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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과 셈대 둘레.
▲ 헌책방 <책사랑방> 문간과 셈대 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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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발’을 생각한다

우리 나라에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개발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옛집을 허물고 새집을 짓기도 하고, 골목집을 허물고 넓은 찻길을 닦기도 하며, 뒷골목 밀어낸 자리에 말끔한 공원이 들어서기도 합니다.

아주 조그마한 틈이 있어도 들풀이 자랍니다. 민들레도 자라고 질경이도 자라며 망초도 자랍니다. 별처럼 보이는 작디작은 꽃도 자라는데, 꽃이름을 잘 모르지만, 제 나름대로 별꽃이라고 이름을 붙여 보는 꽃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두 포기가 뿌리를 내리고,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면 서너 포기 열스물 포기, 그러다가 서너 해쯤 지나면 온 동네가 풀숲이 됩니다. 바닥이 제아무리 시멘트요 아스팔트였다고 해도 풀이 돋고 또 돋으면서 온통 풀나라를 이룹니다. 이렇게 하여 열 해가 지나고 스무 해가 지나면,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도록 수풀이 되지 싶어요.

숲이라고 해야 할까요. 숲이지요. 씨앗이 흙과 만나고 물과 바람과 물이 어우러져서 자연스럽게 자라나는 숲. 이 같은 숲은 시골에서도 보지만 도시에서도 만납니다. 도시에서 만나는 숲은 시골숲과 견주면 참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시에도 숲이에요. 비록 이러한 숲은 ‘돈이 안 된다’고 해서 모두 뒤엎으려고 하는 우리들 손길 삽길이지만.

문득문득 생각해 봅니다. 어느 한 동네를 재개발한다고 했을 때, 이 ‘재개발’이란 무엇을 바라는 일인가 하고. 사람들이 즐겁게 어우러지도록 하려는 재개발인가요. 사람들이 너나없이 어깨동무하면서 웃고 울 수 있도록 하려는 재개발인가요. 땅임자가 큰돈을 벌도록 해 주는 재개발인가요. 그러면 땅도 집도 없이 세들어 사는 사람들한테는 무엇이 되는 재개발인가요.

더구나, 재개발을 한다고 하면, 반드시 아파트만 올려세웁니다. 있는 집 껍데기를 조금 손질해서 다시 살도록 하는 재개발은 아직 우리 나라에서는 찾아보지 못합니다. 집 안팎을 찬찬히 매만져서 살림새가 나아지도록 하는 재개발 또한 아직 겪어 보지 못했습니다. 오로지 ‘완전 철거 → 완전 아파트 → 완전 재입주’로만 나아가는 재개발이었습니다.

바닥에는 아주 조금만 책이 쌓이고, 다른 책들은 모두 책꽂이에 알뜰히 꽂혀 있는 <책사랑방>.
▲ 골마루 바닥에는 아주 조금만 책이 쌓이고, 다른 책들은 모두 책꽂이에 알뜰히 꽂혀 있는 <책사랑방>.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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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개발업체 사람들 삶이 팍팍한지, 왜 이렇게 공무원들 정책이 메마른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개발업체는 무언가 뚝딱뚝딱 지어야 돈을 번다지요? 어차피 공무원은 무엇인가 번들번들 새로워 보이는 정책을 내놓아 예산을 집행해야, 그러니까 돈(세금)을 거두어 돈을 쓰는 일을 해마다 되풀이해야 능력과 경력이 쌓인다지요? 그러면, 있는 집과 골목과 동네를 고스란히 살리거나 가꾸면서도 개발업체 사람들 일감을 마련할 수 있지 않나요? 그렇다면, 오래된 도심지 동네나 시골 마을을 문화 삶터로 추스르는 정책을 펼쳐서 ‘살아숨쉬는 관광지’처럼 돌볼 수 있지 않나요?

우리가 유럽 나라로 여행을 가면서 무엇을 보는가요. 우리가 유럽에 나들이를 갔을 때 어디에서 기념사진을 찍는가요. 우리가 앙코르와트에 가서 무엇을 보지요. 나라밖 사람들이 한국에 왔을 때 왜 경주에 데리고 가려고 하고, 광화문이나 경복궁을 보여주려고 하지요.

