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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권정생 선생의 유언장을 본 것은 우연이었다. 이웃 블로거를 방문했다가 대뜸 시작되는 스캐닝 받은 편지지의 글을 약간 힘들게 읽어내려갔다. '어쩌면 권정생 선생의 유언장이겠군' 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유언장을 그렇게 쓸 수 있는 사람은 한글 문화권에서는 권정생 선생 이외에는 희박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정보로는 그렇다.

외람되지만 나는 권·정·생으로 표기하겠다. '선생'이나 '선생님' 같은 존칭보다 권정생은 한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의 고유명사이자 삶의 태도에 관한 하나의 대명사이기 때문이다.
선생의 삶과 글씨는 닮았다.
▲ 권정생 선생의 유언장 선생의 삶과 글씨는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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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장

내가 죽은 뒤에 다음 세 사람에게 부탁하노라.
1. 최완택 목사 민들레 교회
이 사람은 술을 마시고 돼지 죽통에 오줌을 눈 적은 있지만 심성이 착한 사람이다.
2. 정호경 신부 봉화군 명호면 비나리
이 사람은 잔소리가 심하지만 신부이고 정직하기 때문에 믿을 만하다.
3. 박연철 변호사
이 사람은 민주변호사로 알려졌지만 어려운 사람과 함께 살려고 애쓰는 보통사람이다. 우리 집에도 두세 번쯤 다녀갔다. 나는 대접 한 번 못했다.

위 세 사람은 내가 쓴 모든 저작물을 함께 잘 관리해 주기를 바란다.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를 어린이에게 되돌려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만약에 관리하기 귀찮으면 한겨레신문사에서 하고 있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에 맡기면 된다. 맡겨놓고 뒤에서 보살피면 될 것이다.

유언장이란 것은 아주 훌륭한 사람만 쓰는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유언을 한다는 게 쑥스럽다. 앞으로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좀 낭만적으로 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나도 전에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처럼 헐떡헐떡거리다가 숨이 꼴깍 넘어가겠지. 눈은 감은 듯 뜬 듯하고 입은 멍청하게 반쯤 벌리고 바보같이 죽을 것이다. 요즘 와서 화를 잘 내는 걸 보니 천사처럼 죽는 것은 글렀다고 본다. 그러니 숨이 지는 대로 화장을 해서 여기저기 뿌려주기 바란다.

유언장치고는 형식도 제대로 못 갖추고 횡설수설했지만 이건 나 권정생이 쓴 것이 분명하다. 죽으면 아픈 것도 슬픈 것도 외로운 것도 끝이다. 웃는 것도 화내는 것도. 그러니 용감하게 죽겠다. 만약에 죽은 뒤 다시 환생을 할 수 있다면 건강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태어나서 25살 때 22살이나 23살쯤 되는 아가씨와 연애를 하고 싶다. 벌벌 떨지 않고 잘할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환생했을 때도 세상엔 얼간이 같은 폭군 지도자가 있을 테고 여전히 전쟁을 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환생은 생각해 봐서 그만둘 수도 있다.

2005년 5월 1일 쓴 사람 권정생

권정생은 특별하다

생각과 실제 삶을 일치시킨 보기 드문 사람이다. 2007년 5월 17일 선생은 이 세상을 떠났다. 작년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생가 모습.
 생각과 실제 삶을 일치시킨 보기 드문 사람이다. 2007년 5월 17일 선생은 이 세상을 떠났다. 작년 권정생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생가 모습.
ⓒ 손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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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생각과 실제 삶을 일치시킨 보기 드문 사람이다. 2007년 5월 17일 선생은 이 세상을 떠났다. 서가에 권정생의 책뿐만 아니라 소로의 <윌든>으로 시작해서 니어링 부부의 책 등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암묵적인 방향의 책들로 장식된 집들은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책이고 현실에서의 우리 삶은 그 수준의 실천을 감당하기 힘들다. '실천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표현은 사실 스스로에 대한 관대함이다. 현실에서는 책에서 공감했던 내용과 정반대의 논리로 작동할 때가 많을 것이다. 왜냐면 '나의 이익'과 '나의 소유'가 증가하는 경우 엄정한 잣대는 버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나의 재산을 나쁜 곳에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니까'라는 비교 우위로 스스로를 설득한다.

