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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 고달사지 풍경 고려시대 3대 거찰 중의 하나였다는 여주 고달사지는 황폐한 모습이 봄눈 속에 고즈넉한 모습이었다. 폐허가 되어 버린 폐사지에는 석불좌와 탑비, 그리고 아름다운 부도만 남아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했다.
ⓒ 이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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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거찰 중 하나였다는데 완전히 폐허가 돼버렸네.”

“그러게 말이야,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절에 3대 거찰 중의 하나였다면 정말 대단했을 텐데….”

 

폐허가 되어 버린 고달사 옛터로 들어서며 일행들이 탄식하는 말이었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는 이 고달사가 고려시절에는 3대 거찰 중의 하나였다고 쓰여 있었다.

 

“어, 저기 좀 봐? 고달사지라고 이정표가 있는데 한 번 들렀다 가자고.”

 

도로변의 이정표를 보고 찾아들어간 고달사지(高達寺址), 남한강변의 신륵사를 둘러보고 양평으로 가는 길에 만난 천 년 고찰 고달사 옛터는 흩날리는 눈발 속에 황폐한 모습이었다.

 

고려시대 3대 거찰 중 하나인 고달사지

 

입구에 있는 400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 고목 아래 차를 세워놓고 눈보라 속을 걸어 절터로 들어갔다. 발굴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여기 저기 파헤쳐지고 덮어 놓은 모습도 보인다. 조심조심 걸어 들어가 맨 처음 만난 것이 보물8호로 지정되어 있는 석불좌였다.

 

4각형의 철제 울타리가 세워져 있는 안쪽에 서있는 석불좌는 그러나 좌대만 남아 있을 뿐 불상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 석불좌는 상대, 중대, 하대석과 지대석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고려시대의 사각대좌였다.

 

좌대의 높이는 1,57m로 사각의 좌단은 각기 다른 돌을 다듬어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불상은 사라졌지만 좌대는 보존상태가 매우 좋아보였다. 그러나 정작 불상은 없고 좌대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 모습이 여간 쓸쓸한 것이 아니었다.

 

석불좌를 둘러보고 조금 옆에 떨어져있는 원종대사 혜진의 탑비로 향했다. 눈발은 여전히 흩날리고 있어서 주변 산들이 희부연 모습으로 바라보인다. 원종대사 탑비도 훼손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니 이건 뭐야? 머리는 용, 몸통은 거북이잖아, 그 위에 올려 있는 것은 또 뭐지?”

정작 탑신은 보이지 않고 좌대인 귀부와 탑머리에 있던 이수만 남아 있는 것이 여간 괴상망측한 모습이 아니었다.

 

이 탑비는 원종대사 혜진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 세워 놓은 것이었다. 본래의 비는 아래에서부터 위쪽으로 귀부, 비신, 이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귀부는 비신과 이수를 지탱하는 부분이고 비신은 비의 건립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이수는 비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얹어 놓은 것으로 수호와 장식의 효과를 내는 부분이다. 좌대인 귀부는 거북과 용의 형상으로 각각 장수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 중에서도 용은 물과 땅, 천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왕래하는 힘과 신통력의 상징이기도 하여 비의 주인공에 대한 흠모의 정신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비의 주인공인 원종대사 혜진은 통일신라 말기인 서기 869년에 태어나 고려 광종 때인 958년에 입적할 때까지 활동한 승려다. 본래의 탑비는 1916년에 무너져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전시되어 있다.

 

“원종대사 혜진의 이름이 조금 전에 신륵사에서 만났던 나옹화상 혜근과 아주 비슷하잖아?”

“어, 정말 그러네. 나옹화상 혜근이 지은 시에 곡을 붙인 '물 같이 바람 같이'라는 노래가 가사도 참 좋고 곡도 구성지잖아, 누가 한 번 불러보지.”

 

오늘의 노래가 된 나옹화상의 시 한 수

 

그러나 노래를 정확하게 부를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대충 흥얼흥얼 불러보았지만 그래도 눈발 흩날리는 폐사지에서 부르는 옛 노래는 운치가 넘쳐나고 있었다.

 

청산(靑山)은 나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蒼空)은 나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미움도 털어내고

물처럼 바람처럼 그렇게 살다 가라네

 

세월은 나보고 덧없다 하지 않고

우주는 나보고 곳 없다 하지 않네

번뇌도 벗어두고 욕심도 내려놓고

강 같이 구름 같이 말없이 가라하네

 

-나옹화상 혜근(懶翁和尙 惠勤: 1320∼1376)의 시 전문-

 

이 고달사지는 1993년 7월 23일 사적 제382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4만 1,035㎡로 고려시대의 3대 거찰답게 크고 넓은 편이다. 이 절은 서기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된 것으로 고달이라는 사람이 세웠다 하여 고달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한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는 특히 광종 이후 역대 왕들의 비호를 받던 사찰로 알려져 있는데 폐사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원종대사 탑비를 둘러보고 위로 올라가자 작은 돌탑 두 개가 문설주처럼 서 있는 안쪽에 임시거처처럼 보이는 고달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달사지는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 마을 골짜기를 사면으로 병풍처럼 감싸 안은 혜목산(慧目山) 산자락에 안겨 있었다. 절터는 대부분 농경지와 임야로 황폐한 모습이었다. 오른편 산자락에는 아주 특이한 모양의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부도(浮屠)가 휘날리는 봄눈 속에 외롭게 서있었다.

 

이 부도는 다른 사찰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멋진 문양과 형태를 갖고 있었다. 특히 8각 몸통에 새겨진 부조는 정교하기 짝이 없어서 당시 정으로 쪼아서 만들었다기보다 예리한 칼로 깎아 만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부귀도 영화도 한 줌 바람인 것을

 

“그것 참. 이렇게 멋진 부도와 탑비. 그리고 석불좌에 드넓은 터를 누렸던 절이 어떻게 이런 모습의 폐허가 되고 말았을까?”

“그러니까. 부귀도 영화도 모두 인생무상이라는 거야.”

영화로웠던 옛 시절의 거찰이 폐허로 변한 모습이 모두 예사롭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가는 계절의 끝자락은

초로(初老)의 마음도 유혹하는가

겨울이 숨죽인 날

양평으로 가는 길에

산수 좋은 여주 땅을 지나가려니

이정표 한 개가 발길을 붙잡는다.

 

고달사지(高達寺址)

 

한 시대 영광을 누리며 웅장했다던

천 년 전의 옛터를 찾으니

염불소리 목탁소리 세월 따라 가버렸나

고승(高僧)도 불타(佛陀)도 흔적이 없고

흩어진 주춧돌에 탑하나 덩그랗구나

 

덧없는 바람인가 옛 영광 부질없으니

찾아온 길손이야

휘휘 둘러 스쳐가지만

당간지주(幢竿支柱) 그 자리에는

수 백 년 느티나무 고목 한 그루

오히려, 까치집 몇 개를 품어

귀한 생명을 키워왔구나.

 

-이승철의 시(詩) <고달사지에서> 모두-

 

“결국 가람은 간 곳 없고 유물 몇 개 남은 것만 보고 가는구먼.”

 

느티나무 고목 밑에 세워 놓은 승용차에 오르며 누군가 혼잣말처럼 뇌까린다. 양평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그 사이 눈이 그쳐 쨍한 하늘이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고달사지, #석불좌, #원종대사, #나옹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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