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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典型) : 모범이 될 만한 본보기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여러 가지 전형을 담고 살아간다. 일상의 사소한 것들부터 시작해서 국가관 같이 복잡하고 거창한 무형의 상징까지. 전형은 개개인 각각의 경험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만큼 사람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사회 구성원이기 때문에 비슷하기도 한다. 전형은 보통 어떤 사물과 마주할 때 그 인식의 준거로써 작용하며, 통상 그것이 지나치게 강할 때 편견이라는 말로 갈음되기도 한다.

 

2월의 어느 날, 막바지로 치닫는 겨울에 미련이 남아 강원도 동해로 향하는 야간버스에 몸을 실었다. 10년 전 어느 날 청량리에서 무작정 막차를 탄 이후 동해는 내게 겨울의 전형이 되었기 때문이다.

 

답답한 일상에 새로운 다짐이 필요했던 나를 항상 따뜻하게 맞아주던 그곳. 내가 일출 하면 겨울의 추암, 겨울산 하면 두타산의 설경을 우선 떠올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나는 그곳에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심기일전 했으며, 두타의 눈길을 밟으며 겸허함을 배웠다. 그곳은 나의 20대가 겨울과 함께 묻혀 있는 공간이다.

 

 

새벽녘 추암, 언제나 그랬듯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일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결같이 카메라를 들고 붉은 태양이 촛대바위에 걸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그러나 아쉽게도 태양은 구름 속에 가렸고 설익은 아침은 도둑처럼 이미 와 있었다. 진인사대천명이라 했던가. 역시 꾀한다고 모든 걸 이룰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만 꾀하는 과정까지의 노력만이 있을 뿐.

 

촛대 바위 위의 갈매기 한 마리가 도도하게 앉아 사진의 모델로서 사람들의 아쉬움을 달래는가 싶더니, 어느새 사람들은 떠나고 해변은 갈매기 무리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래도 겨울이라 지들도 추운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녀석들과 철썩철썩 때리는 파도 소리가 겨울바다의 스산한 풍경을 대변하고 있었다.

 

일출에 대한 미련을 접고 다시 길을 나서서 도착한 곳은 동해 묵호항. 항구는 새벽에 들어온 만선으로 인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싱싱한 물고기를 보여주며 연신 손님들을 잡아끄는 아주머니들과 한 발 물러서서 그물 등을 손질하며 묵묵히 다음 항해를 준비하는 어부들. 그 역동적인 모습이 비릿한 바다 내음과 어울려 사람을 동하게 만들었다. 

 

 

살아낸다는 거. 그 고단한 일정의 위대함이 거기 있었다.

 

항구를 나와 항한 곳은 두타산. 8년 전 겨울, 군인의 신분으로서 휴가 때 처음 등정 한 이후 내게 겨울산의 전형이 된 바로 그 두타산이었다. 2년 전 신입사원 연수의 일환으로 여름에도 정상을 찍은 바 있지만, 역시나 두타산은 겨울 두타산이 제 멋이었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의 손길을 덜 탄 편이라 빽빽하게 우거진 원시림이 쌓인 눈과 함께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삼화사를 지나 잠시나마 올라가보기도 하지만 등산화도, 아이젠도 갖추지 못한 까닭에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8년 전에도 군인으로서 젊은 혈기만 믿고 늦게 산을 오르기 시작해 하마터면 늦은 시각 길을 잃을 뻔 하지 않았던가. 산은 왜 이리도 깊고, 사람은 왜 그리 없었던지.

 

그 뒤로 두타산에서의 기억은 나의 등정에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두타(頭陀)가 불교용어로서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佛道) 수행을 닦는다는 뜻이라더니, 두타산은 내게 만용의 위험을 아로새겨 놓았다.

 

등산은 포기한 채 삼화사 초입의 계곡에서 다가오는 봄을 만끽한다. 아직까지 얼음이 채 녹지 않은 겨울 풍경이지만 그 밑으로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이 이제 곧 꽃피는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아듀! 겨울이여.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추암, #두타산, #삼화사, #묵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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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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