프랑스 골목길처럼, 우리 나라 골목길도 아름답습니다. 일본 골목길처럼 우리 나라 옛 도심지 골목길도 사랑스럽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 개발업체 사람들은 우리네 골목길에 깃든 아름다움을 읽어내지 못합니다. 아쉽게도, 우리 나라 공무원들은 우리네 골목길에 배인 살가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제가 사는 인천 옛 도심지 배다리에서도, ‘동네 골목집 가득한 곳 한복판에 너비 50미터가 넘는 산업도로를 반드시 내고야 말겠다’는 인천시 공무원과 개발업체 정책이 1998년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옵니다. 이 산업도로를 밀어붙인 다음에는 도시 ‘재생사업’을 한다고 들썩들썩입니다.

 (2) 소중한 낱말꾸러미

요사이 동네 분위기가 워낙 뒤숭숭하다 보니, 책 읽을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좋다고 하는 책을 즐겨읽는들, 이 마음과 느낌을 어찌 이웃들과 나눌 수 있는가 싶어서. 우리 이웃들은 더 많은 보상을 받아서 더 비싼 아파트로 옮겨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가냘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어떻게 다독여 줄 수 있는가 싶어서.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이웃사람들 집회에 함께 나가고, 천막농성터에서도 함께 지내고, 공사터에서 반대하는 움직임에도 함께 휩쓸려 다니다가, 살며시 빠져나옵니다. 잠깐 머리를 식히고 싶습니다. 아주 잠깐이 되더라도, 이깟 …… 그깟 …… 책 하나 더 본다 한들 무슨 마음이 풀리겠느냐 싶어도, 책방 나들이를 하려고 조용히 빠져나옵니다.

한 꾸러미나 되는 용어집과 옛 실업계 고등학교 교과서.
▲ 용어집 꾸러미 한 꾸러미나 되는 용어집과 옛 실업계 고등학교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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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을 타고 부개역에서 내립니다. 표를 끊고 오른쪽으로 나옵니다. 높은 계단을 타고 내려옵니다. 천천히 걷습니다. 이곳 부개역 둘레에도 새로 올려세우는 아파트가 엄청납니다. 부개역 앞으로 보면, 오른쪽은 몇 해 사이에 지은 아파트가 빼곡하고, 왼쪽으로는 새로 짓는 아파트 공사터.

히유. 이 많은 사람들은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을 하지요. 이 많은 집마다 쓰는 물과 전기와 기름은 어디에서 얻지요. 머리가 아찔, 눈앞이 어질.

헌책방 〈책사랑방〉에 닿습니다. 문을 살며시 엽니다. 아저씨는 부지런히 책을 싸고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주문이 온 책을 상자에 담습니다. 저녁에 택배를 부치시겠군요.

오기 앞서 잠깐 인터넷방에 들어가 보았더니, ‘용어집’이 한 꾸러미 나온 듯해서, 사장님한테 여쭙니다. “아, 그 자료집? 무지 많이 들어왔는데.” 하면서 그야말로 한 꾸러미를 안쪽 창고에서 들고 나오십니다.

 《조재영,이은웅-새로운 식용작물》(향문사,1977)
 《이정행-새로운 공예작물》(국정교과서주식회사,1973)
 《과학기술용어집(농업경제학 편)》(문교부,1968)
 《과학기술용어집(인쇄공학 편)》(문교부,1969)
 《과학기술용어집(수학 편)》(문교부,1965)
 《과학기술용어집(수산학 편:제조학,증식학,어로학,경제학)》(문교부,1968)
 《과학기술용어집(기상학 편)》(문교부,1970)
 《과학기술용어집(농학 편:원예학)》(문교부,1969)
 《과학기술용어집(농학 편:작물학)》(문교부,1969)
 《과학기술용어집(임학 편)》(문교부,1968)
 《과학기술용어집(약학 편:약전,약제,생약,위생화학,법화학)》(문교부,1965)
 《과학기술용어집(방직공학 편)》(문교부,1968)
 《과학기술용어집(약리학,병리학,법의학 편)》(문교부,1965)
 《과학기술용어집(축산학 편)》(문교부,1969)
 《과학기술용어집(농학 편)》(문교부,1969)
 《광물지질학용어집 (18)》(문교부 과학기술용어 제정심의회,1963)
 《축산학용어집 (7)》(문교부 과학기술용어 제정위원회,1959)
 《한글농업용어집(3000단어)》(농촌진흥청,1971)