그래서 권·정·생이다.
그래서 권·정·생은 특별하다.
생각과 실제 삶을 일치시킨 보기 드문 사람.

<가족의 탄생>이라는 썩 괜찮은 영화를 감독한 김태용 감독이 베트남 1800㎞를 종단하는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EBS에서 보았다. 좀 어눌한 말투, 김태용 감독이 직접 방송 원고를 작성한 것이 아닌가 하는 좋은 느낌의 원고였다. 내가 지난 화요일에 본 방송분은 <김태용 감독의 베트남 종단 1800㎞- 2부 사파 가는 길>이었다.

사파는 해발1600m에 위치한 고산촌이다. 이른바 문명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었다. TV에 나올 지경이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들의 농경 문화와 민속 유산은 관광자원이 되었고 어쩌면 그들의 노동은 관광객들에게 보여지기 위한 것으로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결국 돈을 알게 되고 맨발에 신발이 신겨지고 신발은 수입 정도에 따라 브랜드별로 구별되었다.

이제 그들은 가난을 알게 되었다. 김태용 감독은 그것을 안타까워 했고 상황은 이미 끝이 났다. 당연하게도 라다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다룬 <오래된 미래>라는 책의 반복이었다. 가난을 인식하게 되면 전혀 다른 차원의 불행을 알게 된다. 그냥 그렇게 살아 왔는데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들 소수 민족 출신의 어느 지식인은 '자발적 가난'이라는 개념을 받아 안고 고민하게 될 것이다. 자발적이지 않아도 가난할 수 있는 기회는 끝이 나버린 것이다.

소유하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영화 중에서도 공상과학영화 속 이야기보다 더 힘든 일이다. 간혹 엽서 사진 같은 이곳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지을 생각이 없느냐는 이야기를 듣곤 한다.
그러면 나의 대답은 항상 똑같다.

"저요? 돈 없습니다. 그리고 집 짓고 어쩌고 그렇게 무겁게 살고 싶지 않습니다. 집이 발목을 잡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풍광 좋은 이 곳의 땅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곳곳에서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들'이 건축되고 있다. 원하는 땅에 원하는 형식의 집을 지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나의 대답이 계속 같을 수 있을까? 최근 몇 차례에 스스로에게 던져 본 질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질문이다.

"그럴 수 있다. 나는 진정으로 계속 가난하고 싶다."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고 싶지만 쉽게 뱉어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는 권정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자세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욕구와 소유는 본능의 영역에 속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살다보니 일하고 일하다 보니 들어오는 돈을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버립니까?"

권정생의 삶엔 '세련'이 없었다

수준은 필연적으로 '그 수준의 소유'를 발생시킨다.
▲ 수준 수준은 필연적으로 '그 수준의 소유'를 발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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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의 사진에서 나는 항상 그 어떤 '세련'도 발견하지 못했다. 가난해도 치장은 가능하다. 특히나 그것이 지식인의 경우,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지식인의 경우에서도 그런 세련을 구사하는 센스를 자주 보았다. 문화적 취향이고 그것을 즐긴다. 찻잔 하나, 서가의 책상, 책장 등에서 그런 취향은 숨길 수 없이 나타난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들도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명품은 아니지만 손으로, 몸으로 무엇인가를 꾸밀 것이다. 그들의 주변이 그러하고 관계의 수준이 그러하다.

문제는 그 수준. 수준은 필연적으로 '그 수준의 소유'를 발생시킨다. 그렇다면 권정생은 수준이 낮거나 그 자체가 없는 사람이란 말인가? 아니다.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사람이다. 많은 예술 장르의 정점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재능을 타고난다. 권정생은 선천적으로 '무소유'라는 재능을 타고났다.

