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9 10:51최종 업데이트 23.03.09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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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복구 현장에 설치한 대장간에서 구경 나온 어린이들과 함께 기념 촬영한 이규산 장인의 모습. ⓒ 이규산 제공

 
영흥도. 길이가 11.2km나 되는 시화방조제를 달리고, 대부도를 지나서, 선재대교와 영흥대교를 건너야 닿는 곳. 여기에 대장간 하나 남아 있으니, <영흥민속대장간>이다.

인천 옹진군에는 모두 114개의 섬이 모여 있다. 이 가운데 사람 사는 유인도는 2023년 2월 기준 23곳. <영흥민속대장간>은 옹진군 유일의 대장간이다. 대표는 이규산 장인. 1945년생, 일흔여덟이다.


간판에 민속이란 말을 넣은 것처럼, <영흥민속대장간>은 쇠를 굽고 불리는 오래된 방식과 기억을 참으로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이규산 대장의 이력부터가 간단치가 않다. 우선, 명함에 적은 대로 '국보 1호 숭례문 복구 현장'을 지킨 대장장이다.

2008년 2월 10일 저녁, 온 국민은 국보 1호 숭례문이 불에 타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텔레비전 화면으로 지켜봐야 했다. 다들 엄청난 충격과 허탈감에 빠졌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그 숭례문을 다시 세우는 과정에서 대장장이가 왜 필요한가를 알게 되었다.

이규산 장인은 문화재청의 요청을 받고 숭례문 복구 과정에 참여했다. 좀 늦게 뛰어들었지만 맨 나중까지 있었다. 문화재청은 복구 현장에 <숭례문 대장간>을 마련했다. 전통 방식으로 복구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규산 장인은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마다 2년 여 동안 숭례문 대장간에 출근했다. 그는 이때 업무일지 같은 걸 썼는데 관람객들의 응원 메시지도 여기에 담았다.
 

이규산 장인이 화로 앞에서 대장간 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2023년 2월 23일. ⓒ 정진오


<숭례문 대장간>은 경기도 용인의 한국민속촌 대장간처럼 관람객을 위한 시설이었다. 숭례문 복구에 쓰인 철물 전부를 이곳에서 제작했다기보다는 어떤 식으로 전통 철물이 만들어지는가를 일반 시민들이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한 거였다.

못과 띠쇠, 사슬, 철엽(鐵葉) 등 옛 철물 제작에 이규산 장인과 신인영 장인, 한근수 장인 등 대장장이 3명이 참여했다. 복구 과정에서 기존 철재를 담금질하여 재사용한 것 외에 새로 만든 철물이 수천 점이었다.

이규산 장인은 주로 옛날 못을 만들었다. 못의 형태나 크기도 다양했다. 못 머리가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었는데 못 머리를 만들기 위한 특별한 장치를 별도로 고안해 활용하기도 했다. 평일 작업은 영흥도 대장간에서 했다. 숭례문 복구 작업을 마무리한 지 15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그 일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명함 뒷면에 복구 직후 촬영한 숭례문 사진을 넣었을 정도로 자부심이 크다.

섬과 항구가 많은 인천, 배 목수들이 많았다

인천 도심에서 대장장이 기술을 배운 이규산 장인은 젊어서 배 목수들이 쓰는 연장을 많이 만들었다. 요새야 목재로 배를 건조하는 경우가 흔치 않지만 예전에는 대개가 목선이었다. 나무를 재료로 하여 배를 짓는 것이나 집을 짓는 것이나 여러 면에서 유사하다. 특히 못과 같은 철물이 그렇다.

배 만드는 조선장(造船場)에도 대장간이 있었다. 여기서는 주로 배못(船釘)을 만들었다. 이규산 장인이 숭례문 복구 과정에서 한 바로 그 일이다. 전통 선박 연구자 이원식이 펴낸 『한국의 배』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통 목선, 즉 한선(韓船)에 쓰이는 배못은 네모가 져 있고 어디에 쓰느냐에 따라 그 길이가 다 다르다. 못대가리는 4회 구부려서 마름모가 지게 하는 데 이는 한옥 대문의 둔테에 박는 못의 대가리와 똑같다고 한다.

한선 짓는 연장을 많이 만들어 본 이규산 장인이 한선에 쓰는 것과 비슷한 못이 많이 들어가는 한옥 구조물의 상징과도 같은 숭례문 복구를 담당한 것이 우연만은 아닌 듯싶다.

배 만드는 연장은 먹통(墨桶), 곡자(曲尺), 대패(鉋), 망치, 장도리, 피새(皮槊, 나무 못), 끌, 톱, 자귀, 송곳, 알기(틈새를 넓히는 데 쓰는 도구), 도끼 등이 있다. 이 중 망치, 도끼, 자귀, 끌 등은 대장간에서 만들어야 하는 연장이다. 
 

