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25 20:20최종 업데이트 23.05.25 22:19
  • 본문듣기

이규산 장인이 화로에서 달궈진 쇳덩이를 꺼내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려 호미 날 모양을 바로잡고 있다.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대장간에서 만들어진 각종 농기구들. ⓒ 정진오

 
농사는 늘 먹고사는 문제의 중심이었다. 요새는 그 중요도가 낮아졌다고는 하나, 국가 안보의 핵심에서 식량이 빠질 수는 없다. 농사가 얼마나 귀한 일이었으면, 우리는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을 농사짓는다고 한다. 농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연장이다. 호미, 낫, 괭이, 쇠스랑, 가래 같은 농기구들을 만드는 곳이 바로 대장간이다. 예전에 대장간의 주요 손님은 농민이었다.

농촌이나 도시를 가리지 않고 폭넓게 쓰이는 게 호미다. 도심에서도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풀을 매는 데 제격인 호미의 수요도 덩달아 늘었다. 호미의 인기는 국내뿐만이 아니다. 경상북도 영주대장간의 호미는 미국의 인터넷 종합 쇼핑몰 '아마존(Amazon)'의 히트 상품이 되면서 'K-호미'란 말까지 생겨났다.


호미의 종류가 여럿이어서 지역마다 그 생김새도 다르다. 고장마다 토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5월 17일, 섬이면서도 농사일이 비교적 많은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도를 찾았다. 그곳에 대장간이 있다. 이규산 장인이 운영하는 <영흥민속대장간>. 

상품 진열대에는 여러 가지 모양의 호미 수십 자루가 쌓여 있었다. 농사철이다 보니 호미를 찾는 손님들이 제법 있었다. 물론 호미는 밭농사나 논농사에만 쓰이는 게 아니다. 갯벌에서 바지락 같은 수산물을 채취하는 데도 호미가 있어야 한다.

<영흥민속대장간>의 이규산 장인은 호미와 관련해 우리나라에서 매우 귀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혼자서 여러 지역의 호미를 만들 줄 알기 때문이다. 이규산 장인은 젊었을 때 인천 도심에서 대장간 일을 배우면서 여러 종류의 호미를 접할 수 있었다.

이규산 장인이 만든 '옹진 호미'와 '강화 호미'
 

<영흥민속대장간> 이규산 장인이 만든 옹진 호미. 일반 호미에 비해 날의 볼이 좁고 가볍다.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강화 호미는 날이 옆으로 비틀려 있고, 한쪽 날은 칼처럼 날카롭게 벼려 있다. 강화 호미는 <영흥민속대장간> 이외에는 거의 만들지 않는 희귀 제품이다.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옹진 호미(아래)와 일반 호미(위). 일반 호미는 날을 반으로 나누어 한쪽으로만 넓게 퍼져 있지만, 옹진 호미는 날은 좁지만 양쪽 어깨가 살아 있는 게 특징이다.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이규산 장인이 만든 서서 풀 매는 호미. 허리를 숙이지 않고도 서서 밭을 긁고 풀을 맬 수 있도록 자루가 길다.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이규산 장인은 상품 진열대에 놓인 호미들을 설명하면서 '옹진 호미'와 '강화 호미'를 들어 보였다. 옹진 호미는 황해도 옹진 지역에서 피란 나온 사람들이 썼던 호미를 일컫는다. 인천에 황해도 옹진 출신 실향민이 많이 살다 보니 인천의 대장간에서는 옹진 호미를 만들 일도 그만큼 많았다. 

옹진 호미는 일반 호미와 비교해 호미 날의 볼이 좁은 편이다. 일반 호미는 날이 한쪽으로만 둥그렇게 퍼져 있는데, 옹진 호미는 날이 좁으면서도 어깨가 양쪽에 나 있는 게 특징이다. 옹진 호미는 밭뿐만이 아니라 영흥도나 선재도 같은 바지락을 잡는 갯벌에서도 두루 쓰인다.

강화 호미는 겉모양부터가 특이하게 생겼다. 일반 호미는 풀을 맬 때 호미를 쥔 손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 땅을 콕콕 찍는 데에 편리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강화 호미는 날을 살짝 비틀었고, 그 아랫부분이 칼날처럼 날카롭다. 땅을 널찍하게 긁어내면서도 질긴 뿌리를 끊어내기 쉬운 구조다. 

