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9 18:11최종 업데이트 23.06.29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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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선거관리위원회 앞(국립어린이과학관 뒤편)에 세워진 장영실 동상. 2003년 과학기술부와 한국과학문화재단이 세운 동상 취지문에는 '자격루를 개발한 조선시대 대표적 과학기술 선현'으로 장영실을 소개하고 있다. 전국의 여러 장영실 동상에는 이곳처럼 장영실 옆에 측우기도 함께 만들어 놓고 있다. 마치 측우기가 장영실의 대표 발명품처럼 보인다. 측우기 역시 장영실이 제작했을 가능성이 크기는 하지만 구체적 기록은 드러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장영실 동상에 측우기를 함께 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2023년 6월 14일. ⓒ 정진오

 
우리 역사에서 노비 출신 대장장이로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른 이는 장영실이다. 장영실은 역대 최고의 성군으로 꼽히는 세종대왕과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한 임금의 파트너였다. 세종이 있어 장영실이 있었고, 장영실이 있었기에 세종이 세종일 수 있었다.

장영실은 동래현의 관노 출신이다. 아버지는 귀화한 중국인이었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어릴 때부터 각종 도구 만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망가진 병장기며 농기구를 멀쩡하게 고쳐냈다. 대장장이 기질을 타고난 거였다. 그런 장영실의 재주가 서울에까지 알려져 태종 때에 궁중에서 기술자로 일하게 되었고 세종 시기에는 왕의 특명으로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1433년 9월 16일 자 <세종실록>에 세종이 물시계를 만들어낸 장영실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행사직(行司直) 장영실(蔣英實)은 그 아비가 본래 원나라의 소주·항주 사람이고, 어미는 기생이었는데, 공교(工巧)한 솜씨가 보통 사람에 뛰어나므로 태종께서 보호하시었고, 나도 역시 이를 아낀다. 

임인·계묘년 무렵에 상의원(尙衣院) 별좌(別坐)를 시키고자 하여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에게 의논하였더니, 허조는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고 하고, 말생은 '이런 무리는 상의원에 더욱 적합하다'고 하여, 두 의논이 일치되지 아니하므로 내가 굳이 하지 못하였다가 그 뒤에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한즉 유정현 등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고 하기에 내가 그대로 따라서 별좌에 임명하였다.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에 뛰어나서 매양 강무할 때에는 내 곁에 가까이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이것을 공이라고 하겠는가. 이제 자격궁루(自擊宮漏, 물시계)를 만들었는데 비록 나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였지마는,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더라면 암만해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들으니 원나라 순제(順帝) 때에 저절로 치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나, 그러나 만듦새의 정교함이 아마도 영실의 정밀함에는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을 능히 만들었으니 그 공이 작지 아니하므로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해주고자 한다."

이 인용문에서는 많은 걸 읽어낼 수 있다. 물시계인 자격루 발명의 일등공신이 장영실임을 임금 세종이 직접 나서서 밝히고 있다. 세종은 그 대가로 특별 승진의 영예를 주었다. 자격루가 중국에 있던 물시계보다도 훨씬 뛰어나다는 점도 새삼 강조했다.

세종 "자격루 발명의 일등공신은 장영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 자격루의 각 부품들. 자격루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공간이다. 관람객들이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다. 장영실의 대표적인 발명품 중 하나이다. 2023년 6월 14일. ⓒ 정진오


세종은 장영실을 일반 기술자로 대우한 게 아니라 아주 은밀한 얘기까지도 전달하는 내시처럼 가까이 두기도 했다. 그러면서 둘은 서로의 관심사를 깊이 이해하는 사이가 되었을 테다.

