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2 19:36최종 업데이트 23.06.22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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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와 21세기의 과학기술이 공존하는 곳이 있다. 일본 남쪽의 작은 섬 다네가시마(種子島). 다네가시마에 있는 전시관 두 곳을 가면 500년 세월을 타임머신 타듯 한꺼번에 오갈 수 있다. 하나는 1543년 포르투갈 사람에게 조총을 사들인 뒤 이를 자체 제작하는 데 성공한 일을 기념해 마련한 '다네가시마 박물관'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우주 기술이 집약된 '다네가시마 우주센터'다. ⓒ 정진오


16세기와 21세기의 과학기술이 공존하는 곳이 있다. 일본 남쪽의 작은 섬 다네가시마(種子島). 다네가시마에 있는 전시관 두 곳을 가면 500년 세월을 타임머신 타듯 한꺼번에 오갈 수 있다.

하나는 1543년 포르투갈 사람에게 조총을 사들인 뒤 이를 자체 제작하는 데 성공한 일을 기념해 마련한 '다네가시마 박물관'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의 우주 기술이 집약된 '다네가시마 우주센터'다. 다네가시마 우주센터에는 우주과학기술관이 있어 관람객들이 일본 우주개발의 역사와 미래를 다양한 방식으로 살펴볼 수 있다.


다네가시마 박물관은 '철포관(鐵砲館)'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조총을 철포(鐵砲), 또는 화승총(火繩銃)이라고 쓴다. 일본 조총의 발상지 다네가시마에 현대 최첨단 기술의 상징인 우주센터가 들어선 것은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다.

철포관과 우주센터, 이 두 가지로 하여 다네가시마는 칼의 시대에서 조총의 시대로 넘어가는 변혁의 출발점이자, 우주로 나아가는 일본 미래 기술력의 상징 공간이 되었다.

칼을 쓰던 무사들이 조총을 갖게 되었다는 건 싸움의 승패를 따질 필요조차 없게 되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다. 칼이 총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총, 즉 철포(鐵砲)는 일본어로 'てっぽう(데뽀)'라고 읽는다. 

흔히들 앞뒤 가리지 않고 막무가내인 경우를 '무데뽀(無鐵砲)'라고 하는데, 이 무데뽀가 총도 없이 막 덤빈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무데뽀라는 말의 연원을 찾아가다 보면 결국은 다네가시마에 닿는다.

다네가시마에서 조총을 처음 만든 대장장이
 

1993년 철포 전래 450주년을 기념해 다네가시마라이온스클럽에서 세운 대장장이 야이타 동상. 앉아서 집게를 잡은 이가 야이타일 것으로 보인다. 니시노오모테항을 등지고 본 모습이다(위). 동상 건너편이 니시노오모테항이다. 동상 옆 삼거리를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아래).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다네가시마 우주센터 잔디밭에 가로로 놓여 있는 로켓 모형(왼쪽 위). 다네가시마 우주센터 우주과학기술관 입구에 세워진 로켓 실물 모형. 안내판에는 총길이가 32.57m이고 중량이 90.38톤, 직경이 2.44m라고 쓰여 있다(오른쪽). 다네가시마 우주센터 우주과학기술관 전시장. 우주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코너에서 오사카에 사는 리키다케 도시유키(力武俊行, 사진 가운데) 씨가 우주인들이 입는 옷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리키다케 씨는 이번 일본 대장간 취재의 통역을 맡아 주었다(왼쪽 아래).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다네가시마에서 조총을 처음으로 만든 건 그곳에서 칼을 제작하던 대장장이 야이타 킨베에 기요사다(八板金兵衛淸定)였다. 야이타는 다네가시마의 도주(島主) 다네가시마 도키타카(種子島時堯) 밑에서 사무라이용 칼을 만들던 대장장이였다. 야이타의 신분을 일본 현지에서는 도단야(刀鍛冶), 도장(刀匠), 철장(鐵匠) 등 대장장이를 일컫는 여러 표현으로 적는다.