이규산 장인은 오래전에 만들었던 배 목수들이 쓰는 망치 몸체를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그 망치 만드는 방법을 시연하고 있다. 2023년 2월 23일. ⓒ 정진오


이규산 장인은 대장장이들 사이에서 일본말로 '구지사시'라고 부르던 게 있다고 했다. 못 박을 자리에 못보다 작은 크기로 미리 뚫는 연장이라고 했다. 일종의 송곳이 아닌가 싶다. 이는 못을 일컫는 구기(釘, くぎ)와 찌르다는 의미의 사시(刺し)가 합쳐진 말일 게다. 앞에서 예로 든 배 만들 때 쓰는 도구 중에 나무못을 '피새'라고 하는데, 이 나무못 박을 자리를 미리 파 두는 연장이 구기사시라고 보면 된다. 

일본말 '구기'를 이규산 장인처럼 대장간 현장에서 '구지'로 부른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고, 우리말로 '구지 못', '구지 끌'이라고 지칭하던 게 있어서일 수도 있다.

섬과 항구가 많은 인천에는 예부터 배 목수들이 많았다. FRP(섬유 강화 플라스틱) 선박이 등장한 게 1990년대 초반이니 그때까지도 인천에는 배를 짓고 수리하는 목수들의 일감이 있었다. 그 목수들의 연장을 만드는 대장장이들도 덩달아 바쁘게 마련이었다.

'이동식 대장간'을 차렸던 이규산 장인

이규산 장인은 경기도 안산 대부도 태생이다. 열일곱 무렵에 처음 대장간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대장간이 즐비하던 인천 중구 도원동에서였다. 그의 남다른 손재주에 얼마 지나지 않아 스카우트 제의가 여러 곳에서 왔고, 인천 중구 답동로터리에 있던 대장간을 거쳐 인천 동구 만석동 <홍성철공소>까지 가게 되었다. 

홍성철공소 주인 겸 대장이 고정섭이라는 분이었는데 배 목수 연장을 참 잘 만들었다고 이규산 장인은 얘기했다. 이규산 장인은 그를 '우리 스승'이라고 지칭했다. 지금 <영흥민속대장간>에서 쓰는 모루가 그 스승이 쓰던 거다. 아마 100년도 더 되었을 거란다.

대도시에서 실력을 인정받던 대장장이가 어찌하여 영흥도까지 찾아들었을까. <홍성철공소>에 다니다가 징집 영장을 받고 입대했다. 제대 후 인천 부평에 있던 <한국베어링>이라는 회사에 들어갔다. 거기서 그만 왼쪽 손가락 두 개를 잃고 말았다. 왼손이라고는 하지만 검지와 중지가 없으니 가진 거라고는 손재주뿐인 그가 어디 가서 직장 구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회사에서는 관리직 업무를 제안했는데 그가 거절했다. 상처가 아물자 그는 고향 대부도로 향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대장간을 차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부자연스러운 왼손이었지만 대장간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도록 단련하는 차원에서 고향 땅 대부도에 이동식 대장간을 냈다. 20대 후반일 때다.
 

이규산 장인이 20여 년 전 인천 연수구 동막해변에서 구해 온 동죽 호미를 들어 보이며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2023년 2월 14일. ⓒ 정진오

  
숭례문 복구를 기념하기 위해 문화재청이 펴낸 소책자 <숭례문 대장간> 중 '대장간의 의미 및 역할' 부분을 살펴보면, '대장간이 없는 마을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연장을 벼리는 떠돌이 대장장이도 있었다'는 구절이 있다. 이규산 장인이 20대 후반에 했던 바로 그 이동식 대장간을 말한다. 문화재청의 설명 속에 나오는 떠돌이 대장장이를 눈앞에서 만나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규산 장인이 이동식 대장간을 차리기 전까지만 해도 농촌 마을이 많은 대부도에는 대장장이가 몇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 마을 대장장이들이 연로하거나 돌아가셔서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대장간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때 젊은 대장장이가 나타난 거다. 이규산 장인은 메질꾼 2명을 데리고서 이동식 대장간을 시작했다.

화로는 드럼통으로 만들었고, 모루는 갖고 다니기 편하게 보통 대장간에서 쓰던 것보다는 좀 작은 걸로 장만했다. 한 마을에서 잠시 머물다가 다른 마을로 옮기고는 했다. 말 그대로 떠돌이였다. 주로 하던 일거리는 여물을 써는 작두나 나무를 깎는 자귀, 밭일에 쓰는 호미, 풀 베는 낫 같은 것을 벼리거나 새로 만드는 거였다.

지금도 탄과 나무를 섞어 때는 <영흥민속대장간>

당시만 해도 시골 대장간에서는 나무를 때서 쇠를 구웠다. 그러면 그 땔나무나 숯은 요새 대장간에서 탄(炭)을 준비하듯 대장장이들이 마련해야 했을까. 그렇지가 않다. 대장간에 호미나 낫을 맡기러 가는 손님이 화로에 넣을 나무까지 챙겨가야 했다. 남의 동네에 있는 나무를 함부로 벨 수도 없었거니와 나무가 너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소비자가 땔감까지 책임지는 구조였던 거다. 

그렇게 해서라도 무뎌진 연장을 새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농촌에서는 그만큼 대장장이가 꼭 필요한 존재였다. 장작을 실은 지게를 지고 대장간을 찾는 손님의 모습이라. 지금 생각하면 아주 까마득한 옛날이야기만 같다.