조선시대 관료 사회의 벽은 높았다. 장영실의 어머니가 기생이었다는 이유로 벼슬길에 오르기가 만만치 않았다. 임금도 어쩌지 못할 만큼 반대가 거셌던 거다. 일찍부터 장영실의 재주를 알아보고 벼슬을 주고 싶었던 세종조차도 임용 반대파의 의견에 막혀 본인의 생각을 관철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장영실이 살았던 때, 노비의 신분 판정은 '종모법(從母法)'과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원칙에 따라 이루어졌다. 종모법은 남자 종과 여자 종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소유권은 모친인 여자 종을 소유한 사람이 갖는다는 규범이다. 일천즉천은 아비나 어미 어느 한쪽이라도 천민, 즉 노비이면 그 사이에서 난 아이는 노비가 된다는 거다.

이 둘을 장영실에게 맞추어 보면, 모친이 동래현에 속한 기생이었으니 장영실은 나면서부터 자동으로 천민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소유권 또한 동래현에 귀속되었다.

세종이 동래현의 관노 출신인 대장장이 장영실을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지는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연려실기술>에 잘 드러나 있다.

"여러 기술자도 임금의 뜻을 헤아리는 자 없었고, 다만 호군 장영실이 임금의 지혜를 받들어서 기교한 방법을 운용하여 부합하지 않는 것이 없었으므로 세종이 그를 심히 중히 여겼다."

그러면서 이긍익은 장영실을 일러 '임금의 훌륭한 제작을 위하여 시대에 응해서 난 인재라 했다'는 세간의 평가까지 덧붙였다.

장영실은 태종 때부터 왕실에서 일했는데 세종이 등극하면서 그의 자질이 제대로 빛날 수 있었다. 장영실은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인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 그리고 이 둘을 합친 다목적 시계인 옥루(玉漏)도 개발했다.

세종이 "만대에 이어 전할 기물"이라고 치켜세운 자격루는 과학적 방법으로 정확하게 측정한 시간을 백성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경복궁 자격루에서 잰 시간에 따라 종, 북, 징을 치면 광화문과 의금부, 그리고 도성 안 곳곳에 설치된 전루소(傳漏所)를 통해 신호를 전달했다. 

이를 받아 보신각 종루에서 종을 쳐 시간을 알렸다. 밤 10시에는 28번의 종을 쳐서 성문을 닫았다. 통행 금지 알림이었다. 이를 인정(人定)이라 했다. 새벽 4시가 되면 33번의 종을 쳤다. 통행 금지 해제였다. 이를 '파루(罷漏)'라 했다.

장영실, 임금 가마 사고로 탄핵·파면돼
 

국립민속박물관의 수표. 수표(水標)는 세종 때 측우기와 함께 창안되었다. 하천의 물 높이를 재는 양수표(量水標)이다. 요즘 세계 각국의 수위 측정방식도 이런 식이다. 1441년 장영실이 제작을 감독한 세종 때의 수표는 네모난 형태의 나무 기둥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석재로 바뀌었다. 수표의 몸체에는 1척부터 10척까지의 눈금이 표시되어 있다. 3척 이하는 가뭄, 9척 이상은 홍수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이다. 사진 속의 수표는 영조 때 제작한 것의 복제품이다. 진품은 세종대왕기념관에 보관 중이다. 2023년 6월 14일. ⓒ 정진오


장영실은 금속활자인 갑인자를 만드는 데 참여하기도 했으며 국가적 중대 문제인 하천 수위를 재는 수표(水標)를 만들기도 했다. 이 수표는 청계천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설치했다.

장영실은 그러나 1442년 3월 그가 책임을 맡아 제작한 임금의 가마가 부서지는 사고가 나는 바람에 탄핵·파면되었다. 그 뒤로 장영실은 역사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누구는 조선을 양반의 사회였다고 말하지만, 그 실상을 따지자면 조선은 노비의 사회였다. 양반이 없더라도 그 나머지 사람들은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었겠지만, 노비가 없었다면 양반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노비는 그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사회를 떠받치는 기둥 같은 존재였다.

