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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기자] 2006년 2월 서울 용산 초등생 살해사건, 2007년 3월 제주도 서귀포 초등학생 성추행 후 살해사건, 그리고 지난해 성탄절 날 실종된 후 80여일 만에 처참한 주검으로 가족 품에 돌아온 2명의 안양 초등생 살해사건.

모두 집 근처에서 '아는 사람'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경찰의 낡은 수사기법이 초동수사의 실패로 이어져 오히려 피해를 키웠다는 점이다.

여성·아동 대상 범죄가 나날이 지능화되고 잔혹해지고 있는 추세에 이에 대응해 경찰청이 '프로파일러(profiler·범죄심리분석가)' 인력을 크게 늘려야 한다는 범죄전문가들의 목소리가 높다.

2000년대 들어 급격히 발전한 인터넷 문화와 <C.S.I> 등 각종 지능범죄 드라마들 때문에 범인들이 나날이 '똑똑'해지고 있는 데 비해 한국의 경찰은 구태의연한 수십 년 전 수사기법을 고수하며 전문가를 참여시키는 것에 소극적이다.

범죄심리를 분석하는 프로파일러는 범죄 현장을 단서로 '신원 미상인 사람의 성격과 특징을 목록으로 만듦'으로써 범죄자의 유형을 좁혀나가며 압박한다.

미국에서는 1970년대 초반 FBI에 행동과학부가 창설되면서 본격적인 프로파일링 수사기법이 도입돼 많은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국내에선 2000년 초에야 서울지방경찰청에 프로파일링 팀이 설치됐다.

문제는 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프로파일러를 충분히 갖추지 못한 데다 일선 현장에서의 공조체제가 원활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프로파일러의 운영은 경찰청 산하 과학수사센터 범죄정보지원계가 총괄하고 있는데, 관계자에 따르면 경찰청 소속 프로파일러는 전국적으로 50여 명 규모이며, 특히 2005년부터 '특채'로 3기까지 배출된 프로파일러들 중 여성 비율이 70%에 육박한다. 그러나 향후 구체적인 모집계획은 딱히 잡혀 있지 않다.

전문가들이 더욱 심각한 문제점으로 지적하는 것은 프로파일러들이 전국 16개 '청' 단위에 일정 수만 배정돼 있고, 실제 사건 현장과 가까운 일선 지구대와는 거의 공조체제를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비효율성은 초동수사 실패로 필연적으로 이어지며 이번 안양 초등생 사건처럼 사건을 장기화시키게 된다.

국내의 대표적 민간 프로파일러인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는 "요즘은 '힘'으로 범인을 검거하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에 프로파일러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진다"며 "FBI만 해도 심리학박사 출신 프로파일러 300여 명이 활동 중이고, 석사 출신은 수도 헤아릴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현재 프로파일러들이 '청' 단위로 소속돼 있더라도 초동수사부터 지구대와 공조수사를 펼 수 있도록 기존 체제를 과감히 뜯어고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경찰이 공적수사 관행을 과감히 탈피할 것을 촉구했다.

돈, 치정, 원한 등 예측가능한 범죄 동기를 뛰어넘어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곧 살해 이유가 되는 요즘, '범인의 마음을 읽고 이를 예측할 수 있는' 전문인력의 활용 필요성을 가장 시급히 체감해야 할 곳은 바로 경찰청이다.

안양 초등생 유괴·살해사건 이후... 엽기 살인공화국 벗어나려면
애도의 국화 다발이 놓여있는 초등생 이혜진양의 책상. 사건 발생 80여일을 넘겨 결국 시신으로 돌아온 2명의 안양 초등생 유괴·살해사건을 보며 언제까지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해야 하느냐는 분노의 목소리가 높다.
 애도의 국화 다발이 놓여있는 초등생 이혜진양의 책상. 사건 발생 80여일을 넘겨 결국 시신으로 돌아온 2명의 안양 초등생 유괴·살해사건을 보며 언제까지 똑같은 비극을 되풀이해야 하느냐는 분노의 목소리가 높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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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엽기적 아동 살해사건이 일어나는 이런 대한인국에서 어떻게 아이를 키우란 말이에요?"
"범인은 늘 아이들 가까운 곳에 있던데, 그렇게 당하고도 경찰은 왜 같은 실수를 또 저지르는 거예요?"

