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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무원 자리와 헌책방 자리

2008년 4월 첫무렵, 부산 연제구 연산동에 헌책방 한 곳이 새롭게 문을 열었습니다. 헌책방 이름은 〈헌책방〉입니다.

나라안에 간판이 없는 채로 꾸리던 헌책방이 꽤 있어서 이곳들은 으레 "간판 없는 헌책방"이라고 이야기해 왔는데, 부산 연산동 〈헌책방〉은 간판이 있으나 이름이 그저 "헌책방"일 뿐인 곳입니다. 옷집이 "옷집"이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걸고, 술집이 "술집"이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걸며, 찻집이 "찻집"이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거는 모습하고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이름이 없이 가게이름을 삼는 일은 몹시 드뭅니다. "삼거리정육점"이든 "건널목문방구"이든 이름을 붙이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연산동 〈헌책방〉 아저씨한테 여쭙니다. 책방이름을 다르게 붙일 수 있었을 텐데 "헌책방"이라고만 하고 끝맺은 까닭이 있으신가 하고. "헌책방이면 '헌책방'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헌책이 있으니까 '헌책방'이지예."

자전거를 안쪽에 들여놓았을 때, 골마루와 책꽂이 모습.
 자전거를 안쪽에 들여놓았을 때, 골마루와 책꽂이 모습.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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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지하철 연산역에서 내려 8번 나들목으로 나온 다음 큰길을 따라 죽 걸어가면 부산 소망교회 건너편 지하에 자리잡고 있는 〈헌책방〉입니다. 지하철역부터 〈헌책방〉까지는 그리 가깝지 않으나 그렇게 멀지도 않습니다. 느긋하게 걸을 만한 거리이고, 사뿐사뿐 거닐어도 좋은 거리입니다. 다만, 연산역에서 내려 두리번두리번 살피니, 동네가 온통 시끌벅적합니다. 술집과 여관 불빛이 번쩍거리고, 이 동네를 오가는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쓰는 데에만 마음을 쏟고 있지 않느냐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스스로 책을 퍽 좋아하지 않는다면, 연산역에서 내려 〈헌책방〉까지 가는 사이에, 밥집이든 술집이든 옷집이든 붙잡히거나 거쳐 가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한편, 동네 안쪽은 고즈넉합니다. 고즈넉한 동네 한켠에는 저잣거리가 제법 길게 펼쳐져 있습니다. 동네 저잣거리이지만, 부산답게(?) 저잣거리에서 회감 파는 집이 퍽 많습니다. 책과 함께 술을 좋아한다면, 먼저 책방에 들러 마음밥을 넉넉히 받아들인 다음, 연산동 저잣거리 회집에 들러 막회 한 접시와 맑은 술 한 병으로 몸밥을 채워도 괜찮으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여기서 몇 해 지낸 적이 있는데, 연산동이 꽤 괜찮은 동네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책방이 하나도 없는기라. 그래서 여기에 책방 하나 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연산동에 헌책방을 연 〈헌책방〉 일꾼 정영곤 님은 공무원 일을 그만두고 헌책방을 열었습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열아홉 해째 일하던 어느 날, 당신 스스로 이렇게만 일해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고, 당신한테 남은 삶을 보람있고 뜻있게 보내려면 다른 새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으며, 곰곰이 헤아리고 살핀 끝에 '헌책방 문화사업'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일하는 가운데 알맞춤한 자리를 찾아보러 다니고, 책을 사러 다니며, 다른 헌책방 일꾼을 찾아다니며 도움말과 길잡이말을 들으며 배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꼭 스무 해를 채운 다음 스스로 명예퇴직을 합니다. 그때가 2008년 4월입니다.

