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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gi'는 '잘 생긴, 근사한'의 뜻을 가지고 있는 따갈로그(Tagalog)어다. 따갈로그어는 필리핀의 모국어인데 발음만 살아있고 글씨는 영어 알파벳을 사용한다. 혹시 영어에 이 단어가 있었다면 내가 학생들 앞에서 한 기막힌 실수를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글쎄다. 내가 이 일을 겪은 것은 결국 어휘 때문이 아니라 'g' 발음 때문이라는 데에 그 문제가 있다.

 

필리핀 여행 중에 어쩌다 일이 커져서 딸락(Tarlac)이라는 도시에 있는 지역 명문 Don Bosco 사립 고등학교에서 교사 겸, 자원 봉사자 겸 수업을 하게 되었다. 준비한 수업 자료야 아주 미끈하고 좋았다. 이건 에누리 없는 사실이다. 필리핀 영자신문 인콰이어(Inquirer)에서 발췌한 기사로 시사, 토론 문제를 만들고 필리핀 주변에서 태풍이 많이 발생하는 이유를 묻는 과학 문제를 통합적으로 만들어 넣었다.
 
이곳 Tarlac 대학 교수로 있는 Dr.Maribel C. Dizon이 추천서를 써준 것도 내가 이 고등학교에서 수업을 하겠다고 대들게 하는 데에 큰 힘을 주었지만, 막상 첫 만남에서 미덥지 못한 내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담당 선생님이 얼굴을 활짝 핀 것은 이 자료 덕분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자료가 좋아도 결국 이 나라는 영어의 나라 아닌가. 영어 나라에 와서 비 영어권 사람이 수업을 하겠다고 대든 것 자체가 이미 범상치 않은 실수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는 거였다.

 

 
수업을 하던 날 지진 대피 훈련이 있었다. 긴장 속에 내 소개를 하고 채 20분이 되었을까. 요란한 벨소리가 들리고 이어 모두들 운동장으로 나가 학생들은 앉고 교사들은 서고하면서 나는 졸지에 전교 학생들 앞에 낯선 외국인의 모습으로 노출되었다. 모든 학생들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고,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넘어가고자 담당 선생님이 곁에 와 가르쳐준 단어가 바로 'pogi'였다.
 
"우리 학생들 참 pogi하죠?"
"……"
"아, pogi는 '잘생겼다'는 뜻이예요. 따갈로그어예요."
 
잘 됐다 싶어 내 앞에 앉은 아이들에게 이 단어를 사용해 봤다.
 
"You are pogi."
 
금세 아이들의 얼굴에 만족감이 돌며 너무 좋아하였다. 서로를 손으로 가르키며, "You are pogi. You are not pogi"하며 킥킥거리는 품새들이 우리나라 아이들하고 똑 같았다. 이들의 적극적인 반응에 나는 어느새 이 단어를 남발하기 시작했다.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도 이 단어를 발음해 보시라. 뭐 그리 발음이 어려운 단어도 아니지 않는가. 우리말 표현으로 '포기'. 그래 '포기'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발음의 또 다른 단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puk*'다. 끝 스펠링을 *로 표현한 것은 남의 나라 말이라도 공개적인 글에 이 단어를 그대로 쓰기가 민망하기 때문이다. 'puk*' 역시 발음이 '포기'에 가깝다. 그러면 대충 마지막 철자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계속 '포기', '포기'를 쏘아댔고 이것은 거의 같은 발음의 다른 단어 'puk*'를 끊임없이 연상시켰던 모양이다.
 

 
첫째, 둘째 시간을 'You are pogi'를 써가며 무사히 마치고 문제가 된 3교시 Caravario(카톨릭 성인의 이름) 반. 1교시, 2교시를 거치며 아이들은 내 발음에서 기어이 맹점을 찾아냈고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1학년 전체 반을 돌고 돌아 드디어 이 반에 오면서 완전히 숙성되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잔뜩 내가 이 단어를 사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포기, 포기. 나는 자신 있게 지난 반에서 그랬던 것처럼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You are so pogi."

"우하하하"
"Yes, all you are very pogi, I think so."
"우하하하, 포기-, 포기-"
 
아이들이 책상을 치고, 의자에서 들썩거리며 일어났다, 앉았다 난리가 났다. 아니 지난 반에 비해 왜 이렇게 좋아하고 난리지. 갑작스럽게 변한 아이들 반응에 첫 교시부터 나와 함께했던 담당 교사도 의아해 했다.
 
"포기-, 포기-, 우히히히, 킥킥킥"
 
우리 대중가요 칠갑산 가사에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라는 가사가 있다. 십중팔구 우리나라 사람들은 포기를 발음할 때 '포기-'하고 끝을 길게 늘어뜨린다. 그런데 영어 철자 'g'는 혀뿌리로 입천장을 막아 공기가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발음한다. 여기에 'i'(이) 발음을 덧붙이면 짧은 '기'가 된다. 그런데 ‘k'는 공기가 새어나온다. 여기에 'i'(이)가 덧붙여지면 우리가 쉽게 칠갑산 가사를 발음하듯 '기-'가 된다.
 
결국 pogi는 '포기', puk*는 '포기-'로 발음한다. 두 단어의 발음은 비슷했으나 뜻은 너무나 달랐다. 나중 생각해 보니 선생님도 무척 당황하였으나 태연한 척, 모르는 척 했던 얼굴 표정이 생생하다.
 

 

학생들은 환호하고, 필리핀 선생님은 당황하고, 나도 그저 얼떨떨하는 새에 수업은 끝났다. 교무실에 도착하자 선생님은 연신 동료 여선생님을 찾아다니며 교실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무슨 일인가. 당사자인 나한테는 말하지 않고. 여기저기 선생님들이 웃고 말이 없다. 내 옆에 앉은 남선생님이 계속 입을 실룩거리며 웃는다.

 

결국 다음 수업을 대비하여 선생님이 학생들이 그렇게 난리를 친 이유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설명을 들은 나는 신음하듯 오마이가드, 오마이가드를 읊어 댔다. 선생님은 차마 puk*의 뜻을 말로 하기 곤란하니 궁여지책으로 그림으로 설명하는 기발한 방법을 택했다.

 

신속하고도 난감한 얼굴로 이 여선생님이 그린 것은 사람의 신체, 그것도 배꼽 아래. 선생님은 연필로 그곳을 가리키며 female(여성)이라면서 얼른 종이를 구겨 넣었다. 아, 나는 여성의 성기 이름을 아이들 앞에서 거침없이 지껄여 댄 것이다.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따듯한 배려와 친절 속에 이날 필리핀 고등학교에서의 수업은 겨우 성공리(?)에 끝났다. 발음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이 사건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인다.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 게 있다면 바로, 선생님이 나에게 그려준 그 그림을 사진 찍지 못한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여행과 영어 공부, 후배 방문 겸해서 필리핀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곳에 겪고 본 공립학교, 사립학교에서의 수업, 영어교육, 빈부격차, 관광 이야기 등을 몇 번 기사로 올립니다.


태그:#영어, #필리핀, #발음,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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