1543년 8월 25일 다네가시마에 표류선 한 척이 당도했다. 중국 닝보(寧波)에서 출항한 배였다. 태풍을 만나 방향을 잃고 표류하다가 이곳까지 온 거였다. 이 배에 포르투갈 사람 2명이 타고 있었다. 이들이 일본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고 한다.

표류선이 왔다는 보고를 받은 16세의 젊은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는 포르투갈 사람들에게서 조총 2자루를 사들였다. 당시 돈으로 2천 냥을 줬다고 한다. 다네가시마 박물관의 해설사 야나기타 아끼꼬(45) 씨는 2천 냥을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1억 엔에서 2억 엔 사이라고 했다. 우리 돈으로 치면 9억 원에서 18억 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가 거액을 들여 포르투갈 조총을 구매한 건 그 총의 위력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포르투갈 조총은 정확도와 파괴력에서 그동안 볼 수 없던 무기였다. 다네가시마 도키타카는 자신의 막하에 있는 대장장이 야이타에게 이 총을 복제할 것을 명했다.

다네가시마에 조총이 들어온 내력과 새로 만들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일본 전역으로 전파한 경위 등이 <철포기(鐵砲記)>란 책에 자세히 실려 있다. <철포기>는 포르투갈 조총을 처음 사들인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아들인 다네가시마 히사토키(種子島久時)가 1606년에 펴낸 책자다. 다네가시마개발종합센터에서는 이 책의 영인본에 연표 등 보완 자료를 붙여 <향토사료집 철포기>란 책자를 만들어 철포관에서 판매하고 있다.

<철포기> 내용을 뼈대로 하여 야이타가 포르투갈 조총을 본 뒤 새로운 조총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이 다네가시마에서는 전설처럼 전해진다. 여기에 효녀 심청 같은 야이타의 딸이 등장한다.

포르투갈 조총을 연구해 만든 일본의 조총
 

다네가시마 남쪽 우주센터와 가까운 곳에 1543년 포르투갈인들이 표류해 닿았다는 상륙기념비가 서 있다.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다네가시마 철포관에서 판매하고 있는 <향토사료집 철포기>에 실린 1606년 <철포기>의 영인본(왼쪽). <향토사료집 철포기>의 표지(오른쪽) ⓒ 정진오

    
야이타는 포르투갈 조총을 분해해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나 1년 여가 지났을 때까지도 실패만 거듭했다. 화약을 장전해 터트리게 되면 폭발의 힘으로 격발장치까지 망가지는 문제가 자꾸 생겼다. 포르투갈 조총에는 그 장치가 나사산으로 되어 있었는데, 나사산을 파는 기술에서 벽에 부닥쳤다.

그때 다시 포르투갈 상인들이 다네가시마에 왔다. 대장장이 야이타는 그들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포르투갈 상인이 그 기술을 가르쳐주겠다면서 야이타의 딸과 결혼시켜달라는 조건을 내밀었다.

그 얘기를 들은 딸 와카사(若狹)가 선뜻 포르투갈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아버지의 고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이타는 딸을 포르투갈로 시집보내는 대가로 조총 제작기술을 배웠다.

이 와카사 이야기에 색다른 내용이 하나 보태지기도 했다. 포르투갈로 시집간 와카사가 얼마 뒤 남편과 친정 나들이를 했다. 그런데 와카사가 갑자기 몸져누웠고 며칠 안 되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야이타는 딸의 장례를 치렀고 포르투갈 신랑은 혼자서 되돌아가야 했다. 이 와카사의 죽음이 거짓이었다는 게 이 동네에 전해지는 또 하나의 전설이다. 포르투갈에 돌아가기 싫었던 와카사가 집안 식구들과 머리를 짜내 죽은 것처럼 꾸몄다는 거다.

철포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언덕 위에 니시노오모테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에 와카사가 잠들어 있다. 와카사 묘소는 시에서 문화재로 관리하고 있다. 묘소에는 '충효비(忠孝碑)'가 커다랗게 세워져 있고, 와카사의 이야기를 알리는 안내판, 그녀와 관련한 노래비, 연극 공연 기념비 등 여러 기념 석물이 함께 서 있다.