"내가 (국민건강보험공단) 그만둔다니까 상사가 불러서 그럽니다. '그래, 그만두고 뭐할긴데?' '헌책방 할깁니다.' '너 미쳤나. 연봉 잘 주고 정년을 보장해 주는데 왜 그만두나.' 헌책방이든 뭐든 할라면 연봉 다 받고 정년하고 난 다음에 해도 되지 않냐고 그럽니다. 그래서, 할라면 지금 해야지 나중에 할라고 하면 그때에는 힘도 없고 제대로 못합니다, 그랬지. 그러고 나서 그만두고 개업할 때 (상사가) 와 보더니, 어 잘 꾸몄네 좋네 잘해 봐라, 그럽디다." 〈헌책방〉 아저씨가 공무원 자리를 그만두고 나올 때에, 다른 누구보다 집에서 힘들어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공무원 자리는 다달이 일삯이 꼬박꼬박 들어오지만, 새로 열어서 꾸리는 헌책방 일이란 일삯이 얼마나 들어올는지 모를 뿐더러, 자칫 퇴직금을 푼푼이 갉아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헌책방〉 아저씨는 공무원으로 있을 때부터 네 군데 사회단체에 다달이 이만 원씩 하던 뒷배를 끊지 않고, 이제는 다달이 만 원씩 뒷배를 한다고 합니다. 먹고살기에 만만하지 않을 수 있을 뿐더러, 만만하지 않기도 하지만, 당신 스스로 '쇠밥그릇과 같은 자리'를 당차게 떨치고 나온 뜻을 고이 지키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부산 연제구 연산동에 조그맣게 둥우리를 튼 <헌책방> 문간.
 부산 연제구 연산동에 조그맣게 둥우리를 튼 <헌책방> 문간.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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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외수, 김지하, 네루다, 신경숙

〈헌책방〉 아저씨한테 책방 연 이야기를 두 귀로 듣는 가운데, 두 눈은 책시렁에 꽂힌 책을 훑습니다. 책시렁을 훑으면서, '내가 아무리 책과 헌책방을 좋아한다손 치더라도, 나는 부산에 헌책방 한 곳 새로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에서 부산까지 즐겁게 책방마실을 하는데, 부산에서 책을 좋아한다는 분들은 이런 소식이나마 알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산에서 나오는 일간신문 기자는 부산에 새로 연 헌책방이 있음을 알아채고는 짜투리 기사로나마 문화 소식으로 다루어 주려나?' 하는 생각이 뒤따릅니다. '연제구에 있는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쯤이라도 연제구 한켠에 문을 연 헌책방에 기쁘게 책마실을 하러 다닐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몽실몽실 듭니다.

이외수 님 산문모음.
 이외수 님 산문모음.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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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모음 《이외수-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여원,1988)가 보입니다. '이외수'라는 이름이 그럭저럭 알려지고 나서 나온 수필모음이지만, 아주 널리 알려지고 나서 나온 수필모음은 아닙니다. 이 책이 다른 이름으로 다시 나오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외수 님이 글을 써서 어느 만큼 입에 풀칠을 하고 집식구한테 걱정을 덜 끼칠 무렵 써낸 글줄을 읽으면서, 이외수 님이 굶기를 밥먹듯이 하던 모습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 나의 삶은 조악하였다. 외상값을 갚기 위해 강원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한 점을 던졌던 것을 계기로 내 인생은 새로운 전환을 맞이했다. 감히 말하거니와 인생은 빚으로 사는 것이 아닐지 … 소설가라는 말은 점점 위대해지는데, 이외수라는 고유명사는 점점 왜소해져 가고 있었다. 만사가 정말 빌어먹을이었다. 라면 한 개를 간신히 구하면 알맹이로 사흘을 아껴 먹고 스프는 술병에 풀어서 또 사흘을 아껴 먹었다. 매일 죽고 싶은 심정 하나뿐이었다 ..  (29, 32쪽)

