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빈 이씨(暎嬪 李氏)는 조선 21대 국왕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후 조선의 국왕이 되는 손자 정조에서 순조, 헌종, 철종은 모두 영빈의 직계 자손들이다. 하지만 정작 친아들 사도세자는 남편 영조의 손에 비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고, 심지어 어머니 이씨는 영조에게 피눈물을 머금고 사도세자를 처분할 것을 직접 요구하게 되는 기구한 운명을 겪어야만 했다.
 
영빈 이씨는 왜 인륜을 저버리고 남편에게 친아들을 죽여달라고 해야만 했을까. 5월 1일 방송된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106회에서는 '어머니 영빈 이씨의 비극적 고백, 사도세자의 생모는 왜 아들을 죽여달라 애원했나' 편을 통해 조선 최악의 왕실비극이었던 임오화변(壬午禍變)과, 그 또다른 희생양이었던 영빈 이씨의 기구한 인생을 조명했다.
 
이씨는 1696년(숙종 22년)에 태어나 6세의 어린 나이에 궁녀로 발탁되어 입궁하게 된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이씨는 임금이 거처하는 대전에서 근무하는 지밀궁녀로 발탁되어 가까이서 영조를 보필하게 된다. 당시 이씨의 나이 29세, 영조는 31세였다.
 
이씨를 추천한 것은 숙종의 세 번째 왕비이자 영조의 법적 어머니였던 인원황후였다. 이씨는 본래 인원왕후의 처소에서 일하던 궁녀로, 어린 나이에도 남다른 몸가짐과 일처리를 통하여 인원왕후의 신임을 얻었다고 한다. <영빈행장>에 따르면 숙종은 인원왕후를 보필하는 이씨의 모습을 보고 "높은 벼슬하는 집안의 여자들이 이런 나이에는 오히려 어린 아이의 습관을 면하기 어렵거늘, 여항(민가)의 여자가 조숙하기가 이와 같을수 있는가"라고 감탄했다고 하다.
 
인원왕후는 영조의 왕위 등극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정치적 후원자이자 러닝메이트이기도 했다. 인원왕후가 자신이 가장 신임하던 베테랑 궁녀인 이씨를 굳이 영조에게 보낸 것은, 순수하게 영조를 도우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영조 곁에 자신의 사람을 심어서 정보를 얻으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는 엄격하고 깐깐한 성격에 완벽주의적인 기질로 유명했던 임금이다. 그런 영조조차도 자신의 곁에서 24시간 똑부러지게 일하고 이씨의 모습에 서서히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영조가 즉위한지 2년만인 1726년 11월, 이씨는 영조의 승은을 입으면서 아이를 갖게 되어 내명부 종2품 '숙의(淑儀)'에 책봉되면서 정식으로 영조의 후궁이 된다.
 
<영빈행장>에는 이씨의 인품을 보여주는 한 일화가 전한다. 영조가 후궁인 이씨를 지나치게 총애한다며 신하들이 우려하는 간언을 올리자, 영조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못했다.
 
그러자 이씨는 "임금이 비록 신료의 말을 허심탄회하게 듣는다고 해도, 신료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꺼리지 않고 말을 다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 일로부터 용감히 간언하는 기풍이 다시는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라며 오히려 자신을 공격한 신하들을 감쌌다. 이에 영조는 자신에게 바른 말을 해주는 이씨의 진심을 느끼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이씨는 1730년 내명부 정1품 '빈(嬪)'의 첩지를 받아 영빈(暎嬪)이 되었다. 이씨는 영조의 장녀인 화평옹주와 화협옹주 등을 출산했다. 그리고 1735년(영조 11년)에는 마침내 아들이자 영조의 후계자가 될 사도세자를 낳게 된다. 영조의 후궁이 된지 9년 만이자 이씨의 나이 40세에 늦게 얻은 귀한 아들이었다.
 
<영조실록>에는 영조가 "삼종의 혈맥이 끊어지려 하다가 비로소 이어지게 되었으니, 지금 다행이 돌아가서 열성조를 배알할 면목이 서게 되었다"며 사도세자의 탄생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삼종이란 효종-현종-숙종의 직계 후손을 의미하며, 영조로서는 왕실의 정통성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하지만 이씨는 귀하게 얻은 아들을 정작 직접 키울 수 없었다. 후궁이 낳은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법적으로 중전의 아들이 되어야하는 게 왕실의 법도였기 때문이다. 후궁은 생모라고 할지라도 어떠한 권리도 내세울수가 없었다. 이씨와 사도세자는 모자이기 이전에 철저한 군신(君臣) 관계가 되어야만했다.
 