강화도는 농토가 드넓은 지역이다. 인삼이나 순무 등 강화 특산물을 포함해 그곳에서 나는 작물도 다양하다. 이곳만의 호미가 생겨난 이유이다. 강화에는 예전에 대장간 마을이라는 동네가 있을 정도로 큰 대장간이 여럿 있었다는데, 요새는 다 문을 닫았다.

이규산 장인은 요즘 옹진 호미나 강화 호미를 만들어내는 대장간이 없을 거라고 했다. 그 명맥이 끊기고 있다는 얘기다. 호미 날이 나뭇잎처럼 생겼다 해서 '나뭇잎 호미'라고 부르던 것도 있었는데, 이규산 장인조차 요새는 만들지 않는다고 했다.

호미가 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만드는 과정까지 단순한 것은 아니다. 만들고자 하는 호미에 딱 맞는 철물을 준비해 절단하고 화로에서 달구고, 기계해머로 두드려 모양을 잡고, 절단기로 슴베 길이를 잘라 조절하고, 다시 화로에 넣고, 모루에서 모양을 잡고, 다시 화로에 넣고. 이렇게 해서 완제품을 내놓을 때까지의 공정이 무려 20여 차례나 되었다. 이규산 장인은 "호미가 쉬운 것처럼 보이지만 작업하기가 까다로운 물건"이라고 했다.

사람과 짐승 간의 협업 도구 '쟁기'
 

농기계가 농촌에 들어오기 전 농부들이 논밭을 갈 때 썼던 쟁기. 앞으로 길게 뻗쳐 나간 나무가 '성에'이고. 바닥으로 내리친 굵은 나무가 '쟁깃술'이다. 줄여서 '술'이라고도 한다. 그 술에 '보습'과 '볏'을 댔다. 아래 세모난 쇠가 보습이고, 그 위에 살짝 비틀려 있는 널찍한 게 볏이다. 성에와 술을 직각으로 붙잡아 삼각형을 만들어주는 게 '한마루'다. 한마루는 나무로 만들기도 했고, 저렇게 쇠기둥에 나사산을 파서 만들기도 했다. 술 가운데 옆으로 뻗은 작은 나무는 손잡이다. 이 쟁기는 인천의 한 음식점에서 보았다. 2023년 4월 14일. ⓒ 정진오

 

쟁기의 바닥 면. 땅에 닿는 술의 바닥이 보인다. 보습을 술에서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테두리에 리벳(rivet) 작업을 한 게 눈에 들어온다. 인일철공소의 송종화 장인에게 이 사진을 보여주니, 이 보습은 공장에서 주물로 만든 게 아니고 대장간에서 만든 것임을 대번에 알아챘다. 리벳 처리를 한 저 테두리 때문이었다. 보습 테두리는 인일철공소의 벽에도 걸려 있다. 쟁깃술 바닥에 깐 길쭉한 쇠는 그냥 쇠판이라고 부른다. 쟁깃술을 보호하면서 땅을 갈 때 잘 미끄러지도록 한다. 생긴 모양대로 '혓바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영흥민속대장간>의 이규산 장인은 말했다. 2023년 4월 14일. ⓒ 정진오


농기구 중에 쟁기란 게 있다. 요즘은 사라지다시피한 쟁기는 사람과 짐승 간의 협업 도구였다. 쟁기를 사이에 두고 소가 앞장을 서고 사람이 뒤를 받친다. 쟁기를 구성하는 여러 부품 중에 보습과 볏이 있다. 보습과 볏은 쇠로 만들어야 하는 부품이다. 

보습이 땅을 밀고 들어가 위로 올려주면 볏이 그 흙을 옆으로 돌려놓는 역할을 한다. 보습은 부러지기도 하고, 닳기도 해서 1년에만도 여러 개가 필요하다. 보습은 주물로 공장에서 찍어내기도 했지만 쟁기질하는 농민들은 대장간 제품을 많이 썼다. 쉽게 부러지지 않고 오래 쓸 수 있어서다.

보습이 깨지면 농부는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아이들은 기뻐했다. 고물상 엿장수에게 깨진 보습을 주고 엿을 바꾸어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먹을 게 귀했던 시골 아이들에게 깨진 보습은 먹거리 그 자체였다.