이런 글을 읽으면서 '그렇게 굶고 살려면 뭐하러 글을 쓴다고 법석이냐? 그냥 회사원이 되든 외판원이 되든 하면 배 곯지는 않을 텐데' 하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예 없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먹고살 구멍조차 없는 주제에 무슨 글나부랭이를 쓴답시고 깝죽을 떠느냐고 나무랄 분들이 있으리라 봅니다. 이제는 널리 사랑받는 소설쟁이로 이름을 올리지만, 그렇게 애먹고 용쓰면서 소설쟁이가 되려고 몸부림을 쳐야 하느냐고 여길 분들이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여느 회사원이라 할지라도 고단하기는 매한가지라고 느낍니다. 고단한 크기는 다르지만, 어느 곳에서 어떤 일을 하든 저마다 다 다른 고단함이 있고 힘겨움이 있으며 슬픔과 아픔이 있습니다. 더 고단하다고 나쁜 일이 아니요, 덜 고단하다고 좋은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밝히고 내 줏대를 키우며 내 마음밭을 알차게 일굴 수 있는 일자리와 일거리를 스스로 찾고 헤쳐야 한다고 느낍니다.

골마루와 책꽂이는 책을 살펴보기에 넉넉하고 아늑하게 잘 마련해 놓았습니다.
 골마루와 책꽂이는 책을 살펴보기에 넉넉하고 아늑하게 잘 마련해 놓았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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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개월째였더라, 겨울인데 마누라가 갑자기 참외가 먹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자 나도 참외를 먹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참외란 말인가. 고드름이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가 있는데 … 가격을 물으니까 참외 한 개의 값이 거의 연탄 스무 장 값과 맞먹는 액수였다. 하지만 나는 냉방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마누라에게 참외만은 사다 주고 싶었다. "봉투에 넣어 깨끗한 종이에 포장해 주십시오." 나는 세 개를 샀다. 돈이 모자라서였다. 그것을 사들고 샘밭에 있는 월 삼천 원짜리 어두운 셋방으로 돌아가면서 나는 왠지 자꾸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참으로 개떡 같은 인생이로구나. 참외는 샀으나 쌀과 연탄이 다시 크나큰 걱정거리로 내 가슴을 짓눌러 왔다 … 나는 딱 한 조각만 입에 넣고 더 이상은 사양했다. 솔직이 말해서 한 개 정도는 나도 먹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 세상 사람들이여, 가난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보라 그 겨울에 우리 마누라가 먹은 세 개의 샛노란 참외는 추석이 가까와 오는 오늘 내 가정의 일곱 살 먹은 달이 되어 저리 환하게 밝아 있다. 비록 가난과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되 착하고 튼튼하게 자라고 있다 ..  (83∼91쪽)

제 삶을 돌아봅니다. 집삯 내고 도서관삯 내고 어찌어찌 밥은 굶지 않고 살아갑니다. 제 벌이로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둘레에서 도와주는 손길이 있어 어찌어찌 잘 버티고 있습니다. 월급날은 까마득하고 월세 낼 날은 화살 같다고 하지만, 나가는 돈은 커 보이고 들어오는 돈은 깨알만 같습니다. 그래도 하루하루 고맙게 맞이하고, 반갑게 보내며, 기쁘게 마무리를 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를 보며 웃고, 날마다 숱한 집안일에 허덕이면서 졸린 눈으로 책장을 붙잡습니다. 개떡 같은 삶이든 똥떡 같은 삶이든, 이렇게 고단하니까 죽을 노릇이지만 죽을 노릇이라서 더 살뜰하고 고단해서 더 눈물겹도록 고맙기도 합니다. 이외수 님네 아이가 "가난과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되 착하고 튼튼하게 자라"듯, 우리 집 아이 또한 빠듯하고 힘겨운 살림을 꾸리는 어버이가 맡고 있으나, 언제나 해맑게 웃고 종알대며(옹알이지만) 딱히 앓지도 않고 잘 크고 있습니다.