와카사의 무덤은 작은 돌덩이를 얹어놓은 대신에 듬직한 소철(蘇鐵)이 감싸고 있다. 무덤을 지키는 나무 이름에까지 쇠(鐵)가 들어가 있는 게 참으로 공교롭다. 일본에서는 여성을 이렇게 특별하게 기리는 경우가 흔치 않다고 한다.

대장장이 야이타의 기술과 그의 딸 와카사의 헌신
 

소철 나무 둥치 아래 작은 돌(위는 희고 아래는 검은색)이 와카사의 무덤이다(위). 조총 제작 기술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포르투갈 사람과 결혼한 대장장이 야이타의 딸 와카사의 묘소. 충효비라고 새긴 커다란 비가 서 있고 안내판과 시비 등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무덤은 작은 돌을 얹어놓았는데 소철(蘇鐵) 나무가 든든하게 지키고 있다(아래).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다네가시마 철포관 전시장의 한쪽 코너에 전시된 농기구들. 오래전 이 섬에서 농사지을 때 쓰던 괭이며 낫 같은 동네 대장간에서 만들었을 농기구들이 보인다. 2023년 5월 24일. ⓒ 정진오

  
와카사 묘소에는 와카사가 이역만리 포르투갈에서 달을 보나, 해를 보나, 고향 땅과 부모님을 떠올리며 읊었다는 짤막한 시를 새긴 기념비가 있다. 와카사는 포르투갈에서 향수병으로 무척 고생한 듯하다. 얼마나 심했던지 거짓 죽음의 꾀를 써서라도 포르투갈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는 거다.

와카사 묘소에는 또 일본의 유명한 역사 소설가 가이온지 초고로(海音寺潮五郞, 1901~1977)가 묘지를 직접 찾아 읊었다는 시비도 있다.

'슬프다 여기, 와카사의 묘인가 // 백사의 얕은 봉우리 // 바다의 언덕'.

일본 조총의 탄생에는 젊은 도주의 명석한 판단과 이를 뒷받침할 재력, 그리고 대장장이 야이타의 기술과 그의 딸 와카사의 헌신이 있었다. 와카사는 여러 장르의 예술로 다시 태어났다. 그 예술 속 와카사는 500년의 세월을 넘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다네가시마에는 와카사란 이름이 들어간 버스회사도 있다. 이 회사 버스 바깥에는 와카사 타이틀을 크게 써 붙였다.

다네가시마에서 시작된 일본의 조총은 금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그야말로 군웅할거의 땅 일본에서의 힘의 균형추도 빠르게 움직였다. 계속 칼을 쥔 자는 망했고, 새로 나온 총을 든 이는 흥했다.

다네가시마 조총은 일본 안에서만 보급된 게 아니었다. 대마도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는 해적들에게도 들어갔다. 조총을 수중에 넣은 해적들은 제주도 등 우리나라 땅에도 넘나들며 약탈했다.

대마도 해적들도 사용한 다네가시마 조총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동상이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본 철포관 전경. 커다란 배의 모습이다. 저 건너 해가 지는 쪽이 니시노오모테항이다. 2023년 5월 24일. ⓒ 정진오

 

다네가시마 철포관에서 근무하는 야나기타 아끼꼬 씨가 16세기 다네가시마에서 만든 조총이 전국 각지로 퍼져나간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2023년 5월 24일. ⓒ 정진오


1552년 6월 3일 <명종실록>을 보면, 제주 목사가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가 실렸다. '왜적들이 험하고 견고한 벽을 점거해 방패를 둘러 세우고 철환(鐵丸)을 마구 쏘면서 굳게 지키고 나오지 않고 있다'는 내용이다. 야이타가 조총을 만든 지 10년이 채 안 되어 그 총으로 무장한 왜적(해적)들이 제주도를 침략한 거였다. 그때 조선 정부에서는 그 철환의 파괴력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 3년 뒤인 1555년 5월 21일 <명종실록>에는 조총을 갖춰 들고 조선에 귀화를 청하는 일본인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日本) 왜인(倭人) 평장친(平長親)이 가지고 온 총통(銃筒)이 지극히 정교하고 제조한 화약도 또한 맹렬합니다.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없으니, 바라건대 그의 원대로 당상의 직을 제수함이 어떻겠습니까.'