조선시대 가장 높은 인구 분포를 차지했던 노비는 그 역사도 참 오래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법으로 일컬어지는 '8조 법금(八條法禁)'에도 노비 이야기가 있다. 그 조항 중 하나인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는다'는 데에 비춰보면, 노비제도는 고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조선 때부터 있던 노비제도가 조선에 와서 절정을 맞았으며, 우여곡절 끝에 조선 말기에는 노비제가 사라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노비들이 모두 대장장이였던 건 아니지만, 대장장이 중에는 노비인 경우가 많았다.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장군이 조총을 개발할 때 참여했던 대장장이 4명 중에서 3명이 노비였다. 그중 절 노비가 2명이었고, 사노비가 1명이었다. 기술 직종이었던 대장장이는 노비 중에서 맡기도 했고, 일반 양민(良民) 중에도 있었다.

노비와 양반과의 관계, 그리고 대장장이들이 양반가에 어떠한 일을 해주었는지는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의 9년 3개월 간의 일기 <쇄미록>에 자세하다.

이민수 번역본 <쇄미록>에는 대장장이가 풀무쟁이로도, 수철장(水鐵匠)으로도 나온다. 그 이름도 조원희 또는 조언희인데 아마 둘이 같은 인물일 테다. 이 대장장이는 관청의 명령을 받아가며 일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희문의 집에 농기구와 솥을 가져다주었는데 이게 관청의 명이라고 했다.

오희문의 9년 3개월 간의 일기 <쇄미록>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 혼천의(渾天儀).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측정하는 일종의 천문시계라 할 수 있다. 장영실이 제작에 참여했다. 사진 속 혼천의는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거다. 2023년 6월 14일. ⓒ 정진오

 

비가 내린 양을 재는 측우기와 그 받침인 측우대. 1441년 처음 만들어 전국에 설치하고 강수량을 측정했다. 이때 장영실도 깊이 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이 측우대는 1782년(정조 6)에 제작해 창덕궁에 설치했던 거다. 측우대 위의 측우기는 공주 충청감영의 것을 복제한 거다. 2023년 6월 14일. ⓒ 정진오


예를 들어, 1597년 7월 11일 일기에는 '풀무쟁이 조원희가 관청 명령으로 농기를 만들어 가져오고, 또 목미 3두를 가져왔기에 소주를 대접하고, 또 고등어 1마리를 주었다'고 썼다. 오희문은 농기구를 가져온 대장장이에게 먹을 걸 주면서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관청의 명을 받아서 농기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그게 고마워 집에 있는 술을 대접하고 생선을 주어 보답한 거였다.

어떤 때는 대장장이가 농기구 쓸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그를 원망하는 대목도 있다. 물론 3년 전 고등어를 주어 보냈던 그와 같은 대장장이인지는 알 수가 없다. 1600년 5월 11일 일기에는 '수철장이 농기를 이제 비로소 만들어 보냈다. 그야말로 이른바 잔치 끝난 뒤에 장구 치는 격이다. 밭 가는 것이 이제 끝났으니 비록 농기를 얻었으나 쓸 곳이 없다. 필경 내년 봄을 기다려 써야겠다'고 했다.

이때 대장장이가 만들어 보낸 농기는 밭을 가는 데 쓰는 쟁기나 쟁기의 부속품인 보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1년에 한 번, 밭을 갈 때 쓰는 농기구는 쟁기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희문은 대장장이가 농기를 만들어 보내기 1주일 전에 남의 집에서 소 2마리를 빌려다가 밭을 갈았다고 했다. 소를 빌리면서 겨리 쟁기도 같이 빌렸을 테다. 소 2마리가 끄는 쟁기를 겨리라 하고 1마리가 끄는 쟁기는 호리라고 한다.

오희문은 한때 중앙부처 중 토목사업과 건축·보수 등의 일을 담당하던 선공감(繕工監)의 감역(監役)을 지내기도 했는데, 그 선공감에는 대장장이도 많았다. 조선의 최고 통치 규범인 <경국대전>에 나와 있는 선공감 소속 장인들의 종류와 그 숫자를 보면 대장장이 직종은 상대적으로 많은 인력을 배정받았다. 토목과 건축 분야에 그만큼 대장장이 일이 많았다는 얘기다.