.. 감히 말하거니와 그대들(대학생)의 가슴 안에는 절대적으로 시가 필요하다. 시를 읽고 눈시울을 적실 수 있는 감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시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겨나는 것이랴. 들리는 모든 것이, 보이는 모든 것이, 그리운 모든 것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시가 되고 눈물이 되는 것이 아니랴. 애증이 없이 어찌 인간으로 남을 것이며, 이론과 실제만으로 어찌 인간끼리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 대학생들이여, 그대들은 열려 있어야 한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가슴을 통해서 만들어지고 가슴을 통해서 소멸한다. 비극도 불행도 전쟁도 평화도. 하지만 열려 있는 가슴만으로는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 없으며, 소멸시킬 수도 없다. 도서관으로 가라. 가서 전자오락을 하듯이 온 정신을 다 집중해서 책을 읽으라. 닥치는 대로 읽으라. 그러면 그대의 가슴 안에 무엇이 고이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  (233쪽)

책방 골마루 한켠에는 걸상도 한둘 마련되어 있습니다.
 책방 골마루 한켠에는 걸상도 한둘 마련되어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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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이라는 곳은 책을 갈무리해 놓는 보물곳간이라고 합니다. 한국땅 도서관은 '마음밥 가득한 보물곳간'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도서관은 도서관입니다. 먼저 도서관마실을 하면서 어떠한 책들이 차곡차곡 꽂혀 있는지를 살피고, 다음으로는 새책방마실을 하는 가운데 무슨무슨 책들이 보기좋게 꽂혀 있는가를 살펴보며, 마지막으로 헌책방마실을 떠나 이 나라 책흐름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읽어낸다면, 책에 담긴 알맹이뿐 아니라 책을 둘러싼 삶자락을 톺아볼 수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책도 책이지만, 책을 쓴 사람들 삶과 책을 다루는 사람들 삶을 함께 곱씹고 헤아릴 수 있어야 비로소 책읽기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김지하 님 산문모음.
 김지하 님 산문모음.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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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생명으로 쓰는 시》(산하,1985)라는 책이 보입니다. '죽음의 굿판' 뒤로 김지하 님 글이나 책은 모두 멀리하고 있었는데, '죽음의 굿판'에 앞서 나온 이 책은 늦게나마 다시금 읽어 보면 어떠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용히 꺼내들어 펼칩니다.

.. 잿빛 하늘 나직이 비뿌리는 어느 날, 누군가 가래끓는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더군요. 나는 뺑끼통으로 들어가 창에 붙어 서서 나를 부르는 사람이 누구냐고 큰소리로 물었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하재완입니더." "하재완이 누굽니까?" 하고 나는 물었죠. "인혁당입니다." 하고 목소리는 대답하더군요. "아항, 그래요!" 사상 15방에 있던 나와 사하 17방에 있던 하재완 씨 사이의 통방이 시작되었죠. "인혁당 그것 진짜입니까?" 하고 나는 물었죠. "물론 가짜입니다." 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그런데 왜 거기 갇혀 계슈?" 하고 나는 물었죠. "고문 때문이지러." 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고문을 많이 당했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죠. "말 마이소! 창자가 다 빠져나와 버리고 부서져 버리고 엉망진창입니더." 하고 하씨는 대답하더군요. "저런 쯧쯧" 하고 내가 혀를 차는데, "저그들도 나보고 정치 문제니께로 쬐끔만 참아 달라고 합디더." 하고 하씨는 덧붙이더군요 … 사형이 구형되었다. 나도 웃었다. 김병곤이의 최후진술이 시작되었다. 첫마디가 "영광입니다!" 아아,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게 무슨 말인가? "영광입니다" 사형을 구형받자마자 "영광입니다"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나는 엄청난 충격 속에 휘말려들기 시작했다. 이게 도무지 무슨 말인가? 분명히 사형은 죽인다는 말이다. 죽인다는데, 죽는다는데, 목숨이 끝난다는데, 일체의 것이 종말이라는데, 꽃도 바람도 눈매 서글한 작은 연인도, 어여쁜 놀 가득히 타는 저 산마을의 푸르스름한 저녁 연기의 아름다움도, 늙으신 어머니의 주름살 많은 저 인자한 얼굴 모습도, 흙에 거칠어진 아버지의 저 마디 굵은 두 손의 훈훈함도, 일체가, 모든 것이 갑자기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데, 그런데, "영광입니다." .. (149, 151쪽)

세월은 약이 되어 사람을 키워 주거나 다스려 줍니다. 한편, 세월이 모진 약이 되는 바람에 그만 주저앉거나 쓰러지거나 약기운이 없으면 일어서지 못하기도 합니다. 김지하 님은 앞으로 당신한테 남은 삶을 어떤 세월을 어떤 약으로 삼으며 지내게 될는지 궁금합니다.