존경하는 마음을 결정하는 것은 절대평가를 기준으로 하고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상대평가가 가름한다. 이것은 권정생을 존경하면서도 동시에 내가 권정생처럼 살지 않아도 혐오스럽지 않을 수 있는 근거로 활용된다. 나는 이 두 가지 기준이 하나로 일치되지 않는 한 세상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꿈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영화에서나 만들어지는 이야기다. 그것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언론이 통제 없는 보도를 할 수 있을 것이란 망상과 같은 일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하루 중 12시간 정도는 자신이 알고 있는 뻔한 진실을 망각하고 매체를 들여다본다. 우리가 취하고 있는 정보의 99%는 이미지로 채워지고 판단과 선택은 형편없는 질과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문제는 수준이 아니라 차원이다. 그런 것 같다.

다수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니 '부'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곱지 않은 시선과 시신경으로 연결된 라인을 따라가 보면 결국은 부를 열망하는 심장 하나와 만나게 된다. 그 심장 박동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네. 어, 내 심장이네….

세상을 욕하면서 그런 세상이 자신에게 기회를 부여한다면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니면 내 자식이라도 밀어 올려보겠다고 아둥바둥거리는 것이 대부분 우리들의 삶이다. 왜 '대박' 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이고, '부자되세요'라는 인사가 덕담인가. 미디어가 조장한 것? 그것뿐인가?

남편이 죽었는데 10억을 받았다는 보험광고와 카드 연체시키면 집구석 절단 나니 아빠 힘내라는 광고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거나 줄여 보자는 권고는 미친 소리이거나 멋있는 척 하는 소리일 것이다. 우선은 줄이고 포기할 것이 없다는 아우성을 먼저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뾰족한 수가 없다 보니 사는 대로 살아 갈 수밖에 없다.

이 악순환은 결국 생각한 대로 살아 보는 것 단 하루도 해보지 못하고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란 폴 발레리의 악담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보다 훨씬 많이 가진 자들의 축적 과정과 승계가 정의롭지 않은데 겨우 먹고 사는 우리들에게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자신 삶의 차원을 달리하기 위해서는 상대평가라는 잣대를 버리고 가끔은 절대평가라는 잣대를 적용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겠는가.

당장 무엇을 어떻게 전환하자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가끔 들이대는 절대평가 잣대를 통해
아이를 학원에 보낼 것인가 과외를 시킬 것인가, 대안학교를 보낼 것인가 특목고를 보낼 것인가, 지하철을 탈 것인가 승용차를 탈 것인가, 금년 어머님 생신에 10만 원을 쓸 것인가 100만 원을 쓸 것인가 등과 같은 고민과 결정 말고 뭔가 다른 근본적인 질문이 가능하지 않겠나. 꼭 같은 곳에서 줄을 서야겠나.

상대적으론 가난해도 절대적으론 많이 가졌다

내가 코끼리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생물학적 근거는 없다
▲ 소비 내가 코끼리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생물학적 근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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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상대평가에서 많이 가난한 나조차 절대평가에서는 소유하고 있는 것이 너무 많다. 내가 코끼리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하는 생물학적 근거는 없는데 과소비하지 않으면 당장 불편은 물론이고 굶어죽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글과 말로 해 온 소리들이지만 그것들은 나에겐 전혀 가치 없는 소리였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스스로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소유의 허망함을 권하는 글과 소리들조차 책은 책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신선하지 않은 소리라도 내 안에서 스스로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자각이 생길 때, 바로 그 때가 중요한 것 같다. 오늘 이렇듯 제법 '주장'에 가까운 '권고'를 무리하게 주절거리는 이유 또한 내 안의 바람이 잠시 지나가는 계절풍은 아닌 듯 한 탓일게다.

