를 해서 그 (범죄) 행위가 문제가 되어 적발하고 조사하고 기소하는 것이 아니라, '유모차 부대가 눈엣가시니 거기 운영진을 털어봐라'라는 식의 행태가 부당하다는 거예요. 앞으로 그런 점을 밝혀 나가야겠어요."

 

첫 공판을 마친 정혜원씨는 현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변호사와 함께 오는 11월 17일 진행되는 다음 공판을 준비하며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정씨는 경찰 기소 내용 중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고, 행위에 대한 처벌이 아닌 특정 누군가를 처벌하기 위해 억지로 사진을 찾아내는 형식은 표적 수사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우리 유모차 부대 인터넷 카페 주부들 중 뭔가 위법행위를 한 사람을 적발했다, 이런 거면 그나마 납득이 되지만 실제 유모차부대 카페 회원 2천명 중 나다닌(촛불집회 현장에 나간) 사람은 100명도 안될 거예요. 그런데 그 상태에서 제가 카페 운영자라는 이유만으로 제 신분을 찾고 온갖 사진들에서 제 얼굴을 억지로 찾아내 증거를 들이 미는 거죠.

 

하지만 제가 당시 앞장서서 있었던 게 아니라서 사진을 거의 안 찍혔고 그래서 경찰의 채증 사진은 아주 작은 사진들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그게 증거라는 거죠. 변호사님까지 '정혜원씨 맞냐'고 '난 못 알아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이건 명백히 표적 수사 아닌가요? 재판에서 그런 부분을 밝혀 나가야겠어요."

 

자녀의 먹을거리 안전을 위해 거리로 나섰던 유모차 부대. 하지만 대한민국 공권력은 유모차 부대들을 강압 수사하고 벌금을 매겼다. 유모차 부대 정씨는 그 부당함과 맞서기 위해, 쉽지 않은 싸움을 진행중이다.  


태그:#유모차 부대, #정혜원, #정식 재판 청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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