《네루다/박봉우 옮김-네루다시집》(성공문화사,1972)을 둘춰봅니다. 노벨문학상을 받고 나서 얼마 있다가 옮겨진 《네루다시집》입니다. 시인 네루다는 1973년에 숨을 거두고 마는데, 이 《네루다시집》이 1974년쯤에 나왔다고 한다면, 칠레에서 있었던 피비린내나는 총부림 이야기를 머리말쯤에 살짝 덧달 수 있었을까요.

반공을 심어 주려고 나라에서 만든 <호야의 고발>.
 반공을 심어 주려고 나라에서 만든 <호야의 고발>.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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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이종진-호야의 고발》(형문출판사,1980)이 보입니다. 눈이 번쩍 뜨입니다. '호야'라니! '반공 윤리교육 문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책은 1982년 9월 1일, '동현국민학교 도서등록인 2767번'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호야, 호야, 호야. 국민학교 다닐 때 수없이 읽고 독후감을 써야 했던 그 책. 반공웅변원고를 쓰고, 교실에서 동무들 앞에서 "똥돼지 김일성 때려잡자!"고 소리를 지르며 교탁을 주먹으로 내리치도록 이끌던 그 책. 동무들이며 교사들이며 너나없이 몸과 마음에 짓쑤셔넣던 그 반공교육 교재로 쓴 만화책.

《남영신-남영신의 한국어용법 핸드북》(모멘토,2005)은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좀더 잘 알고 제대로 쓰자고 하면서 엮은 책입니다. 그렇지만 여러모로 아쉽다고 느껴지는 대목이 보입니다. 무엇보다 책이름인데, 왜 '핸드북' 같은 말을 넣었을까 궁금합니다. 토씨 '-의'를 붙인다든지 '용법' 같은 낱말이라든지, 좀더 꼼꼼히 살피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 밥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음식이므로, 예로부터 소중하게 다루어야 했다. 그런 태도가 말에 나타나서 밥을 '만든다'고 하지 않고 '짓는다'고 표현한다. 마치 건물을 짓는 것처럼 신중하게 지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죽은 '쑨다'고 한다. 흔히 '죽 쒔다'라고 하여 손해를 크게 보았다는 뜻으로 쓰는데, 이 말은 밥을 지으려다가 물을 제대로 잡지 못해서 죽을 쑤게 되었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 밥의 중요성만큼이나 밥과 관련된 언어문화가 매우 다양하게 발전하여 왔다. 이런 말을 알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 언어문화를 살찌우는 바탕이 된다 ..  (146∼147쪽)

남영신 님은 '올바르고 알맞게 쓰는 말 문화'보다는 '맞춤법 잘 맞추고, 말지식 옳게 가누는 일'에 좀더 마음을 쏟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맞춤법도 좋고 말지식도 좋습니다만, 말마디와 글줄을 올바르게 가누지 못하는 가운데 외치는 맞춤법과 말지식은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을 알고 저런 말을 안다지만, 이런 말을 어떻게 가누고 저런 말을 어찌어찌 추슬러야 하는가를 놓친다면 얼마나 보람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경숙 님 산문모음.
 신경숙 님 산문모음.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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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모음 《신경숙-아름다운 그늘》(문학동네,1995)을 구경합니다. 소설은 꾸며내는 이야기를 담는다면, 수필은 저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고 느껴, 어떠한 작가 수필이라 하든, 하나하나 찾아보며 읽곤 합니다. 어떠한 작가이든 사람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깊은 깨우침 한자락을 펼치지 않겠느냐고 믿으면서 수필책을 읽곤 합니다.