‘향문사’라고 하는 출판사에서 가지고 있던 자료로 보이던 옛 교과서와 옛 ‘용어집’이 한꺼번에 나온 듯합니다. 이곳 향문사가 어떤 책을 내던 곳인지는 잘 모르지만, 실업계 고등학교 교과서도 펴내었구나 싶어요. 책마다 책등에 고무도장이 찍혀 있는데, 이곳 향문사는 ‘서울 종로구 견지동 39번지’에 있었다고 합니다. 음, 지금도 이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을까요. 지금도 남아 있는 가운데 이렇게 책을 내놓았을까요. 또는 이제 문을 닫으면서 책을 내놓았을까요.

이 ‘낱말꾸러미(용어집)’는 아직 우리 학문에는 낯설다고 할 만한 낱말을 어떻게 한국말로 옮겨적으면 좋은가 하는 풀이를 달아 주는 책입니다. 한쪽에는 우리 말 풀이를 달고 옆에는 영어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밝힙니다. 그래서, 이즈음 어떤 낱말로 학문 낱말을 옮겼는지 살필 수 있는 한편, 잘 옮긴 낱말과 어설피 옮긴 낱말을 가릴 수 있습니다. 또한, 옆에 영어로 어떻게 적는가를 알려주고 있어서, 뒷사람들이 뒷사람 나름대로 알뜰히 풀어내 볼 겨를을 마련해 줍니다.

무엇보다도 이 낱말꾸러미를 알뜰히 간수해 주었던 향문사 편집부 사람들한테 고맙습니다. 낱말꾸러미는 마흔 해 안팎이나 되었음에도 무척 깨끗한데, 책등을 잘 보면 이 낱말꾸러미를 수없이 들춰본 자국이 남아서 반들반들하기도 하고 손때가 까맣게 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책겉이나 속은 아주 말끔해요. 출판사에서 자료 간수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고 할까요. 책 만드는 일을 하는 만큼, 자료로 삼는 다른 출판사 책도 알뜰히 돌보고 살피는 가운데 자기가 만드는 책도 알뜰히 가꾸고 여밀 줄 아는 매무새입니다.

한쪽에는 조금 쌓여 있고, 다른 곳에는 차곡차곡 꽂힌 책들. 이 책들 가운데 우리한테 어떤 책이 반갑게 다가올까요.
▲ 책방 골마루 한쪽에는 조금 쌓여 있고, 다른 곳에는 차곡차곡 꽂힌 책들. 이 책들 가운데 우리한테 어떤 책이 반갑게 다가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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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예전 문교부, 지금 교육부(이름이 교육인적자원부에서 또 뭔가로 바뀐 듯한데 모르겠습니다. 그냥 교육부라고 하면 될 터인데 무슨 꼬리말을 그리도 길게 달려고들 하는지. 그렇게 이름을 길게 늘여뜨린다고 교육 정책을 더 잘 펼칠 수 있지 않는데 말입지요)에서는 이러한 낱말꾸러미를 얼마나 꾸준히 엮어내어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3) 우리가 배우는 역사란 무엇일까

《宇根 豊,日鷹一雅,赤松富仁-田の蟲圖鑑》(農文協,1989)은 논에서 살아가는 나쁜벌레와 좋은벌레와 그저 그런 벌레, 세 가지를 사진을 섞어서 한살이를 보여주는 도감입니다. 왜 생기고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퍼지는가를 찬찬히 보여주는데, 참 잘 엮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도감은 ‘용인자연농원 자료실’에 있다가 흘러나왔습니다. 책 뒤쪽에 대출표가 고스란히 붙어 있는데 대출실적인 0. 아무래도 아무도 빌려 읽지 않아서 자료실에서 버렸구나 싶어요. 그곳 용인자연농원 자료실에서 이 책을 기꺼이 사 주고, 또 빌려 읽은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며 기꺼이 버려 주었기에, 저는 한국땅에서 이처럼 좋은 나라밖 도감 하나를 고맙게 얻습니다.