농사짓는 걸 '경작(耕作)'한다고 하는데, 이 '경(耕)' 자의 부수인 '耒(뇌)'자가 쟁기란 뜻이다. 쟁기는 그만큼 농사에 꼭 필요한 도구였다. 쟁기의 쓰임새는 보습에서 나온다. 쟁기의 형식도 여럿이었는데, 볏이 없는 쟁기는 있어도 보습 없는 쟁기는 없었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는 우리 땅의 농기구까지 자세히 조사해 『조선의 재래농구』라는 책자를 펴냈다. 경주한국무속박물관에서는 1995년 이 책을 번역하고 다듬어 같은 제목으로 출판했다. 여기 보면, 당시 우리나라 쟁기는 여섯 종류가 있었다. 겨리쟁기, 겨리쟁기에 볏이 없는 것, 호리쟁기로 짧은 멍에쟁기, 호리쟁기로 긴 멍에쟁기, 호리쟁기에 볏이 없는 것, 개간쟁기 등이었다.

소 한 마리가 끄는 걸 '호리'라 하고, 두 마리가 끄는 걸 '겨리'라고 한다. 중부 이남에 호리쟁기가 많았고, 북부지방에 겨리쟁기가 많았다고 한다. 개간쟁기라는 명칭이 낯설다.  벌판 개간용 큰 쟁기인데, 그 개간쟁기에 끼우는 보습이 얼마나 컸던지 긴 지름이 60cm가 넘었고, 소 서너 마리가 끌어야 했다고 한다.

박태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인천 <인일철공소> 벽면에는 송종화 장인이 오래전 농기구를 만들던 시절의 보습 부속품이 아직도 걸려 있다. 쟁깃술 끝에 보습을 끼우고 밑에서 고정시키는 테두리 쇠이다. 2023년 5월 19일. ⓒ 정진오


조선시대, 보습은 농사용으로만 쓰인 게 아니었다. 불에 달구어 살을 지지는 고문 도구로도 쓰였다. '낙형(烙刑)'이라는 고문인데 이를 단근질이라고 한다. 우리 역사에서, 보습 단근질 고문을 당하는 와중에도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면서 버텨냈다는 인물이 있다. 인현왕후 폐위 사건 당시 박태보(朴泰輔, 1654~1689)다.

박태보의 보습 단근질 일화는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등장한다. 김구는 일제 경찰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당할 때, 박태보가 보습 단근질을 당하면서도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고 한 말을 떠올리며 이겨냈다고 『백범일지』에 적었다.

보습 같은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살을 지지는 낙형은 너무나 가혹했다. 인현왕후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던 박태보는 여러 차례의 단근질 고문을 받았다. 단근질 고문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그때 이미 죽은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박태보는 진도 유배형을 받고 서울을 나서자마자 노량진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뒤로 45년이 지났을 때인 영조 10년, 1734년에 이 낙형 제도는 폐지되었다. 이제 보습은 더 이상 잔혹한 고문 도구로 쓰이지 않게 되었다.

보습은 우리나라 수출품목이기도 했다. 함경도 북평사(北評事)를 지낸 박래겸(1780~1842)의 『북막일기(北幕日記)』에 보면, 1827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공시(公示)를 열어 보습, 소금, 소 등을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다. 보습이 중국 만주 지역과의 교역 품목이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보습이 중국의 쟁기에 쓰일 만큼 호환성이 있었다는 얘기다. 교역 시기는 12월이었다. 만주인들이 한겨울에 보습을 가져간 것은 봄 농사를 미리 준비하기 위함이었던 듯하다.

조선과 중국 만주 지역과의 무역을 '북관개시(北關開市)'라고 한다. 만주 지역에는 중국 중앙정부의 물자지원이 원활하지 않아 그들은 우리에게서 소금, 농기구, 소 등을 공급받았다. 우리는 말이나 짐승 가죽 등을 받았다. 북관개시에는 공시, 사시(私市), 마시(馬市)가 있었다. 이 북관개시를 서로 간에 물자를 교환한다고 하여 호시(互市)라 칭하기도 했다.

이처럼 보습 이외에도 우리나라와 중국의 농기구는 오래 전부터 그 생김새나 쓰임이 비슷했던 듯하다.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의 서긍(徐兢)은 고려의 문물을 살펴본 뒤 『고려도경』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중에 농업 분야 설명에서 "쟁기나 농기구는 중국과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하고 싣지 않는다"고 썼다.