선공감 소속 장인의 종류는 총 21가지였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인력을 보유한 직종이 나무를 다루는 목장(木匠)으로 60명이었다. 그다음이 돌을 다루는 석장(石匠)과 대장장이인 야장(冶匠)이었는데 각각 40명씩이 배치되어 있었다. 가장 적은 것은 아교장(阿膠匠)으로 2명이었다. 이러한 선공감에서 일했던 오희문은 누구보다 대장장이 일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오희문은 자신을 위해 오래 일한 노비가 죽었을 때 관(棺)을 마련해 매장하고 제사를 지내는 예를 보이기도 했다. 1595년 12월 일기에는 죽은 노비를 위해 관을 사고, 매장하고 제를 지냈다는 이야기가 실렸다.

그 일기에는 당시 관과 관에 박을 못의 거래 가격까지도 적혀 있다. 관을 사기 위해 정목(正木, 품질 좋은 베) 반 필과 쌀 3두를 냈다. '벼 2두를 가지고 풀무장이에게 가서 관에 쓸 못을 사 오게 했다'는 구절도 있다. 

물론 쌀과 벼의 차이가 크지만, 당시 식량이 귀하던 전쟁 중에 벼 2두이면 그리 적지 않은 양이다. 1두(斗)는 1말이다. 액체로 치면 1말이 18리터 정도 된다. 관을 덮는 데 들어가는 못의 양이 많았던 모양인데, 그걸 사느라 벼 2말을 들였다. 당시 동네에 있던 대장간에서는 못을 만들어 팔기도 했던 듯하다.

대장장이 노비 기록된 윤이후의 <지암일기>
 

임금의 업무 공간인 경복궁 사정전(思政殿) 앞에 놓인 앙부일구. 국립고궁박물관의 것을 복제했다. 2023년 6월 14일. ⓒ 정진오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인 다양한 형태의 앙부일구(仰釜日晷, 해시계). 해그림자로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장치이다. 장영실이 제작에 참여했다. 1434년(세종 16)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조선 후기까지 널리 활용되었다. 2023년 6월 14일. ⓒ 정진오


오희문보다 100년 정도 뒤인 윤이후(1636~1699)의 <지암일기>를 보면, 남의 집에서 일하는 대장장이 노비를 데려다 일을 시키는 장면이 종종 눈에 띈다.

'전부(典簿) 댁의 야노(冶奴) 말질금(末叱金)이 와서 새집의 철물을 만들기 시작했다'(1692년 7월 23일), '야장(冶匠) 말질금이 사당 창호에 철물 다는 일을 시작했다'(1694년 11월 18일)는 등의 얘기가 일기에 등장한다. 이 두 사례에 나오는 대장장이 말질금은 같은 인물로 보이는데 어떤 때는 그 이름 앞에 '야노'라 썼고, 어떤 날에는 '야장'이라고 적었다.

윤이후는 집에서 부리는 노비가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대장간 일을 할 줄 아는 노비가 없어서 다른 집에서 데려와서 철물 다는 일을 시켰던 모양이다.

대장장이 노비 말질금(末叱金). 듣기에 그 이름이 참 묘하다. 우리가 아는 성 씨 중에 말(末) 씨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노비들은 성은 없고 이름만 있었다는 건가. 노비들은 이름에 성을 붙이는 일이 흔하지는 않았으며 한자 이름이 아니라 한글 이름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그 한글식 이름을 노비를 소유한 양반들이 한자로 옮기면서 엉뚱한 이름으로 변화하고는 했다.

말질금의 원래 이름은 '끝쇠'였다고 봐야 한다. 마당쇠나 돌쇠처럼 말이다. 끝을 의미하는 한자어 말(末)에다가 사이시옷(ㅅ)의 대용으로 질(叱) 자를 넣고, 쇠를 뜻하는 금(金)으로 바꿔서 쓴 거다. 이렇게 하면 끝쇠는 말질금이 된다. 