《케이트 밀레트/정의숙,조정호-성의 정치학 (하)》(현대사상사,1976)가 보입니다. 다른 헌책방에 나들이를 갔더니 어느 여대생이 “아주머니, 여기 《성의 정치학》이라는 책 있어요?” 하고 여쭈던데, 《성의 정치학》은 나라밖에서 대단히 이름나고 많이 팔리는 책이라지만, 나라안에서는 이름은 제법 드높아도 잘 안 팔리는 책입니다. 인터넷새책방에서 찾아보기를 해 보면, 책이 뜨기는 하나 상권만 있고 하권은 절판이라고 하는데, 상권을 주문해도 집으로 올지 안 올지 모르는 일. ‘현대사상사’라는 곳은 1999년에 마지막 책을 펴냈다고 하나, 이 책도 품절이고, 이 책을 빼면 1995년에 나온 책이 가장 요사이에 펴낸 책입니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라, 이만한 ‘고전’인 《성의 정치학》쯤 된다면, 다른 출판사에서라도, 이를테면 ‘또하나의문화’ 같은 곳에서라도 손바닥책으로 되살려 주면 좋을 텐데, 대학교에서 여성학 교재로 곧잘 쓰는 듯하면서도 좀처럼 이 책을 되살려 주려는 낌새는 없습니다. 그저 학교 앞 복사집에서 슥 복사해서 보고만 있을는지.

.. 이것은 “육체의 부활”, “본성적인 사랑” 등의 용어에 의하여 선전되어 온 것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남성 지배권을 국제적이고 다분히 제도화된 신비스런 종교로 변모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압적인 형태로서의 성의 정치이며, 로오렌스는 가장 유능하고 정열적인 성의 정치가이다 ……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의 지배권이 가장 현실적이고 의논의 여지가 없는 기초 위에 구축되어 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여성에게 제시하는 것이 발기이다. 근면한 학생 코니는 교리문답에 성실하게 대답하듯, “남자들이 왜 그렇게 뻐기는지 이제야 알겠어요.”라고 말한다. 경건한 신자의 황홀감, 사랑을 하는 여자의 환희와 희열의 풍자적인 감정으로 그녀는 신격화한 음경을 무섭고도 숭고하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적인 현상 앞에 그녀가 위협을 당했다는 로오렌스의 약간 새디스트적인 주장은 여성의 종래의 매저키즘에 대한 또 하나의 입증으로 하려는 것 같다 ..  (458쪽)

《성의 정치학》은 여성학만이 아닌 문학으로도, 사회학으로도, 인류학으로도, 정치학으로도, 또 문화학으로도 읽힐 만한 책이 아니냐 생각해 봅니다.

인터넷으로 목록을 올려놓는 책이기 때문에, 구경을 한 다음 아무 데나 꽂아 놓으면, 찾느라 헤매게 됩니다.
▲ 알림띠 인터넷으로 목록을 올려놓는 책이기 때문에, 구경을 한 다음 아무 데나 꽂아 놓으면, 찾느라 헤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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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사회문제자료연구실-80년대 부산지역 노동운동》(친구,1989)라는 책을 봅니다. 책이 아주 깨끗해서, 창고에 박혀 있다가 나왔을까 싶어 구석구석 살피니, 예전 임자가 살며시 읽은 고운 손때가 보입니다.

《이강훈-대한민국 임시정부사》(서문당,1975)라는 조그마한 책이 보입니다. 고등학교 다니던 때에 인천 시내 새책방을 두루 돌면서 하나둘 사모으며 읽던 손바닥책입니다. 그때 제 주머니로는 요로코롬 자그맣고 값싼 손바닥책은 여러 권 사들여서 읽을 수 있는 좋은 벗이었습니다. 같은 책이라 해도 요 손바닥책으로는 그때 돈 1000원으로도 새책을 사서 스피노자도 읽고 박은식도 읽고 신채호도 읽고 삼국유사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열하일기며 박지원이며 이옥이며 김만중이며 하는 옛 문학도 천 원짜리 한 장으로 치르는 손바닥책으로 살뜰히 읽어낼 수 있었어요.