지역에 따라 모양이 달랐던 '괭이'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 배점리 산골마을의 한 농가 창고에서 찾은 괭이. 낡은 자루와 녹슬고 닳은 괭이 날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난다. 2023년 4월 6일. ⓒ 정진오

 

<영흥민속대장간>에서 만든 괭이 날. 날이 길쭉하고 네모진 모양이다.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1970년대 인천에서 농사를 많이 지은 화교들의 농기구를 만들어 본 이규산 장인도 화교들의 농기구가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이규산 장인은 다만 화교들이 쓰던 농기구 중 괭이만큼은 우리의 것과 크게 달랐다고 했다. 중국의 괭이는 목이 가늘고 날이 얇은 편이었다. 이규산 장인은 화교들의 요구에 맞게 이 중국 괭이도 만들어 팔았다.

괭이 역시 농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도구이다. 밭이랑을 고르거나 골을 내거나 논을 고르거나 땅을 파는 데 괭이가 편리하다. 『조선의 재래농구』에 보면, 지역별로 괭이의 형태가 달랐다. 경기도 부근의 괭이는 날 끝이 뾰족하고 중앙부가 약간 두꺼웠다. 남부지방의 괭이는 날 끝이 네모꼴이었다. 이 네모꼴이 일본의 쇠 곡괭이와 비슷하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쓰는 괭이도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의 것이 겉모양에서 달랐다는 얘기다.

일본인들만 우리의 농기구를 보고 기록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벽두에 우리나라 어부 문순득이 바다에서 표류하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뒤로 3년여 동안이나 필리핀, 마카오, 중국 등지를 거쳐 살아 돌아온 문순득의 체험담을 당시 흑산도에 유배가 있던 정약전(1758~1816)이 받아 적었다. 그게 <표해시말(漂海始末)>이란 책자가 되었다. 

문순득은 오키나와 풍습을 설명하면서 "밭을 가는 것은 큰 괭이를 쓰고, 무논은 먼저 쟁기를 쓴다"고 했다. 밭은 괭이만 갖고도 갈 수 있으며, 논에서는 쟁기로 간 뒤에 괭이 같은 농기구로 흙을 고르게 폈다는 얘기로 읽힌다. 문순득이 보았던 그 오키나와 괭이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네모난 괭이와 비슷했을 것만 같다.

우리나라 괭이가 지역에 따라 그 모양이 달랐던 것은, 땅에 돌이 많으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 때문이다. 산비탈을 개간할 때 주로 썼던 농기구가 괭이였는데, 돌이나 나무뿌리가 많은 땅에서 쓰는 괭이는 날의 끄트머리가 약간 뾰족하게 돼 있었다. 그에 비해 땅이 좀 무르고 고운 지역에서는 날이 네모난 괭이를 썼다.

'단비가 한 보지락 시원하게 내렸다'
 

인천 <인일철공소>의 송종화 장인이 2017년도에 만든 낫. 2023년 5월 21일. ⓒ 정진오

 

이규산 장인이 만든 마늘 캐는 데 쓰는 도구. 길쭉한 두 개의 발이 마늘 뿌리를 다치지 않고 쉽게 캘 수 있도록 고안했다.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농기구 중에 낫을 빼놓을 수는 없다. 벼나 보리 같은 곡식이 익으면 제때 베야 한다. 너무 늦게 베면 낟알이 땅에 떨어져 수확량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때 꼭 필요한 게 잘 드는 낫이다. 낫이 잘 들지 않으면 베는 사람이 몇 배나 더 힘이 든다. 손에 힘을 많이 쓰면, 낫을 쥔 손이나 벼 포기를 잡았던 손이 퉁퉁 부어오를 만큼 아프게 된다. 다음날 일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된다. 풀을 베거나 나뭇가지를 자를 때도 낫이 있어야 한다.

낫도 종류가 많다. 국립국어원에서 낸 민족생활어 자료 총서 네 번째 『금산 사람들의 생활어·대장장이·무속인·단청장』을 보면, 낫의 종류만 12가지다. 왼낫, 조선낫, 외낫, 왜낫, 심지낫, 을목낫, 오목낫, 황새목낫, 복합낫, 얇은낫, 당몽태낫, 수온낫 등이다.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조선의 재래농구』에서는 평낫, 우멍낫, 버들낫, 반달낫, 톱낫, 벌낫, 밀낫 등 7가지가 있다고 했다. 주로 벼를 베는 데 쓰던 걸 '벌낫'이라고 했고, 나뭇가지를 치는 데 쓰는 것을 '밀낫'이라고 했다고 한다.