비슷한 예로 '붓덕'이 있다. 노비 이름을 붓덕이라고 지었는데 그 이름을 한자로 쓸 때는 부질덕(夫叱德)이라 표현했다. 붓덕이란 노비 이름을 부질덕으로 변환시킨 예는 <미야지마 히로시의 양반>이란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노비 이름과 관련하여 더 많은 정보를 주는 또 다른 책이 있다. 권내현 교수의 <노비에서 양반으로, 그 머나먼 여정>이란 책에 보면, 조선시대 호적에 쓰인 노비들의 이름과 그 이름이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가 설명되어 있다. 갓동이는 加(가)+叱(ㅅ)+同(동)+伊(이)로 쓰고, 갯동이(개똥이)는 介(개)+叱(ㅅ)+同(동)+伊(이)로 하는 방식이다. 돌쇠는 乭金(돌금)으로, 마당쇠는 麻堂金(마당금)으로 썼다.

노비 이름에 쇠가 많이 들어간 것은 그 노비들이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여서가 아니라 쇠처럼 튼튼하게 일을 많이 하라는 그런 의미였을 게다. 노비들은 이름에서부터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했다. 그냥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짓는 경우가 많았다.

강아지, 도야지, 두꺼비... 호적에 적힌 노비 이름
 

낮에는 해시계로, 밤에는 별시계로 쓰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의 일부.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1437년 세종의 명으로 장영실이 제작했다. 2021년 서울 인사동에서 출토되었다. 2023년 6월 14일. ⓒ 정진오

 
동물 이름에 빗댄 노비 이름도 많다. 강아지(江牙之), 도야지(道也之), 송아지(松牙之), 두꺼비(斗去非) 등이 호적에 적힌 노비 이름이라고 권내현 교수는 소개한다. 좀 더 심한 경우로는, 놈이란 말을 부각하기 위해 작은노미(自斤老未)라고 짓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개노미(介老未)로 부르기도 했다. 개조지(介助之)라는 이름도 있었다고 한다.

여성 역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작은년(自斤連)이나 어린년(於仁連)처럼 'OO년'으로 지은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반면에 곱다는 뜻으로 쓴 고읍단(古邑丹)이라는 이름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조총을 만든 일을 임금에게 보고하면서 주인공으로 언급했던 대장장이 노비 3명의 이름은 안성(安成), 동지(同之), 언복(彦福)이었다. 이들의 신분은 노비였지만 그 이름은 개조지나 두꺼비보다 훨씬 인간적이었다. 이들 중 동지는 김해 절 노비였고, 언복은 거제 절 노비였다.

절에서 무슨 대장장이가 필요할까 싶은데 절간에도 쇠를 다루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앞에서 예로 든 오희문의 선공감(繕工監) 감역 이야기에서처럼 옛날 토목사업과 건축에는 대장장이가 필수 직군이었다. 나무로 집을 지을 때도 각종 못이나 철물이 많이 필요하다.

절에는 대장장이나 만들 수 있는 각종 법구(法具)도 있다. 고려시대 유물로 많이 남아 있는 금강저(金剛杵)나 금강령(金剛鈴) 같은 법구도 아마 절에 속한 대장장이들이 만들었을 터이다.

절과 장인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있다. 신라 선덕여왕이 황룡사 9층탑을 세울 때 백제에서 장인을 데려왔다. 아비지(阿非知)였다. 그는 탑의 기본이 되는 목재와 돌을 다듬었다. 

그리고 태종 무열왕의 부친인 용춘(龍春)이 장인 200명을 거느리고 일을 주관했다고 한다. 이들 200명 장인 중에는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도 무척 많았을 게다. 그들의 신분이 노비 같은 천민이었는지, 평민이었는지는 <삼국유사>에는 드러나 있지 않다.