.. 윌슨 대통령의 특사 크레인이 상해에 도착하여, 그를 환영하는 연회가 개최된다는 말을 듣고, 여운형은 1천여 명이나 되는 중외 인사가 모여 있는 그 장소를 찾아가서, 크레인의 연설을 듣고 중국 요인 왕정정의 소개로 크레인을 방문하여,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조국에 대하여 저지른 죄악사의 전말을 설명하고, 이 기회에 우리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우리 민족의 참상을 호소하려 하는데 원조를 바란다는 요청을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크레인은 힘이 자라는 데까지 원조하겠다는 것을 흔연히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여운형은 조동호, 장덕수, 신국권 등과 한 자리에 모여 진정서를 두 통 작성하여 한 통은 크레인에게 주어 윌슨 대통령에게 전달케 하고, 한 통은 상해에서 발간되는 월간 잡지 《밀로드 리뷰(Millord Review)》 사장에게 주어, 우리 대표가 파리 강화회의에 못 가게 될 경우 대신 제출해 달라고 부탁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 제출자가 문제였다. 세계 각국 대표가 참석하는 국제회의에, 개인 명의로 제출할 수 없음은 상식 이전의 일이다. 그리하여 상해 재류 혁명 지사들이 모여 ‘신한청년당’이라는 벼락 정당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강화회의에 파견할 적임자로 김규식이 발탁되어 1919년 2월 1일 파리를 향하여 출발하였다 ..  (18쪽)

이 손바닥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교과서에는 안 실린 이야기’였고, 교과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이 잔뜩 나왔습니다. 교과서 지식과 시험공부 지식으로는 파리 강화회의와 여운형이 아무런 인연이 없으리라 봅니다. 그저 김규식 이름 하나에다가 몇 년도 일이었던가쯤만 배울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숫자와 사람이름 몇 가지 외운다고 하여 역사를 배우는 셈이 될는지요. 참말로 역사를 배운다고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수많은 연대기에 따라서 갖가지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는 일은 조금도 역사 공부가 아니라고 느낍니다. 딱 한 가지 사건을 가르치더라도,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바탕과 흐름과 보람을 찬찬히 되새길 수 있도록 해야 비로소 역사 공부라고 느껴요.

우리는 헛역사를 배우고 있지 않는가 모르겠습니다. 참역사가 아닌 빈역사를 배우고 있지 않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 땀방울이 스며든 역사는 하나도 모르는 채, 권력자 뱃살가죽과 개기름만 배우고 있지 않나 모르겠어요. 우리 삶과 우리 삶터는 등돌린 채 저 머나먼 서양나라 삶과 삶터에 눈알 쏘옥 빠지도록 기울여져 있지 않는가 모르겠어요.

책 든 손이 갑자기 떨립니다. 나는, 또 내 동무들은, 또 내 이웃들은, 그동안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지금 아이들은, 또 뒷날 아이들은, 또 먼먼 뒷날 아이들은 학교에서 교과서로 무슨 역사를 배울는가 하는 생각이 떠오릅니다. 코끝이 찡합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고르는 저마다 다른 책. 우리한테는 다 다른 책이 다 다른 뜻으로 반갑게 느껴집니다.
▲ 책시렁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고르는 저마다 다른 책. 우리한테는 다 다른 책이 다 다른 뜻으로 반갑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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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曾野綾子-增補新版 戒老錄》(しようでん社,1972 첫,1983 64쇄)이라는 책이 보입니다. 이 책은 우리 말로 옮겨졌는데, 한국책 이름은 《계로록, 아름답게 늙는 지혜》입니다. 일본책에는 ‘戒老錄’ 다음에 “自らの救いのために”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책은 하루하루 나이가 들어 이제 ‘늙은이’가 되었구나 하고 느끼는 분들한테, 늙음을 거리끼거나 멀리하거나 싫어하지 말고 기쁘게 받아들여 주소서, 하는 마음으로 엮어내려 갑니다.