낫이나 호미, 쇠스랑 같은 농기구는 무기가 되기도 했다. 동학혁명 때 농민군은 별다른 무기가 없다 보니 자신들이 농사지을 때 쓰던 농기구를 손에 들었다. 시인 신동엽은 농민군들의 그 모습을 작품에 옮겼다.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란 시구가 유명한 그의 장편 서사시 <금강>에는 낫, 삽, 호미, 쇠스랑, 괭이 같은 무기가 된 농기구들이 여럿 등장한다.

옛날에,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이 요즘에도 그렇지만 풍년이냐 흉년이냐는 문제는 천재지변에 달렸다. 농사를 잘 짓기 위해서는 가뭄이 오래 들어서도 안 되고, 장마가 오래 지속되어서도 안 된다.

그래선지, 날씨와 농기구가 연결된 우리말도 많다. '호미모'는 물기가 적은 논 같은 데서 호미로 파서 심는 모를 일컫는다. 이와 비슷한 말로는, 마른 논을 호미나 꼬챙이로 파서 심는 '강모'가 있고, 논에 물이 부족하여 꼬챙이로 논바닥에 구멍을 뚫으면서 심는 '꼬창모'가 있다.

비가 온 양을 나타낼 때 호미나 보습에 빗대어 쓰는 말도 있다. '호미자락'은 빗물이 땅에 스며든 깊이가 얕아 호미의 끝이 겨우 들어갈 만큼 조금 내린 비를 말한다. '보지락'은 보습이 들어갈 만큼 빗물이 땅에 스몄다는 말이다. '단비가 한 보지락 시원하게 내렸다'처럼 쓴다.

대장장이가 시인의 시(詩) 선생이 되었다
 

<영흥민속대장간>에서 만든 세 발 쇠스랑.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다양한 농기들을 만들어 온 <영흥민속대장간>의 이규산 장인은 오래 전에 쓰던 가래 견본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가로 폭이 30cm, 세로 길이가 40cm 정도 된다.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두엄을 파내거나 땅 고를 때 쓰는 쇠스랑도 대장간에서 만들었다. 밭에 씨앗을 뿌리기 위해 땅을 파고 흙덩이를 잘게 부숴 이랑을 고를 때 쓴다. 용도에 따라 쇠스랑 발의 크기와 숫자가 달라진다. 두 발, 세 발, 네 발, 다섯 발짜리가 있다. 그 이름도 여럿인데 '소시랑'이라 부르는 곳도 있고, '소스랑'이라고 하는 곳도 있다.

산소의 봉분 쌓는 일을 한다든지, 논 언덕을 높인다든지 할 때 필요한 가래 같은 농기구도 있다. 작은 거는 3명이, 큰 거는 5명이 한 조가 돼 흙을 파 던졌다. 논이나 밭은 물론이고 산역꾼이 가래를 써서 하던 일마저 이제는 포클레인이 대신하게 되면서 가래는 설 곳을 잃었다. 

요즘은 가래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듯하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마저 알아듣기 어려운 시절이 되었다. 이규산 장인의 <영흥민속대장간>에는 더 이상 가래 만들 일은 없어졌지만 예전에 쓰던 그 가래 견본은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예전에, 어린아이들에게는 대장간에서 농기구를 만들어내는 일이 그렇게 신기할 수 없었다. '섬의 시인'으로 불리는 이생진의 <대장간>이란 작품에, 동심에 비친 충청도 서산의 대장간 정경이 펼쳐진다. 1929년생 시인은, 까마득한 서산초등학교 3, 4학년 때 등하굣길 모습을 당장인 듯 눈앞에 담았다.

"… 대장간이 있는 시장으로 달려갔다 / 불 속에서 달궈낸 쇳덩이 / 무엇이 될까 그게 호기심이다 / 호미가 되더니 / 다음엔 소시랑 / 낫이 되더니 / 다음엔 삽 / 이마에서 흐르는 땀 배꼽까지 내려오고 / 배꼽을 지나 베잠방이까지 내려오는 소리 들으며 / 지켜봤다 /지금은 모 심다가도 커피를 배달 받는데 / 아 저렇게 땀을 흘리고서도 / 냉수 한 사발 마시는 걸 못 봤다"

어린 마음에 호기심을 가득 채워준 대장간이, 그 어린 마음을 큰 시인으로 만든 바탕이 되었다. 그때 그, 호미와 쇠스랑과 낫과 삽을 만들던 대장장이가 시인의 시(詩) 선생이 되었다.
 

<영흥민속대장간>의 상품 진열대에 새로 만든 여러 종류의 호미 수십 자루가 쌓여 있다. 2023년 5월 17일. ⓒ 정진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