.. 야, 어딨어, 내 책 내놔! 오빠가 성이 나서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찾는 소리. 설마 내가 온갖 물건들이 득시글거리는 헛간에 엎어져서 책을 읽고 있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헛간 옆은 돼지막이었고 돼지막 위엔 밑알이 놓인 닭우리가 있었다. 알을 낳으려고 밑알을 품고 있던 닭이 내 책장 넘기는 소리에 꼬꼬꼬, 알을 낳다가 말고 신경질 내는 소리, 그러거나 말거나 짚더미에 엎어져서 나는 그만 인어공주에게 넋을 잃어 저녁밥 지을 것도 잊어버렸다 ..  (87쪽)


지난날 꼬마 신경숙은 《인어공주》에 넋이 사로잡힌 채 헛간 짚더미에 엎어졌다면, 오늘날 누군가는 《아름다운 그늘》에 넋이 빼앗긴 채 외딴방 이부자리에 엎어져 있을까요. 신경숙 님 《아름다운 그늘》은 당신이 어린 나날 《인어공주》에 마음을 내주었듯 오늘날 사람들 마음을 움켜쥐는 이야기책이 되고 있을까요.

.. 어머니는 이미 그때 이 땅에서 여자로 태어나 이루어지는 삶이, 그것도 산골에서 태어나 살다가 그보다 그닥 나을 것 없는 그 산골 앞 농가로 시집와 사는 여자의 삶이 얼마나 가파른 것이었는지를 알고 계셨던 것 같다. 그래서 혹시 당신 딸인 내가 그 삶을 잇게 될까 봐 그저 얼굴이 닮았다는 말조차 싫으셨던 게다 … 어머니께서는 당신 손에 끼고 계시던 반지를 빼서 팔아 만든 돈으로 나를 중학교에 보냈다 ..  (106∼107쪽)

문득, 신경숙 님은 당신 어머니한테 반지를 선물해 주었는지 궁금해집니다. 또는, 반지에다가 다른 여러 가지를 묶어 기쁘게 선물해 주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이야기를 알아보자면 신경숙 님이 쓴 다른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아야겠지요.

국민건강보험공단 20년 근속 공로패가 책꽂이 위에 얹혀 있습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20년 근속 공로패가 책꽂이 위에 얹혀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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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팔지 않는 책

만화잡지 《주간 아이큐 점프》 1호(1988.12.22.)를 봅니다. 오랜만에 보는 《주간 아이큐 점프》입니다. 《주간 아이큐 점프》는 제가 중학교 1학년일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일 때까지 한 호도 빠지지 않고 빌려서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동네에 오던 '책 빌려 주던 차'에서 500원을 주고 빌려 보았고, 그 뒤로는 학교 앞 작은 책방에 선 채로 보거나, 동무가 학교에 가지고 오면 얻어 보았습니다.

새삼스럽게 《주간 아이큐 점프》 1호를 보니, 이 녀석 하나는 도서관에 꽂아 놓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골라들어 책끝에 붙은 차례를 살핍니다. 낯익고 애틋한 이름들이 하나하나 보입니다.

만화잡지 <아이큐 점프> 1호.
 만화잡지 <아이큐 점프> 1호.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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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무(제4지대), 고행석(우리들의 우상), 신문수(리틀 콩), 김형배(헬로 팝), 이우정(낙화와 유수), 배금택(열네 살 영심이), 장태산(케니), 심형래(스파크맨), 전유성ㆍ고상한(청춘을 돌려다오), 김철호(바퀴벌레 한 쌍), 윤준환(또딸이), 황미나(무영여객), 이로마(나바론 몽키), 이동포(아스팔트 위의 집시), 임재학(어른들은 몰라요), 이현세(아마게돈).