어쩌면 비극의 씨앗은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영조는 생후 100일밖에 안된 사도세자를 원자로 책봉하여 저승전(儲承殿)으로 보냈다. 어린 아기를 생모와 왕실 여인들의 품에서 떼어내서 따로 거처하게 하고, 일찍부터 세자교육을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736년에는 돌이 갓 지나자마자 세자로 책봉했다. 이미 영조의 눈에 사도세자는 아직 보호받아야할 어린 아기이기전에, 자신의 뒤를 이어야할 후계자였던 것이다.
 
이씨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직접 키우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세자의 곁을 지키던 궁녀와 환관들은, 과거 궁녀 출신이었던 이씨를 업신여기고 불손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이들은 주로 선왕이자 영조의 이복형인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이었다. 자연히 영조나 이씨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못한 인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씨는 혹시라도 궁인들에게 둘러싸인 사도세자가 괴롭힘을 당할까 우려하여 아들을 만나러가는 것도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영조는 왜 정적이나 다름없는 경종의 궁인들에게 자신의 후계자인 사도세자의 보필을 맡겼을까. 궁인은 오늘날로 말하면 왕실의 업무를 맡아보는 전문직이었고, 당시로서 가장 경력있는 궁인들을 찾다보니 자연히 경종 시절의 인물들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경종 독살설' 등의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영조가 경종의 궁인들에게 후계자 양육까지 믿고 맡길만큼 중용하는 모습을 통하여 본인의 정치적 이미지 개선을 챙기려고 했다는 분석도 있다.
 
다행히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 영특함을 드러내며 건강하게 자랐고, 생모 영빈 이씨에게도 다정하고 효성스럽게 대했다. 1744년 사도세자가 10살이 되어 동갑내기인 혜경궁 홍씨와 혼인하자, 이씨는 어린 며느리 홍씨를 살뜰하게 챙기며 궁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고 서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장성하면서 영조와의 부자관계는 점차 악화된다. 아들교육에 집착했던 영조는 사도세자가 점차 자신이 원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갈수록 불만을 드러내고 노골적으로 구박을 일삼았다. 사도세자는 점점 아버지 영조의 눈치를 보면서 위축되어갔다.
 
1749년 영조는 사도세자의 자질을 시험하기 위하여 대리청정(代理聽政)을 맡겼다. 하지만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실제로 권한을 위임한게 아니라 사사건건 개입했고 아들의 정무능력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며 질책했다. 이는 사도세자의 자존감에 큰 상처를 남겼다. <영조실록>에는 "대리한 이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고 기록하며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이후 영조의 지속적인 압박과 스트레스로 마음의 병이 생겼음을 설명하고 있다.
 
사도세자는 불과 15세 때부터 오늘날로 치면 우울증과 정신적인 공황 증세등을 호소했으며, 성인이 된 21세가 되었을 무렵에는 증상이 크게 악화되어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사도세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크게 화를 내고 광기를 드러내는가 하면, 갑자기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을 시도하는 등 이상행동을 일삼았다고 한다.
 
영조의 핍박으로 인한 지속적인 스트레스가 누적된 끝에 사도세자의 정신이상을 유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영빈 이씨는 나날이 악화되는 남편과 아들 사이의 부자관계 사이에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왕실 법도상 후궁에 불과한 이씨로서는 세자교육에 왈가왈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씨로서는 세자의 비행이 어떻게든 영조의 귀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광증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영조를 만나러갈 때 의복을 입는 것을 거부하는가 하면, 급기야 화를 내며 아랫사람을 살해하는 살인을 수차례 저지르기까지 했다. 심지어 사도세자는 자신의 후궁과, 어머니 영빈 이씨를 모시던 궁녀까지도 살해했다. 이는 곧 어머니에게 직접 칼을 들이미는 것과 다름없는 패륜이었다.
 
영조는 그동안 사도세자의 비행을 몰랐던 것일까. 영조의 성격을 감안할 때 사도세자의 비행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결코 가만히 있지않았을 것이다. 당시 영조는 경희궁, 사도세자는 창덕궁에 기거하며 같은 궁궐이라도 서로 떨어져 지냈고, 사도세자는 영조에 대한 문안인사도 거를만큼 관계가 소원해진 상황이었다. 또한 영조는 이미 사도세자에게 자신의 후계자로서 관심과 기대를 거의 잃은 상황이었고, 대신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훗날의 정조)를 더 총애하고 있었다.
 
