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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9일 오후, 호주의 상징인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폐막식을 끝으로 제15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APEC 오스트레일리아 2007'이 종료됐다.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을 포함한 21개국 정상들이(타이완과 홍콩은 장관) 참가했던 회합이 대단원의 막을 내린 것. APEC 사상 최초로 환경을 주제로 한 '시드니 선언'을 채택한 다음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좋은 성과를 얻었다는 시드니 APEC이었지만 폐막식 분위기는 무척 맥이 빠진 느낌이었다. '지구에서 가장 힘이 센 사람(The strongest man in the planet)'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폐막식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시를 중심으로 움직인 APEC

 

부시는 21개국 정상 중에서 유일하게 폐막식 전에 호주를 떠났다. 부시 일행은 "4년 반 동안 끌어온 이라크전쟁에 관한 중대한 백악관 보고서를 준비하기 위해서"라는 폐막식 불참이유를 밝히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호주국영 ABC-TV의 보도에 의하면, 부시 대통령은 오는 9월 12일 대 국민 연설을 통해서 "이라크를 방문해보니 머지않아 이라크 파병 미군의 일부를 철수시킬 수 있을 정도로 상황이 진전된 것을 확인했다"고 밝힐 예정이다.

 

아무튼 주최국 호주의 존 하워드 총리는 부랴부랴 APEC 마지막 일정표를 조정하느라 진땀을 뺐다. 9일자 <시드니모닝헤럴드>는 "부시의 조기출국 때문에 APEC 폐막식 직전에 선보이는 주최국 전통의상 사진촬영도 하루 앞당겼다"고 보도했다.

 

그것뿐이 아니다. 호주의 제안으로 힘들게 채택된 '기후변화에 관한 선언문'도 당초 계획과는 달리 초안을 하루 먼저 공개할 수밖에 없었다. 부시 대통령 앞에서 공개하는 것이 무게를 더하기 때문인데, 결국 최종 선언문은 그 다음날 발표됐다.

 

부시의 시드니 APEC 일정 변경은 호주 조기입국부터 시작됐다. 9월 4일, 부시는 당초 예정보다 이틀 먼저 시드니에 도착했다. 이라크를 깜짝 방문한 후 바로 호주로 직행했기 때문이다.

 

부시 움직일 때마다 시드니 스톱!

 

결국 부시의 움직임에 따라 APEC 일정이 조정된 셈인데, 부시가 시드니에 머문 5일 동안 시드니는 온통 그의 도시였다. 부시가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시드니가 정지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시드니 스톱!

 

이렇듯 도시의 심장부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던 부시 대통령이 떠나버린 직후부터 시드니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유령의 도시'에서 '천혜의 관광도시'로, '철조망과 경찰의 도시'에서 '야외카페와 시민의 도시'로.

 

APEC 경비를 이유로 금요일이던 7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해서 3일 연휴가 되는 바람에 시드니 시민들이 대거 '아웃 오브 시드니'를 했다가 돌아온 것도 한 가지 이유지만, 하루 종일 시드니 상공을 날아다니던 헬기의 소음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부시의 출국과 때맞추어 부시 반대 시위도 끝났다. 동시에 흉물스럽게 설치되었던 APEC 철조망 장벽도 철거되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포함한 20명의 정상이 아직 시드니에 머무는 시간에 철조망이 철거되기 시작한 것.

 

결국 2.8m 높이의 5km 철조망 장벽은 부시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시 한 사람 때문에 4백만명이 살고 있는 시드니의 일상을 스톱시키다니, 호주가 이런 나라인 줄 몰랐다"는 어느 시민의 불평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점령군 사령관' 부시, '중국 상인' 후진타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라이벌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의 정상이 다른 나라의 정상들보다 먼저 호주에 입국했다. 9월 3일에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이 도착했고 바로 그 다음날 부시 미국 대통령이 도착한 것.

 

그들은 호주대륙의 양쪽 끝으로 호주에 들어왔다. 후진타오는 호주의 서부관문인 퍼스로, 부시는 동부관문인 시드니를 통해서 입국했다. 호주국영 ABC-TV는 이를 두고 "마치 두 정상이 호주대륙의 양쪽 끝에서 상륙하는 것 같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두 정상이 호주 도착 다음에 보인 행태는 정반대였다. 그런 연유로 부시 대통령은 '점령군 사령관'이나 '할리우드 액션배우'로,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중국 상인'이나 '통상장관'으로 비유됐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호주에 도착하자마자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주도(州都)인 퍼스 근처의 광산 등을 방문해서 호주 광물자원 현장을 확인했다. 이어서 후진타오는 마치 농부 같은 차림으로 호주의 수도인 캔버라 근처에 위치한 목장과 농가를 방문해서 호주국민들에게 아주 친근한 인상을 주었다. 중국은 호주의 광물과 에너지자원, 양모 최대수입국이다.