이규산 장인이 도시에서 대장 일을 배워서였을 테지만, 대부도 대장간에 탄을 처음으로 들인 것도 그다. 경상북도 문경에서 나던 은성탄이었다. 이동식 대장간이었지만 나무에 탄을 섞으니 불 온도를 쉽게 올릴 수 있었다. 당연히 작업 능률도 높아졌다.
 

영흥민속대장간 내부 모습. 앞에 보이는 모루가 이규산 장인의 스승 때부터 쓰던 아주 오래된 도구이다. 2023년 2월 14일. ⓒ 정진오

 

요즘 대장간에서는 통나무를 때서 쇠를 굽는 경우를 흔히 볼 수가 없다. 이규산 장인의 대장간 화로에서 탄 위에 놓인 통나무가 화력 높은 불꽃을 내뿜고 있다. 2023년 2월 23일. ⓒ 정진오


<영흥민속대장간>에서는 지금도 탄과 나무를 섞어 땐다. 나무를 구하기 어려운 도회지 대장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방식이다. <영흥민속대장간> 화로에서 통나무가 이글거리는 불꽃을 토해내는 광경은 두 번째 찾아갔을 때 볼 수 있었다.

이규산 장인은 이동식 대장간을 1~2년 하고 나니, 다친 왼손으로도 대장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은 자신감이 붙었다. 인천 동구 송림동에 <삼성철공소>를 차렸다. 배 짓는 목수들 연장은 물론이고 목재 공장에서 쓰는 도구 등 다양한 물건을 만들었다. 차츰 대장간의 규모가 커졌다.

상수도가 넓게 깔리지 않았던 시절, 도시 외곽의 주민들은 지하수를 뚫어 식수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지하수 뚫는 장비의 핵심인 일명 '브레이커 노미'도 만들었다. 이는 바위도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강도 높은 쇠로 만들어야 한다. 둥그런 쇠 가운데에 높은 압력으로 물을 쏘아대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는데 끄트머리는 뾰족한 삼발이 형태로 해야 한다. 그게 빠른 속도로 돌면서 단단한 땅이나 돌을 파고 들어가는 거다.

지하수 뚫는 장비를 만들었던 이규산 장인은 본격적으로 상수도 업무와 연관 있는 일을 맡게 된다. 상수도 대형 관과 관을 잇는 이음새 부분을 둘러싸서 묶어주는 밴드를 제작하게 된 거였다. 그 밴드가 당시에는 철재로 되어 있었다.

돈을 좀 벌어볼까 하고 손을 댄 그 일이 그만 이규산 장인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하청 일을 맡아서 했는데 부도가 난 거였다. 직원들 인건비를 비롯한 빚을 잔뜩 짊어졌다. 집을 팔아서야 해결할 수 있었다. IMF 구제금융 시기를 정말이지 힘겹게 넘었다.

'국보 1호' 숭례문 복구와 떠돌이 대장장이 생활

<영흥민속대장간>을 낸 지는 20년쯤 되었다. 영흥대교 개통 직후다. 영흥도는 처가가 있어서 낯설지는 않았다. 바닷가로 들어오는 마당이니 인천 연수구 동막에서 동죽 잡는 호미도 구해왔다. 동죽 호미를 잘 만들기로 소문이 난 집이었는데, 그 어른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집에서는 더 이상 동죽 호미를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갈퀴처럼 생긴 동죽 호미를 만들 때 쓰던 기계 해머도 함께 구입해 가져왔다. 지금도 그때 가져온 호미를 보관하고 있다. 이규산 장인은 동막의 동죽 호미 모양을 약간 개량해서 만들었다. 영흥도에서는 이 호미로 바지락을 많이 잡는다.

숭례문 복구와 떠돌이 대장장이 생활, 농민들이 연장을 벼리기 위해 장작까지 챙겨 들고 가야 했던 예전의 대장간 모습, 상수도가 없어 주민들이 장비를 동원해 지하수를 파서 먹던 시절. 이규산 장인의 <영흥민속대장간>은 우리 사회의 지나온 여러 모습을 다각도에서 들여다보게 하는 색다른 기록관이라고 할 수 있다.
 

'겨울 진객' 기러기들이 영흥민속대장간 바로 앞 논에까지 찾아와 먹이 활동을 하고 있다. 2023년 2월 14일. ⓒ 정진오


2023년 2월 14일 이규산 장인을 처음 만난 날,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려는데 대장간 바로 앞 논에서 기러기 수십 마리가 먹이 활동을 하고 있었다. 게네들이 워낙 경계심이 많다 보니 대장간 창문을 조심스레 빼꼼 열고 숨죽여 지켜보았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 떼는 자주 볼 수가 있었는데 땅에 무리 지어 있는 걸 이처럼 코앞에서 가까이 볼 기회는 거의 없었다. 대장간의 망치질 소리가 자연을 닮아서였을까. 겨울 논을 느긋하게 걸으며 먹이를 찾는 기러기 떼 풍경이 영흥도 대장간에서 덤으로 얻은 특별한 선물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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