어느 날, 사도세자는 이번엔 칠순이 가까워지던 어머니 이씨를 위하여 성대한 잔치를 마련했다.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이씨가 타는 가마를 임금이 쓰는 것처럼 크게 만들고 깃발을 올렸으며 행렬이 이어지는 동안 성대하게 음악까지 연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왕실 법도에는 어긋나는 일로 영조가 알았다면 불호령이 내려질만한 일이었다. 사도세자의 이런 기행은 세자의 생모임에도 후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했던 어머니를 위한 효심인 동시에, 오랜 세월 자신을 억압해온 영조와 왕실 법도에 대한 반항의 의미로도 해석된다. 정작 이씨는 자식의 효도를 기쁘게 누리지도 못하고 혹시라도 또다른 사단이 날까 불안에 떨어야했다.

1762년, 이미 위태롭던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몰고가는 '나경언의 고변'사건이 터진다. 나경언이라는 인물이 그동안 세자의 허물과 비행을 영조에게 폭로하고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고발한 것이다.
 
사도세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나경언의 배후를 밝혀줄 것을 청원했지만, 영조는 진상조사없이 서둘러 나경언을 참형에 처해버린다. 이에 진상을 밝힐 방법이 영원히 사라져버린 사도세자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한중록>에는 사도세자가 술에 취하여 "칼을 차고 아무렇게나 하고 오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에둘러 기록하며,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아버지 영조를 죽이고 싶다는 극언까지 했음을 암시한다.
 
1762년 윤5월 13일, 임오화변 당일의 아침이 밝았다. 영빈 이씨가 영조를 찾아와 떨리는 목소리로 그동안 차마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이씨는 "지금 옥체의 위기가 경각에 달렸으니 어찌 사사로운 감정에 이끌려 아뢰지 않겠습니까. 대처분을 하소서"라고 간언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어머니 이씨가 아들 사도세자의 비행을 인정하며 아들을 죽여달라고 청한 것이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역모죄로 처벌하게 되면 여러 가지 정치적 문제가 발생한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 정조마저 연좌제에 따라 죄인이 되어버리기에 처벌이 불가피하다. 여기에 영조도 인륜의 측면에서 자식을 죽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생모 이씨가 사도세자의 처분을 요청하고 이를 수용하는 방식이라면 영조에게 '면죄부'가 생긴다. 학계에서는 이를 두고 영조와 이씨간의 무언가 사전에 합의된 교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는 사실상 영조의 강요된 입김에 이씨가 따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위시킨 뒤 뒤주에 가두는 형벌을 집행한다. 신하들은 진상조사가 우선이라며 만류했지만, 영조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결국 사도세자는 그로부터 8일 만에 아사하면서 숨을 거뒀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사망한 후 세자의 지위를 복권시켰고, 손자인 세손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하는 방식으로 신분을 세탁한 뒤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니, 훗날의 정조다.
 
그날 이후, 영빈 이씨는 평생 자식을 죽였다는 회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한중록>에 따르면 이씨는 며느리 혜경궁 홍씨 앞에서 "내가 차마 못할 일을 하였으니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으리라. 내 본심인 즉 종사와 나라, 그리고 임금을 위한 일이나, 생각하면 모질고 험하니, 빈궁은 내 마음을 알거니와 세손 남매라도 나를 어찌 알리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며느리는 속사정을 알지만, 아버지를 잃은 세손 남매가 당시 괴로운 선택을 해야했던 할머니의 심경을 이해할지 근심하는 내용이다.
 
또한 이씨는 어느날에는 남편 영조에게도 "전하께서는 어찌 어미로서 자식의 죄를 고하게 하셨습니까"라고 쌓인 원망을 쏟아냈다고 한다. 이에 대한 영조의 대답은 그저 "지금 와서 어찌하겠는가"라는 한 마디가 전부였다고 한다.

피눈물 속에 아들의 삼년상을 마치고 불과 2주 뒤인 1764년 7월 26일, 이씨는 69세의 나이로 한많은 생을 마감하며 아들의 곁으로 떠났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이씨가 아들을 잃은 후, 슬프고 원통한 마음에 죽고싶어 했으며, 심지어 등에 종기가 났는데도 치료를 포기하고 죽을 때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고 한다.

영조는 39년간 해로한 영빈 이씨를 위하여 성대한 장례를 치러줬고, 그 묘소에는 친필로 의열묘(義烈墓)라는 현판을 지어서 걸어줬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서 자식을 희생한 이씨의 충심을 기리는 의미였다.

영빈 이씨는 왕의 총애를 받고 세자를 낳은 친모까지 되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하여 평생 늘 한걸음 뒤에서 물러서서 모든 비극을 지켜봐야만 하는 불행한 삶을 겪었다. 이씨가 생애 처음으로 어렵게 자신의 목소리를 낸 순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의 처분을 요구해야만 했으며, 이는 그녀에게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남편과 손자,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아들을 죽여달라고 청해야만 했던 어머니의 마음이란 과연 어떠했을까.
벌거벗은한국사 영빈이씨 영조 사도세자 임오화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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