.. 과거의 만화란 웃기는 것들이었다. 아니면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하는 유치한 내용뿐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만화가 '만화'의 낡은 울타리를 벗어나 아주 훌륭한 새 집으로 이사한 것이나 다름없다. 나는 '만화'의 격이 그렇게 높아진 줄도 모르고 있다가 한 번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몇 해 전에 미국의 어느 유수한 대학에 붙은 큰 책방에 들른 일이 있다. 내가 가르치는 역사 분야에서, 지금은 어떤 교과서나 참고서를 쓰고 있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책꽂이에 만화책이 꽤 많이 꽂혀 있었다. 나는 처음에 하도 한심하고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미국 대학이 망해도 이렇게 망할 수가 있나. 대학생들이 만화를 교재로 쓸 만큼 수준이 낮아졌다면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한 권을 뽑아 보았더니, 그 만화의 제목이 《레닌》이었다. 부피도 없는 얇은 한 권이었으므로 선 채로 다 한 번 훑어보았다. 놀라웁게도 여간 재미있게 꾸며진 만화가 아니었다. 4시간∼5시간 읽어야 끝낼 만큼의 분량을 만화로 엮어서 읽으면 단 10분∼15분이면 넉넉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  (129쪽 / 김동길-만화예찬)

1930년대에도 만화가 있었고 1950년대에도 만화가 있었습니다. 지난날 만화보다 오늘날 만화가 훨씬 훌륭하거나 뛰어나다고 여길 수 있으나, 오늘날에도 모자라거나 엉성궂은 만화란 어김없이 있습니다. 만화이기 때문에 '걱이 낮'거나, 만화가 아니라서 '격이 높'을 수 없습니다. 문화이든 예술이든 학문이든, 어느 갈래는 한결 높고 어느 갈래는 몹시 낮고 하다는 줄세우기란 있지 않아요. 일류대학교란 있지도 않지만, 굳이 일류대학교를 가른다 하더라도, 일류대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이 한결 '일류'이거나 훌륭하거나 높지 않습니다. 얼굴값과 이름값은 아무런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주간 아이큐 점프》 1호에 실은 김동길 님 글은 '만화 격을 높여 주려는' 글이라 할는지 모르지만, 곰곰이 따지면, 김동길 님 스스로 그만큼 만화를 모르고 문화를 모르며 책을 모르는 가운데 예술을 모른다는 소리입니다.

《Fred Lukoff/오기형 옮김-영어학본(an intensive corse in English (1)》(동명사,1959)을 뒤적여 봅니다. 머리말에는 1953년으로 되어 있는데 간기면에는 4292년(1959)으로 찍혀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간기면에는 이 책을 다루는 전국 서점 이름이 적혀 있는데, '인천 삼중당서점'이라는 이름이 보입니다. 저는 이곳 '삼중당서점'은 본 적이 없는데, 언제 처음 문을 열고 언제까지 책방살림을 꾸렸던 곳일까요. 서울에는 '화신우체국 앞 학우서림' 이름이 적히고, 대구는 '중앙로 문운당서점, 진명서림' 두 곳 이름이 적히며, 대전은 '은행동 삼신지점', 부산은 '대청동 삼협문화사', 춘천은 '춘천서점' 이름이 적힙니다. 이 가운데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책방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심연섭-술ㆍ멋ㆍ맛》(효문사,1977)은 술 이야기 하나로 펼치는 수필모음입니다. 이런 책이 이렇게 묶이어 나온 적이 있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책을 쓰다듬습니다.

당신 아이한테 물려주고 싶어서 따로 빼놓고 끈으로 묶어 놓기까지 한 책이 책꽂이 한쪽에 꽂혀 있습니다.
 당신 아이한테 물려주고 싶어서 따로 빼놓고 끈으로 묶어 놓기까지 한 책이 책꽂이 한쪽에 꽂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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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이한테 물려주고 싶은 책과 삶과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민주공원과 함께하는 부산민주운동사》(민주공원,2003)라는 책을 살펴봅니다. 부산 헌책방에 왔으니 부산 삶터 이야기를 다룬 책을 한 가지쯤 들여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마침 걸맞는 책을 만났다고 느끼면서 책장을 넘깁니다.