비변사가 임금에게 아뢰었다. 임금은 그렇게 하라고 답했다. 일본인이 아예 조총과 화약을 바치며 조선에 귀화했다는 얘기이다.

며칠 뒤에는 왜적의 침략에 시달리는 전라 좌도 방어사 남치근이 불가(佛家)의 종을 부수어 총통을 만들자는 건의를 했다. 그러자 임금 명종은 "비록 불가의 종이긴 하나 오래된 물건을 경솔하게 부술 수는 없다"면서 반대했다. 이를 기록한 사신은 "절의 종을 부수어 병기에 충당하려고 하면, 오래된 물건이라고 핑계한다"고 임금의 태도를 비판했다.

1559년 6월 6일 <명종실록>에는 전라도에 출현한 왜선과 싸우던 우리 군관과 뱃사공이 철환에 맞아 즉사한 일과 왜적의 철환이 참나무 방패도 꿰뚫는 파괴력을 지녔다는 내용이 실렸다.

조총을 든 해적의 첫 침략에서 조선군 장교와 백성들의 사망 사건까지 7년, 조총이 나라를 위협할 만한 요인이라고 깨닫고도 남을 시간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스스로 조총을 개량하여 더 낫게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한 정책 결정권자는 없었다.

그 뒤로 30년, 1589년 임금 선조는 바로 앞 명종 때의 일은 전혀 안중에도 없었던지, 일본 사신 평의지가 조총을 가져와 바쳤는데 이는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군기시에 보관토록 지시했다. 그리고 3년 뒤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도주, 대장장이, 화약 장인, 3명의 '협업'
 

철포관 맞은 편 언덕에 1543년 포르투갈 사람들에게서 조총을 처음으로 사들인 도주(島主)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왼쪽 옆구리에 칼을 차고 왼손에 새로 만든 조총을 들고 있다. 총을 처음 도입할 때 나이가 16세였다. 2023년 5월 24일. ⓒ 정진오

 

다네가시마 대장장이들의 500년 전통을 잇는 유일한 대장간인 '우메키 혼다네바사미 제작소(梅木本種子鋏製作所)'에서 만든 칼과 가위.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다시 일본의 다네가시마로 돌아가면, 다네가시마 서북쪽에 니시노오모테항(西之表港)이 있다. 시청이 자리 잡고 있어 다네가시마의 중심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항구 바로 옆 삼거리에 대장장이 야이타 동상이 있다. 1993년 '총포 전래 450년'을 기념해 다네가시마라이온스클럽에서 세웠다. 

앉은 채로 총신을 모루 위에 올려놓고 왼손으로 집게를 잡고 오른손에 망치를 든 대장장이와 일어서서 해머를 들고 모루 위 총신을 내려치는 메질꾼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우리나라 대장간의 서열 체계로 보자면, 아마도 앉아 있는 집게잡이 대장장이가 야이타일 테다.

야이타는 원래 칼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기후현(岐阜縣) 세키시(關市) 출신이다. 다네가시마 도주가 자신의 사무라이들을 좋은 칼로 무장시키기 위해 실력 좋은 대장장이 야이타를 이곳까지 영입했던 거였다.

다네가시마 조총이 일본 각지에 빠르게 공급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했던 데에는 야이타의 기술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제조한 화약 장인도 빼놓을 수 없다. 철포관의 해설사 야나기타 아끼꼬 씨는 그 화약 장인의 이름이 다네카마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화약 제조와 관련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총과 달리 화약 제조 비법을 문서로 남기지 않고 입으로만 전했기 때문이다.

야나기타 아끼꼬 씨는 다네가시마 철포가 생겨난 데에는 도주였던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와 만들어낸 대장장이 야이타, 그리고 화약 장인, 이렇게 3명의 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했다. 셋 중 하나만 빠져도 철포는 나올 수 없었다는 거다.