《앤소니 드 멜로/김상준 옮김-깨어나십시오!》(분도출판사,1993)가 보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 님 책은 보이는 대로 하나둘 사들였습니다. 어느덧 다섯 권째쯤 사들이는구나 싶은 이분 책입니다. 깨달음(종교) 이야기를 낮은자리 사람들 누구나 알기 좋도록 손쉽게 풀어내어 펼쳐 주는 분입니다.

.. 집착할 때 삶이 파괴됩니다. 무언가에 매달릴 때 삶이 중단됩니다. 이것은 복음서 곳곳에 씌어 있습니다. 삶은 이해함으로써 얻습니다. 이해하십시오. 또 다른 환상, 즉 행복은 흥분과 같지 않다는 것, 짜릿한 감동과 같지 않다는 것도 이해하십시오. 짜릿한 감동은 욕구를 채우며 사는 데서 온다는 것도 환상입니다. 욕구는 불만을 낳고 조만간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충분한 고통을 겪었을 때 그것을 볼 준비가 됩니다 ..  (127쪽)

 (4) 나오면서 하나 더

이쯤 구경을 마치고 돌아갈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둘러봅니다. 이때, 문가 책꽂이 높은 곳에 꽂혀 있는 《이가라시 미키오/권성애 옮김-보노보노》(서울문화사) 18권(2001)부터 24권(2005)이 보입니다. 오, 《보노보노》! 그렇지만, 짝은 안 맞네. 아니 뒤엣편 짝은 일곱 권이 맞으니, 이 앞과 뒤만 찾으면 될 테지. 그나저나 이 책까지 사자면 주머니가 휑하게 될 듯한데.

판권을 보니 18권부터 21권까지는 권성애 님이 옮겼고, 22권부터 24권까지는 정은 님이 옮깁니다. 앞엣책은 못 보아서 모르겠는데, 앞엣책도 옮긴이가 다를까요? 뒤엣책은?

책방 한켠에 놓인 작은 걸상에 앉아서 책 한 권 집어들고 시간을 보내어 보는 느긋함을 우리들은 얼마나 넉넉히 맛보고 있을까요.
▲ 작은 걸상 책방 한켠에 놓인 작은 걸상에 앉아서 책 한 권 집어들고 시간을 보내어 보는 느긋함을 우리들은 얼마나 넉넉히 맛보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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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이 만화책까지 사야 해, 말아야 해. 어떡하지? 어떡한담.

슬슬 〈책사랑방〉이 문 닫을 때가 다가옵니다. 이제는 더 머뭇거릴 수 없습니다. 사느냐 마느냐를 얼른 판가름지어야 합니다.

참말 어떡하나. 그냥 사 버려. 그냥 못 본 척하나. 괜히 짝 맞출 생각은 하지 말고 요 일곱 권이나 즐길까.

괜히 책방 골마루를 한 번 두 번 더 누빕니다. 눈에 들어오는 책도 있으나, 더 뽑아들거나 구경하지 않습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주머니에서 피를 보기로 하자고 마음먹습니다. 만만치 않은 책값을 치릅니다. 속으로 눈물을 찔끔. 이주도 또 죽었다고 생각하며 지내야지.

고른 책은 가방에 넣고 책방 아저씨는 가게 문을 닫습니다. 아저씨가 넌지시 ‘바쁘지 않으면 소주나 한잔 할래요?’ 하고 묻습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몸. 또 망설여집니다. 갈팡질팡 쭈뼛쭈뼛하다가 멋쩍게 웃으며 집에서 기다리는 사람한테 문자를 보냅니다. 딱 한 시간만 후다닥 마시기로 합니다. 마음이 바쁘니 술도 속에서 잘 안 받습니다. 그래도 싸하게 내려가는 느낌은 좋습니다. 답답함과 갑갑함은 풀리지 않지만, 꾹 눌려 있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집니다. 오늘밤은 책을 다문 몇 장이나마 넘긴 다음 잠들 수 있을 듯합니다.

덧붙이는 글 | - 인천 부개역 〈책사랑방〉 / 032) 501-5011
http://booksarang.com / 인천 부평구 부개2동 196-2호 2층

- 인터넷방 <함께살기 http://hbooks.cyworld.com> 나들이를 하시면 헌책방+책+우리 말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태그:#헌책방, #책사랑방, #인천, #부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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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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