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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최진실씨의 빈소앞에서 동료 연예인이 도착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수십명의 카메라 기자들이 뒤엉켜 있다.
 2일 오후 서울 일원동 삼성의료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최진실씨의 빈소앞에서 동료 연예인이 도착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수십명의 카메라 기자들이 뒤엉켜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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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27일, 한국내에서 수많은 팬을 거느렸던 인기그룹 ZARD의 여성보컬 고(故) 사카이 이즈미가 암투병 중인 게이오 대학병원에서 숨졌다. 나중에 사망 원인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충격으로 인한 뇌손상이라는 공식견해가 나왔지만, 27일 당일은 수많은 억측이 난무했다. 물론 그 안에는 암투병으로 인한 "비관자살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다.

그 다음날 나도 게이오 병원 현장에 갔다. 사고 병동을 들어가는 입구는 물론, 출입금지였다. 100여명의 보도진은 병동으로부터 약 30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보도현장에서는 극히 찾아보기 힘든 검정색 양복을 입은 카메라맨도 있었다.

그런데 다들 셋팅만 시켜놓고 촬영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보통의 화재나 교통사고 현장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병동 30m 떨어진 카메라, 예의바르게 받아쓰는 기자들

그래도 현장까지 왔는데 사진을 안 찍으면 안 되니, 몇 장 찍었다. 한참 찍고 있으려니 경비원이 다가온다.

"촬영하지 마십시오"
"왜요?"
"다른 환자들 얼굴이라도 나오면 곤란합니다."

이른바 초상권 침해에 관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아무리 중대한 사건·사고라도 촬영에 제한을 가하는 몇가지 소재가 있다. 유치원·초중고교·장애인시설·노인요양시설·노숙자센터·직업안정소·병원 등이다. 당사자가 아무리 공인이라도 주변 배경화면에 걸리는 인물들의 초상권, 프라이버시를 존중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요즘에는 뉴스 배경화면에 걸리는 불특정 다수는 뒷모습일 경우가 많다.

그 때 모인 보도진들은 병동 조사를 끝내고 나올 경찰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의 코멘트를 촬영하면서 뒷배경에 병동을 걸어서 찍는 수법이다. 시청자들은 경찰에 눈이 가기 때문에 뒷배경을 그다지 염두에 두지 않을 뿐더러, 혹시라도 병동의 환자가 찍혔다 하더라도 핀트가 맞지 않기 때문에 일부러 안개나 모자이크 처리를 안해도 되는 장점이 있다.

인기그룹 ZARD의 고 사카이 이즈미가 사망한 대학병원 병동. 보도진은 병동으로부터 30미터정도 떨어져 있었다.
 인기그룹 ZARD의 고 사카이 이즈미가 사망한 대학병원 병동. 보도진은 병동으로부터 30미터정도 떨어져 있었다.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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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쯤 기다리니 경찰이 병동에서 나와 보도진 쪽으로 걸어왔고, 카메라맨들은 일제히 자리를 잡았다. 마이크맨들은 그 앞줄에 질서정연하게 앉았다.

경찰이 먼저 브리핑을 하고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몇시, 언제, 사인(死因) 등 의례 있을법한 질문들이 오고가다가 모 방송기자가 "자살한 것 아니냐는 추측도 있는데…"라고 말문을 꺼내었다.

경찰이 "자살이라고 볼 만한 근거가 현재로선 없다" 라고 부인하자 더 이상 질문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경찰이나 관공서의 기자회견·브리핑을 그대로 받아 쓰는 것에 상당히 비판적인 기자이지만, 이 날의 '예의바른' 받아쓰기 자세에 웬지 모른 안심감을 느꼈고, 그 날 이후 사카이 이즈미의 자살설은 사라졌다.

민방 TBS, 자살보도 공개 사과

지난 3월 18일 일본의 4대 방송국 중 하나인 TBS의 인기프로그램 <미노몬타의 아사즈바>가 방송내에서 다룬 유화수소가스 심층기획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일본에서는 2007년초부터 유화수소가스에 의한 자살사건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올해 들어서면서 그 건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일본 경시청의 통계에 따르면 2007년 한해동안 27건, 사망자 수 29명에 불과했던 것이 올해들어서 벌써 500건을 넘어가고 있다고 한다(2008년 1월부터 5월까지, 489건에 사망자 517명).

유화수소가스는 유황과 수소가 결합할 때 방출되는 독성 가스. 흔히 화산폭발 등 자연현상에서 발견되지만, 자살 희망자들이 밀폐된 공간에서 인위적으로 결합시켜 자살도구로서 사용했던 것이다. 이 사망사건이 올해 3월초에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사회문제화되자 TBS는 유화수소가스 자살을 심층분석한다는 제하에 특집방송을 편성했다.

나도 이 방송을 보았다. 자살사건의 통계표, 유화수소가 차지하는 비율 등 흔히 볼 수 있는 편집으로 넘어가다가 문제의 장면이 등장했다.

"이 유화수소가스를 만드는 방법이 인터넷 상에 공개되어 문제가 되고 있다"는 말을 하면서 직접 유화수소가스를 어떻게 만드는지 구체적으로 실험한 것. 설상가상으로 코너의 마지막에는 "만약 자살한다고 하면 이 정도의 양은 되어야겠죠"라는 코멘트가 등장했다.

방송이 끝난 후 TBS는 시청자들의 엄청난 항의에 몰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TBS는 "어제 방송에서 부적절한 표현·내용이 있었다"고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일본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취재

고 쿠로카와 기쇼의 장례식장에서 부인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던 <TV아사히> 리포터. 다른 보도진들로부터 비난의 목소리를 들었다.
 고 쿠로카와 기쇼의 장례식장에서 부인에게 마이크를 들이대던 <TV아사히> 리포터. 다른 보도진들로부터 비난의 목소리를 들었다.
ⓒ 박철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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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진실씨가 사망한 이후, 한국의 몇몇 매스컴은 자살의 구체적 정황과 내용, 자살에 사용된 도구의 세밀한 묘사, 구입방법은 물론이고, 고 최진실씨 자녀들의 사진을 공개했다.

만약 일본이었다면 이러한 보도는 엄청난 항의에 직면했을 것이다. 보도가 중요한 만큼 보도·취재 윤리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작년 10월 숨진 세계적 건축가 고 쿠로카와 기쇼. 장례식 취재 중 쿠로카와의 부인이 영정을 들고 나왔을 때 <TV아사히> 리포터가 부인의 코멘트를 따기 위해 부인 옆에 붙었던 적이 있다. 그 때 다른 보도진들이 "어이 당신! 뭐하는 짓거리야!" 라고 화를 냈다. 여성 리포터는 움찔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고 최진실씨의 TV보도를 인터넷으로 보니, 누구도 이렇게 주의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매체보다 더 좋은 그림을 따기 위해 무조건 앞으로 전진하고 볼 뿐이다. 이런 판에 유가족이나 주변 인물등의 프라이버시·초상권이 존중받을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옐로우 저널리즘을 공식적으로 표방하면 또 모르겠지만, 이름만 대면 알만한 정론지를 자처하는 이들이 대중이 흥미를 끌만한 소재라고, 이렇게 예의없이 죽은 이를 함부로 다루는 것은 '부관참시'가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 보야야 하지 않을까?

내 청춘의 스타였던 고 최진실씨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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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최진실, #사카이 이즈미, #자살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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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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