데뽀칸이라 불리는 철포관도 니시노오모테항 근처에 있다. 철포관 바로 앞 언덕에는 왼쪽 옆구리에 칼을 차고, 왼손에 조총을 든 다네가시마 도키타카의 동상이 니시노오모테 앞바다를 바라보며 우뚝 서 있다.

다네가시마 철포관에는 포르투갈 사람이 가져왔다는 바로 그 조총과 야이타 대장장이가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조총, 그리고 다네가시마에서 건너가 16세기 중후반 일본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사로잡은 조총의 실물도 보여주고 있다. 이들 세 자루의 조총은 특별 코너에 전시하고 있다. 빨강, 파랑, 녹색 보자기로 싼 단 위에 각각 올려져 있다. 다만, 개인 소장품이라면서 사진 촬영은 안 된다고 했다.

니시노오모테항 부근 '철포 대장간마을'
 

다네가시마 니시노오모테항 부근에는 철포 전래 시기부터 이곳에 철포대장간마을이 있었다는 알림판이 도로에 세워져 있다. 많을 때는 60여 곳이나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오사카 시내에는 16세기 후반부터 형성된 철포 대장간 마을임을 가리키는 '철포정(鐵砲町)'이란 지명을 아직도 쓰고 있다. 오사카 거리 신호등에 ‘철포정’이란 표지판이 걸려 있다. 2023년 5월 26일. ⓒ 정진오


니시노오모테항 부근에는 '철포 대장간마을'도 있었다. 다네가시마 조총이 한창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갈 때 조총을 만들던 대장간이 60여 곳이나 몰려 있었다고 한다. 그 터전임을 알리는 표지판과 표지석이 도로변에 서 있다.

니시노오모테 지역에 조총 대장간이 집단을 이룰 정도로 많았던 데에는 이 지역 토양의 특성이 반영되었다. 이곳 바닷모래에 철 성분이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이 모래를 사철(沙鐵)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니시노오모테 해안가를 철이 많다고 해서 '철빈(鐵浜) 해안'이라고도 했다. 여기서는 철광산을 깊숙하게 파 내려가지 않고서도 해안의 모래를 가져다 쇠를 뽑아낼 수 있었다. 조총을 제작하기 전부터도 이곳에는 칼을 만드는 대장간이 많았다.

철빈 해안의 모래에서 추출한 쇠로 만든 니시노오모테 조총은 일본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철포관 전시 코너 중 다네가시마 조총이 전국 각지로 확대된 상황판과 다네가시마 조총을 사들여 그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조총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쓰마, 사카이, 구니토모, 히노, 기슈 등 15곳이나 된다.

그 해당 지역에는 아직도 조총과 관련한 이야기가 지명으로 남아 있어 500년 세월을 전하고 있다. 다네가시마에서 퍼져나간 15곳 중 하나인 사카이(堺)가 속한 오사카(大阪)에 가면 조총을 생산한 대장간 마을이 있던 동네가 있다. 이곳은 여전히 '철포정(鐵砲町, Teppocho)'이라는 지명을 쓰고 있다.

다네가시마에서 조총을 만들던 대장장이들의 그 솜씨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까. 칼을 만들고 총을 만들던 그 대장장이의 내력을 잇는 대장장이가 딱 한 명 있다. 우메키 쇼지(梅木昌二, 56) 씨다. 그는 총을 다루지는 않고, 칼과 가위만 만든다. 대장간 이름은 자신의 성을 따서 '우메키 혼다네가하사미 제작소(梅木本種子鋏製作所)'.

다네가시마에 포르투갈 조총이 들어올 때 가위도 함께 왔다고 한다. 아마 조총을 생각보다 큰 금액에 팔다 보니 포르투갈 사람들이 가위며 몇 가지 유럽 물건들을 서비스로 내어줬을 것 같기는 하다.