경기도 안양 초등학생 유괴·살해사건 이후 온 대한민국이 '이웃집 남자' 때문에 공포에 떨고 있다. 2007년 현재 전국에서 발생한 미귀가·가출신고는 총 4만여 건으로, 이 중 아동 실종 건수는 8000여 건에 달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여성과 아동 대상 범죄가 전체 범죄의 80%를 차지하고 있고, '돌아오지 않은' 가출자들이 범죄에 희생됐을 가능성이 높은 가운데 일반인들의 혼란과 공포도 높아만 간다.

GPS를 활용해 아동의 위치를 확인하는 이동통신사의 아동보호 프로그램에 부모들의 신청이 몰리고, 방송사의 유괴 예방 인형극 관람에 시청자들의 신청이 폭주하는가 하면, 아동 유괴의 원인과 현황, 대책을 국내외로 모색하는 심층프로들에 대한 재방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사이코패스 범죄 개인 차원에선 절대 못막아

미처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일상에 버젓이 들어와 있는 사이코패스(psycho-path, 범죄행위 자체를 즐기는 정신질환자)에게 개인은, 국가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이런 범죄에 대해 개인의 주의를 요구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단언한다. 개인의 안전주의조치를 강조하다보면 엉뚱하게 피해자 책임론과 국가 직무 방기론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범죄 예방과 해결을 위해선 무엇보다 국가 차원에서의 장기적인 시스템 구축과 지역공동체의 노력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가족 해체와 독신가구 증가에 따라 '소외'가 증가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성찰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경찰 시험과목 조정... 프로파일러 등 전문요원 양산해야

이보다 좀더 현실적이고 단기적인 대책은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가)의 양성과 활용도를 높이고, 전자감시제도를 확대하는 동시에 교정교화 프로그램을 강화하며, 경찰 채용 단계에서부터 시험을 통해 지능범죄에 대응할 수 있는 소양을 가늠하는 등의 실용적 방안들을 확립하는 것이다.

1980년대 초 미국에서 구금형의 대체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해 현재 세계 10여 개 국에서 시행하는 '전자감시제도'는 일정 조건으로 석방(가석방)된 범죄자의 이동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범죄자의 손목이나 발목에 전자감응장치를 부착하는 제재 방법이다. 재범을 미연에 방지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의 복귀를 촉진한다는 장점이 있지만 인권침해 논란은 여전하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 국회를 통과, 올해 10월 시행 예정인 성폭행범을 대상으로 한 전자팔찌법안이 대표적이다.

또 초동수사부터 경찰이 전문성을 가지고 수사에 임해야 한다. 그러나 일반 경찰공무원 채용 시험과목에는 경찰학 개론, 수사기법, 영어, 형법 등만 있을 뿐 이상범죄 대응능력을 테스트할 수 있는 범죄심리학 등 새로운 과목은 전혀 눈에 띄지 않고, 또 향후 이런 과목을 추가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힌편으로는 경찰청이 지구대 초동수사 단계에서부터 민간 전문가의 자문과 개입을 적극적으로 구할 수 있도록 '체질 변화'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안양 사건의 경우, 경찰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지 않았고, 언론 보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들의 의견을 흘려듣는 식이었다는 것.

지역사회 차원에서는 '안전요원'이라는 일자리를 새롭게 창출할 수 있다. 범죄자들은 목격자를 제일 두려워하기 때문에 목격자만 있으면 절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속성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안전요원 한 명이 감시카메라 100대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노인 유휴인력을 하루 일정 시간 동안 등하교 도우미, 놀이터 관리사 등의 새로운 직업군에 투입시키자는 제안도 잇따르고 있다.

