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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명절이에요. 정성껏 선물을 들고 소중한 사람들을 찾아뵙고 오순도순 따뜻한 시간을 보내겠지요. 맛깔난 요리들로 입은 호강하며 쌓였던 이야기보따리를 왁자지껄 풀겠네요. 설렘과 반가움으로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연휴가 되어야겠지요. 더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말처럼!

 

 

그렇지만 명절증후군이란 말을 들어 보셨나요?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들은 도대체 누가 만드는 건지 먹고 난 그릇들은 누가 정리하는 건지 생각해보셨나요? 이런 것을 모르신다면 당신의 안락을 위해 누군가 대신 수고를 했다는 얘기지요.

 

남성으로서 편한 타성에 젖어서 살던 저는 식사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었지요. 그때를 회상해보면, 식사가 다 차려졌다는 소리에 나가서 반찬이 왜 이것 밖에 없느냐, 맛이 없다, 풀밭이다, 이런 잡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수저질을 했지요. 그러면서 눈은 TV에 두고 옆집 철수랑 놀 생각에 머리는 달나라에 가있었지요. 밥그릇을 다 비우면 숟가락을 내려놓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지요.

 

식사는 재료준비과정 - 요리과정 - 식사과정 - 뒤처리과정을 거쳐야 하죠. 이 과정을 다 밟아야 ‘진짜 삶’에서 소외당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야 한 끼의 소중함을 알 수 있고 숟가락질도 떳떳할 수 있지요. 하지만 많은 남성들이 생존을 위해 식사과정에만 참여하고 다른 과정에는 별로 참여가 없죠.

 

저도 식사과정만 참여하다가 7년 전에 외식업체에서 주방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느꼈어요.

 

"아, 겨우 한 달 설거지하고 뒷정리했다고 손 부르트고 이렇게 짜증나는데, 여성들은 평생을 하는구나."

 

그 이후로 밥을 먹은 뒤 설거지를 하게 되었지요. 여성들이 더 잘하게 태어난 것은 아닌데, 왜 같이 밥을 먹고 누구는 식탁에서 벗어나 쇼파에 앉아 리모컨을 눌러대고 누구는 개수대에서 고무장갑을 껴야했을까요? 

 

또 어느 날, 어머니가 장을 같이 보러가자고 '권'하셨지요. 맛있는 거 살려고 졸랑졸랑 따라나섰지요. 아주 놀랐어요. 자식은 날마다 나가놀면서 몇 만원씩 술값으로 쓰는데, 그의 어머니는 하나하나 꼼꼼히 따지며 단돈 몇 십원까지 헤아리고 계셨지요. 장바구니를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양손에 든 무게를 잊을 수가 없지요. 이후로 장보러 가실 채비를 하시면 따라 나서게 되었지요.

 

재료준비과정과 식사과정, 뒤처리 과정엔 참여하게 되었지만 요리과정은 시도하지 않았지요. 실은 귀찮고 여성들이 더 잘한다는 '편견'을 계속 지키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몸이 편하니까.

 

그러다가 '내 입으로 들어가는 건데 스스로 요리를 해야 하지 않나'라는 자책감이 들 때 '남자는 육아와 요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어른이 될 수 없다'라는 말을 들었어요. 따끔하더군요. 제 실력을 냉정하게 따져보니 과일 하나도 깎지를 못했어요. 안되겠다 싶었죠.

 

과일 깎기부터 시작했지요. 처음에는 알맹이가 껍질에 큼직하게 붙은 채 깎였지만 노력하다보니 껍질만 얇게 깎아 먹음직스럽게 되더군요. 다음으로는 밥을 해야겠지요. 쌀을 씻고 어릴 때 배운 손등이 잠길 듯 말듯하게 물높이를 맞추고 밥을 안쳤지요.

 

그 뒤 슬슬 요리를 직접 했지요. 우선 간단한 볶음밥부터 시작했어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썰어놓은 재료들과 밥을 넣고 볶으니, 생각보다 쉽게 볶음밥이 되더라고요.

 

 

다음으로는 김치찌개, 된장찌개에 도전했지요. 이렇게 진도를 밟아가고 있어요. 마늘도 빻아 다져놓고 밀가루반죽을 빚어서 칼국수 만들기에도 참여하고.

 

명절에는 아무래도 부침개를 많이 하게 되지요. 부침개를 평소에 즐겨먹기만 했던 저지만 이번에는 할머니 곁에서 부침개 요리를 전수받았지요. 밀가루에 계란과 물을 잘 반죽하고 약간의 소금과 재료들을 넣은 뒤 부치는 거죠. 타지 않게 프라이팬에 기름을 잘 둘러야겠지요. 부치다가 위쪽에 물기가 마르면 아래쪽이 잘 구워진 것이죠. 이 때 휙~ 뒤집어주면 되지요. 뒤집을 때 꽤 짜릿하네요. 취향에 따라 크게 부침개를 해도 되고 작게 지짐을 해도 되고요.

 

 

지금도 갈 길이 멀지만 처음에는 이루 말 할 수 없었어요. 엉망이었던 맛이 이젠 먹을 만해지고 볼품없던 모양새가 그럭저럭 봐줄 만하게 되었네요. 게다가 요리하는 기쁨과 누군가 자신이 한 요리를 먹는 즐거움도 얻게 되었네요. 요리를 하나 하나 배워나가는 재미도 쏠쏠하고요. 중요한 건 요리의 전 과정에 참여하여 어떤 누구의 고된 노동을 희생삼아 안락함을 누리지 않게 되어 마음이 편하다는 것이지요.

 

양성평등 시대가 왔다지만 아직 머나먼 얘기지요. 삶에서 기본인 가사노동을 누가 하는지 따져보면 대부분 여성이 도맡아하지요. 요즘 일하지 않는 여성들이 어디 있나요? 거기다 일하는 여성의 2/3가 비정규직이지요. 고단하게 일한 여성들은 퇴근한 뒤 헉헉거리며 가사노동을 하지요. 잠 자는 시간만이 유일한 휴식시간이지만 아침을 준비해야 하기에 잠도 남성보다 적게 자네요.

 

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요. 장 볼 때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가격에 나오는 한숨을, 음식 만드는 고충을, 맛없다고 불평을 들을 때 '그럼 네가 만들어 먹어'라고 외치고 싶은 분노를, 쑥대밭이 된 식기구들을 개수대에서 닦을 때의 피로를.

 

 

어떤 이는 다 먹고 배를 두드리며 이를 쑤시고 있을 때 다른 이는 허리도 못 피고 기름때 범벅된 손을 문지르지는 않아야겠지요. 지금까지 '사랑'이란 명분으로 여성들의 희생을 강요했다면 이젠 사랑으로 남성들이 나서는 건 어떨까요?

 

명절증후군은 남성의 무관심과 여성이 가사노동을 해야 한다는 편견이 빚어내는 사회 질병이지요. 치료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고생했던 여성들을 대신해서 남성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것은 어떤가요. 처음에야 서투르겠지만 함께 웃음꽃 피우는 뜻 깊은 한가위가 될 거예요. 남녀가 같이 '한가위만 같아라'를 말할 수 있는 날을 꿈꿔보네요.


태그:#가사노동, #양성평등, #명절증후군, #요리, #부침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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