이렇게 해서 포르투갈의 유럽식 가위가 일본에 상륙하게 되었다. 그동안 일본에서 쓰던 가위보다 더 날렵하고 가벼우면서도 잘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다네가시마의 대장간에서는 조총과 함께 가위도 만들게 되었다.

38대 대장장이인 우메키 쇼지
 

우메키 씨가 망치를 쥐고 모루 위에서 가위를 만드는 공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날 우메키 씨의 대장간은 쉬는 날이었는데, 멀리서 온 취재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우메키 씨가 스승에게서 물려받았다는 다네가시마 원조 가위라는 뜻의 '本種(본종)'이란 글자가 새겨진 도장. 우메키 씨는 자신이 만든 물건에 이 도장을 찍는다.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우메키 씨가 일하는 작업대. 가위를 만들 때 중간 과정의 일을 여기서 한다. 오른쪽에 그라인더도 보인다. 그라인더는 우리 대장간에서는 보통 바닥에 두고 쓰는데 여기서는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우메키 쇼지 씨의 스승에 스승, 그 스승에 스승을 따라 올라가면 500년 전 야이타와 같이 총을 만들던 대장장이가 나온다. 우메키 씨는 야이타의 동료 대장장이 이름이 마키세 요시후미라고 했다. 그때부터 쳐서 우메키 쇼지 씨가 38대 대장장이이다.

다네가시마 대장간의 전통을 잇는 가위를 '혼다네바사미'라고 한다. '혼(本)+다네가시마(種子島)+하사미(鋏)'를 줄여서 그렇게 부르는 거다. 한자로는 '本種子鋏(본종자협)'이라고 쓴다. 이걸 더 줄여서는 '本種(본종)'이라고 한다. 

우리로 치면 원조 다네가시마 가위라는 얘기다. 다네가시마에서도 이 혼다네바사미를 주물 방식이 아니고 대장간에서 직접 손으로 작업해 만드는 이는 우메키 씨뿐이다. 우메키 씨는 예전부터 내려오던 원조라는 표시인 '本種(본종)'이라 새긴 직인을 갖고 있다.

우메키 씨는 혈육으로 이어 내려온 대장장이는 아니다. 이곳 태생인 우메키 쇼지 씨는 젊어서 대도시인 가나가와현의 금속가공공장에 다녔다. 그러다 35세 때 도회지보다는 시골이 좋다고 생각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때 대장간 일을 떠올렸다.

무작정 스승을 찾아가 일을 배우겠다고 했다. 스승은 단칼에 잘랐다. 후계자가 필요 없다는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연로한 나이에 누구를 새로 가르친다는 게 힘들기도 했겠고, 특히나 혼자서도 먹고살기 바쁜 마당에 후계자 수업을 하게 되면 다만 얼마라도 주어야 할 터인데 그 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을 거였다.

돈은 안 받아도 된다면서 일만 배우게 해달라고 졸랐다. 한참 만에 "그럼 한 번 만들어 와 보라"고 했다. 기계를 다루던 터여서 나름대로 괜찮게 만들었는데 스승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몇 차례. 스승은 제자로 받아주었다. 우메키 씨는 다른 데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장간 일을 배워야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니시노오모테시에서는 우메키 쇼지 씨 지원에 나섰다. 아주 특별한 경우였다. 다네가시마 명물인 가위와 칼 제작 솜씨가 끊길 위기에 처했는데 우메키 씨가 스스로 잇겠다고 나섰으니 시에서도 지원할 명분이 생긴 거였다. 시에서는 몇 년 동안 생활비와 재료비 등을 지원했다.