영화 <굿 윌 헌팅>이 좋은 느낌이었던 것은 현실 같은 결말 때문일 것이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가 늘상 그러했지만 비교적 상업적 타협을 한 이 영화에서 나는 상반된 두 신과 상징적인 한 신이 좋았다.

수학천재 맷 데이먼은 정보기관의 스카웃을 거절하는 장면에서 '취업 후' 자신이 하게 될 일은 결국 석유자본 싸움의 똥개 역할이며 결과적으로 그것은 자신이 20년 가까이 함께 살아 온 '동네 바보 형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이란 논리를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상반된 신은 영화의 마지막인데 멧 데이먼은 결국 '표면적으로 악하지 않은' 직장을 선택하고 '수준 있는' 여인을 되찾기 위해 잠시 여행을 떠나는 '현실적 타협'을 택한 장면이다. 상징적인 한 신은 길을 가다가 어린 시절 자신을 두들겨 팬 녀석을 발견하고 불문곡직하고 차를 세워 녀석에게 응징을 가하는 장면이었다.

결과론적으로 미디어들은 정신과 교수이자 맷 데이먼을 이끄는 역할을 한 로빈 윌리엄스의 견인하에 불량스러운 수학천재가 '인생을 알게 되었다'는 주제를 뽑아낸다. 현실은 그렇다.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고 권한다. 그것이 지혜라고.

에어컨 켜고 유기농 밥상을? 생태주의는 불편하다

고민은 봄나물을 채취하면서부터 발생했다
▲ 소유 고민은 봄나물을 채취하면서부터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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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 집의 고민은 '우리도 에어컨을 넣을까?'이다. 사실 이 고민은 봄나물을 채취하면서부터 발생한 생각의 변화가 초래한 것이다. 에어컨을 설치하면 우리 집은 더 많은 화석연료를 소비하게 될 것이다. 남극의 빙하를 조금 더 빨리 녹게 만들 것이고, 귀신고래 한 마리 정도는 더 죽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어떤 에어컨의 제품명은 eco(에코)로 시작한다. '에코 에어컨' 아래에서 유기농 식단의 밥상을 즐기는 것은 오직 '나를 위한' 편리를 추구하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이제 곧 옮길 인근 시골집은 이른 바 싸구려 조립식 주택이다. 이 반 환경적 건축 자재로 지은 집은 더위와 추위 앞에 속수무책이다. 편리를 위한 달콤한 유혹이 가능한 것은 내 눈 앞에서 북극 빙하가 녹는 것도 아니고, 그 고래가 내 눈 앞에서 죽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시쳇말로 에코(생태주의)를 주장하면서 스스로 에코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종범이 되는 것이다.

생태주의는 불편한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과 현실이 모순되는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대평가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문제 없는 것인데 절대평가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결정이 쉽지 않다.

이번 봄부터 마누라가 채취해 온 나물 등속으로 음식을 장만하면서, 텃밭에서 대부분의 야채를 해결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질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본 질문을 자주 하게 된다. 화폐를 주고 필요한 물건을 확보하는 비율을 줄여 나가야 할 것이다.

더 많이 벌기보다, 더 적게 벌어도 되는 쪽으로 생각은 이동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의무로 생각했던 많은 부분들을 수행할 능력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소유하지 않으면 그 의무를 수행할 수 없고 내 생각은 점점 소유로부터 멀어지는 추세이니
이 차이는 쉽지 않은 고민을 안겨준다. 힘겨울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과 현실이 모순되는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적게 소유하고도 점점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 그것은 현실이 영화처럼 되는 그런 과정일 것이다. 그 영화의 제목은 'tribute(트리뷰트) 권·정·생'(권정생에게 감사를!)이 마땅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위 기사는 http://www.jirisan.com 의 '큰산아래이야기'에 동시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리산닷컴으로 가시면 보다 큰 사이즈의 사진과 조금 다른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권정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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