.. 지난 20세기에 우리 민족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역사의 질곡과 맞닥뜨려 끊임없이 저항하였고, 이를 통해 민족사를 발전시켜 왔다. 그리하여 고난과 저항으로 이어진 20세기 한국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위대함을 스스로 실현한 역사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런 숨가쁜 민족사의 역정을 거치는 동안, 부산은 항상 그 선봉에 서서 민족사를 개척해 왔다. 일제 강점기에 치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부산사람들은, 이 땅의 민주화와 자주 통일 쟁취를 위해 또다시 떨쳐 일어섰다 ..  (14쪽)

책을 읽으면서 '틀린 말은 아닐 텐데, 영 가슴으로 안 와닿는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참말 부산은 언제나 앞장서며 우리 겨레 역사를 이끌었을까요? 대구는? 서울은? 광주는? 목포는? 춘천은? 인천은? 틀림없이 어느 '지역 역사책'을 넘기든 이와 비슷한 말이 실리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지난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어떤 사람을 정치꾼으로 뽑았고, 어떤 사람이 공무원이 되어 나라살림을 맡아 이끌었던가요? 우리는 우리 사회가 어떠한 길로 접어들도록 힘을 기울였을까요? 우리는 우리 둘레 가난하고 힘여린 이웃 앞에서 어떻게 했지요? 베트남에 군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이고, 베트남에 간 군인은 무슨 일을 했는가요?

책에 남는 역사란 무엇이고, 책에 적히지 않는 역사란 무엇인지 새삼 생각해 봅니다. 지역문화와 지역역사는 어떻게 갈무리가 되고 어떻게 가르쳐지며 어떻게 우리 가슴에 새겨지는지 다시금 곱씹습니다.

사진책 《최민식-HUMAN 1957∼2006》(눈빛,2006)이 책꽂이 위에 얹혀 있어서 넘겨 보니, 안쪽에 최민식 님 서명이 적혀 있습니다. 일부러 이 자리에 얹어 놓으셨구나 하고 생각하는데, 〈헌책방〉 아저씨가 "그분 사인 받으려고 전시회에 가서 책을 사서 사인을 받았다 아입니까. 그 책은 팔지 않는 책입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손님이 팔라고, 팔라고, 하면 팔아야겠지만, 안 팔고 그대로 두면, 이 손님도 와서 보고 저 손님도 와서 볼 수 있지예. 책은 안 사 가더라도 책방에 와서 보고 가면 그기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책방 안쪽에는 푹신걸상을 놓아, 한결 느긋하게 쉬면서 책을 즐길 수 있도록, 또 <헌책방> 아저씨가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앞서, 동네 저잣거리에서 회 한 접시 뜨고 소주 한잔 즐기기 좋도록 해 놓았습니다.
 책방 안쪽에는 푹신걸상을 놓아, 한결 느긋하게 쉬면서 책을 즐길 수 있도록, 또 <헌책방> 아저씨가 하루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앞서, 동네 저잣거리에서 회 한 접시 뜨고 소주 한잔 즐기기 좋도록 해 놓았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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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책방 안쪽에 '팔지 않는 책'이라고 적은 쪽지를 붙인 책꽂이가 있습니다. "이 책들은 왜 안 팔려고 하는 책인가요?" "이 책들 말입니까? 에, 우리 집 아가(아이가) 나중에 좀더 커서 세상을 더 널리 알고 싶어할 때 물려주고 싶어서 빼놓은 책입니다. 이런 책은 한 번 팔면 다시 들여오기 힘들기도 하고, 다른 책은 다 팔아도 이 책들은 아한테 물려주고 싶습니다 …… 내, 헌책방 하면서 큰 욕심 내지 않습니다. 가게세 내고 집에 조금 갖다 주고 저녁에 회 한 접시 사서 소주 한잔 먹고, 이렇게 할 수 있으면 되지예."

〈헌책방〉 아저씨 이야기를 들으면서 더 책을 구경하려고 하는데, 〈헌책방〉 아저씨가 부릅니다. "마, 책은 날마다 보시는데 오늘은 책 그만 보이소. 그만하면 많이 봤다 아입니까. 이제 소주나 한잔 하면서 이야기나 나눕시다."

ⓒ 최종규

덧붙이는 글 | ― 부산 연산동 〈헌책방〉 / 051) 851-5174
― 부산 연제구 연산1동 333-3번지 지하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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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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