 

반면에 부시 대통령은 하워드 총리와 함께한 공동기자회견 외에는 주로 유람선 관광, 바비큐 파티 등으로 조기도착 이틀간의 일정을 소화했다. 부시는 오페라하우스 건너편의 숲으로 가서 산악자전거까지 즐겨서 호주국민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3일 연휴를 포기한 1만명의 시민들

 

시드니 APEC에 참석한 21개국 정상 중에서 부시와 후진타오만 반대시위를 당했다. 물론 대규모 APEC 반대시위가 열렸으니 21명 전원이 반대시위의 대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부시는 이라크전쟁 책임, 후진타오는 파룬궁 탄압이 그 이유였는데 규모면에서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부시 반대 시위대는 1만명을 상회했지만, 후진타오 반대 시위대의 규모는 수백명에 머물렀다.

 

9월 8일 오전 11시, 오페라하우스에서 APEC 정상회의가 개막되는 시간에 맞춰서 1만여명의 시드니 시민이 운집해 타운홀과 하이드파크에서 약 5시간 동안 부시 반대 시위를 벌였다. 기자도 현장으로 나가서 취재와 인터뷰를 했다.

 

호주사람들을 '아웃도어 피플(Outdoor People)'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3일 간의 연휴를 포기한 것은 보기 드문 선택이었다. 시위현장에는 부모와 함께 나온 어린이, 중고등학생, 주부, 연예인, 교수, 언론인 등이 망라됐다. 특히 여성의 숫자가 더 많은 것도 특이했다.

 

그들이 들고 나온 피켓에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겼지만 시위 자체는 축제분위기가 물씬했다. 연설, 집단토론 등이 벌어지는가 하면, 한쪽에선 댄스파티도 열렸다. 물론 폴리스 라인 범위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테러리스트', '지구 파괴자', '스톱 부시(STOP BUSH)', '빈곤을 외면하는 자본가들의 앞잡이'. '중동을 파괴한 텍사스 갱단 두목', '핵무기 장난감을 갖고 노는 위험한 악동(惡童).' 이상은 시위현장에서 목격한 수많은 피켓 중에서 옮겨 적은 내용이다.

 

9월 4일 <시드니모닝헤럴드>가 갤럭시 여론조사를 인용해서 "호주 국민은 부시를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생각한다(Poll says Bush is worst US president)"고 보도한 것을 감안하면, 피켓 구호에 호주 국민의 생각이 상당 부분 담겼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사에서 부시를 지지한다고 답변한 응답자는 32%에 불과했다.

 

 

 

 

시드니에는 성조기가 없다

 

9월 8일 시위를 조직한 여러 그룹 중에서 '스톱 부시 연합(Stop Bush Coalition)'의 패디 깁슨은 "부시 반대 시위는 지구에서 가장 힘센 사람에 대한 시드니 시민의 예의 표시"라고 풍자적으로 표현했다.

 

반면에 '전쟁반대 동맹(No War Union)'의 칼 브리지우드는 "부시 대통령이 선택한 정책 때문에 고통당하는 수많은 지구인에 대한 도리"라면서 "특히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등에서 양민이 살육당하는 현실을 외면하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했다.

 

엄마와 함께 시위에 참가한 15살짜리 여학생은 "부시 대통령이 호주를 이라크전쟁으로 끌어들였다고 믿기 때문에 시위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나에겐 아직 투표권이 없기 때문에 시위에 참가하는 것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했다.

 

부시 대통령이 5일 동안 시드니에 머무는 동안 그를 환영하는 성조기는 눈에 띄지 않았다. <데일리텔레그래프>는 9월 6일 약 10여명이 "우리는 미국을 사랑하고, 부시를 지지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8일 시위현장에서 만난 마틴 로스씨는 "그들은 시민들의 강력한 성토를 받고 바로 철수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시드니 유대인 그룹의 지원을 받은 젊은이들이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시위현장에서 목격한 성조기는 깃발 가운데에 나치문양이나 핵무기, 부시 얼굴 등을 그려 넣은 것들이 전부였다. 또한 많은 성조기들이 찢기고 불탔다. 부시 대통령 때문에 애꿎은 성조기가 수난을 당한 것.

 

이렇듯 미국의 우방국가 중에서도 맹방이나 혈맹국가로 불리는 호주에서 성조기가 불타고 있었다. 시드니 APEC에 참가한 가장 중요한 지도자(?) 부시 대통령에게 호주국민들이 무척 화가 난 것이다. 특히 호주군인이 파병된 이라크전쟁 때문에.

 


태그:#APEC, #부시, #후진타오, #이라크전, #시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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