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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얘기지만 거리마다 거지들이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동네 크고 작은 길흉사에 근방의 걸인들은 다 모여들었다. 특히 혼사라도 있는 날이면 으레 먼저 알고 동 트는 무렵부터 진을 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구하나 그들을 내치지 않았다. 다들 여의치 않아도 산사람 입에 풀칠하는 것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또한 주인댁도 그렇게 인심이 후해야 집안이 만사형통한다고 걸인들 먹을거리도 일반손님과 크게 다르지 않게 차려냈다.

 

"배가 몹시 고파왔다. 아무 집에나 들어가 밥이라도 얻어먹을까 생각했지만 정생은 단단히 각오를 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단순히 한 끼 때문에 구걸을 할 바에야 철저한 거지가 되자는 생각이었다.

 

(중략) 먹을 것이 생기면 지나가던 다른 거지를 불러 건네주기도 했다. 특히 거지가 된 아이들을 만나면 대신 구걸을 해서 그들의 배를 채워주었다. 그들을 놔두고 돌아서는 정생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혼자 속으로 울었다.

 

그래서 며칠 후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그동안 깡통에 채운 것들을 나눠주었다. 수많은 거지들 속에서 정생은 더욱 헐벗고 지쳐가는 영혼으로 남겨지기를 원했다. 자신을 구원하는 길이라고 믿고 보다 철저한 밑바닥을 체험하고자 했다."

 

눈물겹다 못해 절절한 아름다움이다. <권정생 : 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을 읽다 보면 세상의 모진 시련과 고통이 다 그를 찾아간 것만 같다. 그런데도 선생은 평탄치 못했던 삶을 불평삼기는커녕 낮은 곳에 있는 존재의 마음을 더 헤아렸다. 자꾸만 각박해져 가는 세상에서 그 절망에도 굴하지 않고 아이들을 통해 삶의 희망을 엿보았으며, 그들을 위해 글을 쓰고 숨을 쉬었다. 책장마다 선생의 목소리가 따뜻하게 가슴에 울린다.

 

<권정생 : 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 눈물겹다 못해 절절한 아름다움

 

이 책은 권정생 선생의 1주기를 맞아 선생의 일대기를 재조명하고 있다. 글 속에 그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 평생을 모진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미래의 희망’이라 여긴 아이들을 위한 동화쓰기에 정진했던 외곬 작가의 삶이 따뜻하게 그려지고 있다.

 

선생은 마지막 숨이 사그라지는 순간까지도 이 땅 아이들을 위한 걱정을 내려놓지 못했다. 그래서 "내 작품의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며 어린이들을 위해 써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선생이 그러한 알토란같은 메시지를 남기기까지의 삶 자체는 지난하고 처절함 그 자체였다. 작가로서 인세로 치면 선생은 커다란 부자였다.

 

하지만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선생은 평생을 종지기로서 만족하며 네댓 평 토굴에서 결코 풍요롭지 않게 살았다.

 

선생은 거지생활을 하며 전국 각지를 떠돌았고, 시골 작은 마을 교회 종지기로 충심으로 다해 일하였으며, 삶을 위협하는 병마에 싸우면서도 신실한 글쓰기와 책읽기에 열망을 불태웠다. 선생의 삶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이렇듯 선생은 몸소 밑바닥 생활을 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목소리로 이야기 할 수 있다.

 

선생의 동화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어야

 

그래서 선생의 동화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어야한다. 선생은 평생을 힘없고 소외된 존재로 가난과 병마와 고통과 싸웠다. 때문에 보잘것없는 존재들이 겪은 아픔과 질곡의 세월은 선생 자신의 삶 자체였다. 우리가 눈길을 두지 않는 우리 주변의 이야기였다. 특히 선생은 생명과 자연을 주제로 글을 쓰면서 장차 우리 아이들이 숨 쉬고 뛰어놀 수 있는 자연이 병들어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어른들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동화를 읽어야 하니 얼마나 짜증이 나겠냐?"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숙제하느라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는 어린이들에게 책까지 읽으라고 하기조차 미안하지만, 살기 힘든 세상을 알기 위해서는 동화읽기도 필요하니 '아주 조금씩 꼭 읽고 싶을 때'만 읽으라."