일본에서 해마다 열리는 '전국철포축제'
 

우메키 씨 대장간 모습. 오른쪽으로 화덕이 보이고, 그 옆에 큰 통나무가 받치고 있는 사각형의 모루가 있고, 그 바로 옆에 물통이 있다. 오른편 나무 작업대 쪽을 제외하고 왼쪽만 보면, 모루를 가운데에 두고 화덕이나 물통이 가까이 있는 우리나라 대장간 구조와 흡사하다.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500년 전통의 대장간답게 손풀무가 눈에 띈다. 우메키 씨는 화로에 바람을 불어넣는 일에 전기 송풍기와 손으로 하는 손풀무를 둘 다 사용한다. 요즘에는 저 손풀무가 고장이 나서 전기 송풍기만을 쓴다고 했다. 곧 손풀무도 고칠 예정이다. 손풀무는 우리나라 대장간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는 '박물관 물품'이 된 지 오래다.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500년 전통을 잇고 있는 우메키 씨의 대장간 '梅木本種子鋏製作所(매목본종자협제작소)'에 있는 모루와 물통. 모루가 사각형인 게 특징이다. 우리의 전통 모루도 저렇게 사각 모양도 있고, 원통형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모루를 쓰는 곳이 거의 없다. 모루 바로 옆에 담금질하는 물통이 있고 그 너머에 양모루가 보인다. 양모루는 우리가 쓰는 것처럼 뾰족한 뿔이 없다. 물건을 올려놓은 걸 보니 저 양모루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듯하다.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배우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 스승이 만드는 걸 10년 넘게 지켜봐야 했다. 48세가 되어서야 가위나 칼을 스승의 방식대로 혼자서 만들 수가 있었다고 한다. 스승이 세상을 뜬 지가 7년이 되었는데 그 1년 전에야 "그만하면 이제 되었다"는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고 한다. 제자는 스승이 쓰던 대장간 도구들을 물려받아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예전에 혼다네바사미의 인기는 일본에서 최고였다. 몇 년 전 NHK 드라마에 혼다네바사미가 소재가 된 적이 있는데, 그때 혼다네바사미 소품을 우메키 쇼지 씨가 만들어 주었다.

다네가시마 총포 전래 480년이 되는 올해 2023년에는 해마다 열던 전국철포축제의 규모를 키워 역대 최대 규모로 치르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다네가시마 화승총(철포) 보존회의 부사무국장인 마츠다 마나부(松田学)씨는 "코로나도 끝나고 해서 올해는 전국 12개 화승총 보존 단체에서 모두 모이게 될 것"이라면서 "각 단체마다 고유의 총포를 가져와 대회를 치르게 되는데 올해가 최대 축제가 될 수 있도록 꾸밀 것"이라고 말했다.

다네가시마 지형을 보면, 폭은 좁고 남북으로 기다랗게 되어 있다. 니시노오모테항은 다네가시마의 서북쪽에 있다. 그 남동쪽에 다네가시마 우주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일본의 우주 로켓은 모두 이곳에서 발사한다.

다네가시마 우주센터는 1543년 포르투갈 사람들이 탄 배가 표류해 왔던 곳과 가깝다. 우주센터 내 우주과학기술관에는 전국에서 오는 관람객이 끊이지 않는다. 일본 첨단 기술력의 상징과도 같은 이곳에서 일본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몸소 확인하기 위해서다. 

500년 전에는 다네가시마 대장장이들이 만든 조총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는데, 지금 21세기에는 일본 최첨단 기술을 직접 구경하기 위해 전국의 인파가 다네가시마로 몰려든다.
 

우메키 씨 대장간의 화덕. 벽돌이 깨끗한 것으로 봐서 수리한 지 얼마 안 된 듯하다. 이날은 대장간이 쉬는 날이다 보니 화로에 불이 꺼져 있다. 화덕 오른쪽 위로는 매년 첫날 만든 가위를 걸어 두는 신주(神主) 같은 나무 틀이 있다. 저 신줏단지도 스승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한다.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우메키 씨 대장간의 집게걸이에 걸린 집게들. 가위와 칼을 전문으로 하는 우메키 씨 대장간은 다양한 걸 만드는 우리나라 대장간처럼 집게가 많은 편이 아니다. 집게걸이 오른쪽 아래로 손풀무가 보인다.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다네가시마공항의 기념품 코너에는 이곳 특산품인 가위와 칼을 판매하고 있다. 다만, 500년 전통을 잇고 있는 우메키 쇼지 씨의 제품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2023년 5월 25일. ⓒ 정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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