황룡사 9층탑의 설계자로 전해지는 백제의 건축가 아비지(阿非知)의 이름이 흥미롭다. 아비(阿非)가 이름이고 지(知)는 이름 뒤에 붙이는 미칭이라고 한다. 아비란 이름의 뜻을 유추해보자면, 한자어 부(父)를 '아비 부'라고 하는데 이 아비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종모법(從母法)'과 '일천즉천(一賤則賤)' 피해자
 

경복궁 흠경각(欽敬閣). 세종은 자신의 침소인 강녕전(康寧殿) 바로 옆에 흠경각을 세웠다. 이 흠경각에 서운관(書雲觀)을 두었다. 장영실은 여기서 물시계, 간의, 혼천의, 앙부일구 등을 제작했다. 흠경각도 1438년 세종의 명으로 장영실이 지었다. 세종은 침전에서 몇 걸음 안 떨어진 흠경각에 수시로 들러 장영실 등과 토론하면서 백성을 이롭게 할 각종 과학 장비의 제작과정을 살폈을 터이다. 2023년 6월 14일 오후, 관람객들이 흠경각을 둘러본 뒤 옆으로 돌아나가고 있다. ⓒ 정진오


노비는 주인의 수족처럼 움직였기 때문에 그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양반집 주인이 대형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 그 집의 노비들도 덩달아 고초를 당하고는 했다. 조선의 선조 임금 시기부터 고종 때까지 약 300년 간의 주요 반역사건 심문·재판 기록인 <추안급국안>에 보면, 사건마다 노비들이 끼이지 않은 경우가 많지 않다. <추안급국안>에는 그만큼 노비들의 이름도 많이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1601년 길운절 반역사건에 등장하는 구생(具生)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있다. 구생은 아버지의 성을 따라서 지은 이름이다. 구생의 부친은 구사직(具思稷)이었다. 군관이었던 구사직은 관기(官妓)와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이 구생이었다. 이렇게 부친의 성을 따라 노비의 이름을 짓는 일은 흔치 않았다.

기생 구생 역시 앞에서 얘기한 노비 신분 판정의 원칙이었던 '종모법(從母法)'과 '일천즉천(一賤則賤)'의 피해자였다. 아비의 성을 따랐다고는 하지만 어미가 기생이었으니, 낳자마자 천민 신분으로 떨어졌다. 구생은 또 어미를 소유한 관청 소속 관기(官妓)로 살아야 했다. 

노비제 폐지가 임박한 조선 말기가 되면 그 이름만 놓고 보면 양반인지 노비인지 알 수 없을 만큼 양반식의 한자 이름을 쓰는 노비도 있었다. 1884년의 한 사건에 개화파이면서 친일파였던 박영효(朴泳孝)의 노비도 끼어 있었는데, 그 이름이 최영식(崔英植)이었다. 

최영식은 박영효의 종이었다. 그는 박영효가 무척 신임했던 심복이었던 듯하다. 사건을 맡은 추국청에서는 최영식의 주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작은 금릉위(錦陵尉)'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최영식은 금릉위였던 박영효를 대리한다는 말이 나올 만큼 그의 충직한 노비였다는 얘기다.

말질금, 도야지, 두꺼비, 최영식 등 노비들의 이름 짓기는 정해진 방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노비제 폐지 직전 양반식 이름을 가진 최영식의 경우 누가 어떤 연유로 그 이름을 지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수백 년을 잇는 그 노비들의 이름 짓기에서 흐릿하게나마 시대 흐름을 엿볼 수가 있다.

다시 장영실 얘기로 돌아가면, 세종 임금은 본인이 탈 가마가 부서지면서 터져 나온 장영실 탄핵 사건에서 '장영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탄핵파의 손을 들어줬다. 노비 출신의 대장장이가 임금과 가까이 지내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온 양반 가문 관료들의 조직적 움직임이 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아끼던 장영실이었건만 세종도 그의 편을 들지 못했다. 그때 장영실이 복귀했더라면, 그래서 대장장이 노비도 쉽사리 탄핵당하지 않고 임금과 마주 앉아 정사를 논하는 관료로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더라면, 조선의 과학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을 계속해서 유지했을 터이다. 그러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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