등하교 도우미, 놀이터 관리사 등 ‘안전요원’ 새 직업 창출을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범죄 희생자에 대한 지역공동체의 관심이다. 피해자의 생존을 위해서는 실종 후 3시간, 이어서 24시간 내의 초동수사가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서 지난해 4월 도입된 '앰버경고'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이 우선 과제다. 유괴 후 살해당한 희생아동의 이름을 따서 96년 미국에서 시작된 앰버경고는 유괴나 유괴 의심 실종사건시 전광판, 교통방송, 휴대폰 등을 통해 실종아동의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협조를 구하는 제도다. 2002년 앰버경고를 도입해 실종아동 30명의 목숨을 구하는 성과를 올린 캘리포니아주의 경우 최근 6개월간 아동 유괴 관련 사건이 단 1건도 발생하지 않은 '기적'을 만들어냈다.

아동 유괴를 다룬 MBC TV <PD수첩> 게시판에 올라온 "정부도, 경찰도, 시민도 반성해야 한다", "무관심했던 내가 창피하다. '내 아이'라는 생각을 가졌어야 했는데…" 등 시민들의 울림이 헛된 메아리로 끝나지 않는 것, 바로 여기에서부터 억울한 희생을 막는 첫 단추가 채워져야 할 것이다.

[인터뷰] 국내 대표 프로파일러 이수정 교수
프로파일러 이수정 교수
 프로파일러 이수정 교수
ⓒ 여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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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국내에는 경찰청 소속 인원까지 합해 100여 명의 프로파일러들이 활동 중이다.

여성 비율이 절반에 육박하는 이들 프로파일러 중 대표주자인 이수정 경기대 교수(범죄심리학). 안양 초등생 유괴·살해사건 발생 초기부터 폐쇄적이고 소아기호증이 있는 30~40대 독신남성을 범인으로 추정하는 정확한 예측력을 과시했다.

이 교수의 전문분야는 사회심리학과 정서심리학. 연세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한국심리학회 공공정책위원회 위원장, 한국경찰발전연구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 안양 사건을 보면 이해되지 않는 점이 많다. 여성 주민의 성추행 제보 등 경찰이 이미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는데도 왜 사건을 조기에 해결하지 못했나?
“아 무리 많은 정보가 제공된다 해도 이를 일정 시스템 안에 입력해 퍼즐을 맞춰 완성해가는 총체적이고 전문적인 과정이 없다면 무용지물이다. 이후에는 용의 대상자를 면담하고 그의 심리를 읽어내는 등 접촉기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프로파일러 같은 전문인력이 초동수사 단계에서부터 투입돼야 한다."

- '아는 사람'에 의한 범죄, 그것이 제일 두렵고 끔찍하다.
"대부분의 범죄 행위자가 내 주변, 나를 잘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피해자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대상 피해자를 관찰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어 사소한 행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범죄 의지만 있으면 곧장 범죄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정씨도 성범죄만 입증 안됐지 전과 7범이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옆에 살면서 낮에는 컴퓨터 수리기사로 모든 집에 마음대로 드나들고, 밤에는 대리운전으로 차를 몰고 다니는데도 엄마들은 꿈에도 이 사실을 몰랐다. 이게 제대로 된 사회냐?"

- 범죄자 전자감시제도를 뜻하는 것이라면, 인권침해 논란이 상당할 것 같다.
"개인 인권을 넘어 공동체 사회 속에서의 인권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때이고, 기존 인권논쟁을 넘어선 새로운 차원에서의 인권 논의가 필요하다. 또 전자감시제도를 확대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교정치료를 강력히 병행해 통제 속에 전과자의 '변화'를 유도해야 한다."

- 서구에서는 성폭행 범죄가 여성과 아동에게만 그치지 않고 있는데, 우리 사회는 어떻게 전망하는가?
"우리보다 산업화가 20여 년 앞선 선진국들의 범죄 유형이 한국 사회에 정착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신체적으로 취약하고 상대적으로 제압하기가 쉬운 여성과 아동이 범죄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이제 이 공식에 남자아이가 추가될 날도 머지 않았다."


태그:#프로파일러, #사이코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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