 

이렇게 당부를 하던 여린 마음의 선생을 읽다보면 '순수'라는 의미가 아름다워진다. 문학회를 통해서 선생을 몇 번 만났었지만, 안동 일직을 찾아갔을 땐 이미 선생의 병마가 깊었을 때였다. 애석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아이들과 줄곧 선생을 만나고 있다. 독후활동을 통한 책읽기다. 아이들은 슬픈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대로, 기쁜 이야기는 기쁜 이야기대로 선생의 모든 작품을 좋아한다.

 

때로 선생의 문장은 감칠맛 나는 토장국 같은 느낌을 준다. 아리고 슬프지만 구수해서 살맛이 난다. 선생은 방구 한 대 똥 하나도 그저 지나쳐보지 않았다. 실실 웃음이 난다. 그만큼 선생의 동화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동화책을 읽거나 공부하는 어른들도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누구나 <몽실 언니>를 읽고 나서 받은 감동을 이야기한다. 나의 글쓰기 원천도 <몽실 언니>였다.

 

 

세상의 버림받은 것들에게 전하는 따스한 사랑

 

선생이 썼던 작품 속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로 일천하다. 더럽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비웃음 받는다. 그렇지만 자신을 삭혀가며 거름이 되어 노란 민들레꽃을 피운 <강아지 똥>, 가난과 전쟁, 붕괴된 가정환경 속에서도 처연한 삶의 의지를 보여줬던 <몽실 언니>, 다리가 불편한 '길 아저씨'와 앞을 못 보는 '손 아저씨'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불행한 현실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함께 살아갈 길을 찾는 <길 아저씨 손 아저씨> 등 눈물과 고통으로 점철된 이야기지만 아름답다.

 

그러나 선생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힘없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소외되고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아름답고 가치 있는 존재들로 빛난다. 선생의 작품은 단순한 동화라기보다 하나하나의 진실한 삶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이유 없이 존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존재 자체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있다. 그게 선생이 외곬스럽게 동화를 쓰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이유였다.

 

작가를 보고 작품을 평가하지 말라고 했다. 이는 작가와 작품을 분리시켜야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들은 대개 자기가 쓴 작품보다 훨씬 엉터리로 삶을 살아간 작가들을 변호하기 위한 말이다. 하지만 권정생 선생과 선생의 작품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때문에 선생의 문학적 형상화를 쉽게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동화는 읽는 이의 마음을 맑게 하는 힘이 담겨 있다.

 

존재 자체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동화쟁이 '권정생'

 

이즈음에서 천상병 시인과 이선관 시인을 그리워한다. 몇 번을 만나 뵈었던 정감 때문이다. 특히나 이선관 시인을 마지막 뵈었던 그날의 편안한 웃음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3주기 추모제가 지난 12일 열렸다. 야트막한 산모롱이에 임길택 선생과 권정생 선생님이 나란히 걷고 있다. 한 편의 동화를 풀어헤치고 있다. 조붓한 어깨가 생전의 모습보다 한층 더 건강해 보인다. 평소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조그맣고 하찮은 것들에 배려한 너그러움 때문이리라. 근데, 요즘 일직교회 새벽종은 누가 도맡아 치고 있을까?   


권정생 - 동화나라에 사는 종지기 아저씨

이원준 지음, 작은씨앗(2008)


태그:#권정생, #몽실언니, #동화, #종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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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국기자는 2000년 <경남작가>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한국작가회의회원, 수필가, 칼럼니스트로, 수필집 <제 빛깔 제 모습으로>과 <하심>을 펴냈으며, 다음블로그 '박종국의 일상이야기'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김해 진영중앙초등학교 교감으로, 아이들과 함께하고 생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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